주일낮예배

제목진짜 이유2024-02-28 17:10
작성자 Level 10

2019년 9월 29일 주일 낮 예배 설교 (갈라디아서 38번째 강해)

 

본문 갈라디아서 6:6

제목 진짜 이유

 

서론)

 

뉴욕 리디머 교회의 담임목사인 팀 켈러는 왕의 십자가라는 제하로 발간한 마가복음 강해 설교집에서 대단히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남겨 놓았습니다.

왜 어떤 사람들이 이 세상을 똑바른 나라’(right-side-up-kingdom)라고 부르고 하나님의 나라를 거꾸로 나라’((the upside-down-kingdom)라고 부르는지 아는가권력과 명예를 강조하는 세상은 똑바르고 자연스럽게 보이지만 예수님이 말씀하신 섬김과 희생은 전혀 불가능하고 부자연스럽게 보이기 때문이다.”(팀 켈러, “왕의 십자가”, p,281)

이 글을 가슴에 담았기에 저는 저의 첫 번째 졸저인 시골 목사의 행복한 글 여행’(p,193)에도 이 부분을 삽입했습니다.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존재가 누구인가?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똑바른 나라라고 우기는 그런 삶의 정황이 정말로 똑바른 나라가 아니라 도리어 거꾸로 나라가 진짜로 똑바른 나라라고 믿고 나아가는 자들입니다.

개인적으로 이 생각은 목회를 시작한 처음부터 지금까지 0.1도도 뒤로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더불어 앞으로도 결코 물러서지 않을 생각입니다.

그러다 보니 실제로는 이렇게 살아가는 삶이 상당히 불편합니다.

설상가상으로 이 상황도 만만치 않은데 저에게는 또 다른 짐이 있습니다.

남들처럼 좋은 게 좋은 거야라고 에두르며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인데 왜 그런지 절대로 그렇게 하지 못하는 목사의 오기가 하나 있습니다.

교회가 전혀 똑바르지 않은 이 세상의 모양새를 모방하는 정도가 아니라 진두지휘하며 똑바르지 않은 그 셈법을 이끌어 가는 온상이 되었다는 기막힘이 도무지 용납되지 않는 마음의 짐입니다.

사사 시대 전반에 드리웠던 흑암의 그림자가 무엇이었습니까?

사사기 21:25절 후반절에 답이 있습니다.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옳지 않아도 옳다고 우기며 막 산 시대가 사사 시대입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한 가지 질문을 던져 보고 싶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가 성경의 사사 시대의 캄캄함을 뛰어 넘는 신 사사 시대라고 정의하는데 저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습니다.

해서 지금 제가 크리스천 연합 신문에 격주로 걸쳐 연재하는 사사기 강해의 핵심적인 키워드는 포스트 사사 시대가 바로 지금이라는 강조입니다,

제 질문은 여기에 있습니다.

바로 이 기막힌 시대의 암울한 명제에 맞서 대항하며 사람의 소견이 아닌 하나님의 소견에 부침할 수 있는 공동체가 과연 있을까?

저는 지난 목양의 31년 동안 식을 줄 모르는 오기로 그게 바로 내 사랑하는 교회라고 선포하고 또 선언해 왔습니다.

그러나 어제 있었던 슈퍼 메가 처치를 두둔하는 가장 비열하고 천박한 오늘의 산헤드린 공회를 보면서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과연 이 땅의 소망이 교회일까?

어제 jtbc 앵커 브리핑을 보다가 한 네티즌이 이렇게 글을 올린 것을 보았습니다.

손석희 목사께서 또 한 건 하셨습니다.”

한경직 목사께서 남한산성에 칩거할 때 그를 찾아온 많은 후배 목사들에게 던진 비수를 화두로 목사들을 경책하게 했다는 이 야사를 끄집어내 브리핑을 한 이 치밀어 오르는 치욕적인 비아냥으로 인해 저는 거의 실신 직전에 몰렸습니다.

가뜩이나 환절기 감기로 거의 망신창이가 된 육체의 상태였는데 그 글을 읽다가 내 영혼도 정비례하여 그로기 상태가 되었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오늘 주일 설교는 지임철 전도사에게 맡길까도 생각해 보았지만 그러면 교우들 대부분이 유별나다고 공격할 것이고태업을 한다고 불만을 터트릴 것이 분명하기에 무거운 마음으로 설교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어떤 면에서 너무 잔인하다가 생각이 들 정도로 저를 코너로 모셨습니다.

오늘 갈라디아서 38번째 강해 텍스트가 본문이라는 점 때문입니다.

이 본문은 감리교단에서 7월 첫 주에 지키는 교역자 보건주일 즉 목회자를 사랑하는 주간에 곧잘 중앙집권적으로 각 지 교회에 내려주는 단골 텍스트라 더욱 난처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특히나 더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간구하며 비장한 마음으로 본문 강해를 이어나가려고 합니다.

설교를 하는 담임목사를 위하여 설교가 끝날 때까지 끝까지 중보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본론)

 

저는 오늘 본문을 6절 한 절만으로 한정했습니다.

원래 이 구절은 6-10절까지 이어지는 말씀이기에 한 묶음으로 살펴야 하지만 왠지 6절 한 절만으로도 오늘의 메시지를 전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성령의 조명에 순종하기로 했기 때문입니다.

본문을 다시 생각하며 읽겠습니다.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여기에 번역되어 있는 호 가테쿠메노스’ 즉 가르침을 받는 자는 세속적인 지식을 전수받는 학생을 의미하는 자가 아닙니다.

이 단어를 풀기 위해서 가르침을 받는 자의 성격을 잘 설명한 영어성경 NIV 번역을 읽어 드리겠습니다.

“the one who receives instruction in the word.”

번역하면 말씀 안에서 훈련을 받는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이들은 믿음의 여정으로 들어서기 위해 그리고 또 살아내기 위해 교육을 받는 일체의 신자들을 의미한다는 문구일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적용하면 여기에 나와 예배하는 모든 성도들을 의미한다고 해도 전혀 틀리지 않은 해석일 것입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가르침을 받는 일체의 모든 사람들에게 이렇게 역설합니다.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그렇다면 바울은 왜 갈라디아서를 마무리하는 6장에서 뜬금없이 이 부담스러워 보이는 발언을 했을까요?

이 해석은 대단히 중요할 것 같습니다.

우리가 너무 잘 아는 것처럼 바울은 자비량 사역자였습니다.

바울의 자비량 사역은 아마도 고린도 사역부터 진행되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를 만난 것이 고린도였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고린도에 입성한 시기를 제 2차 전도여행 시기인 51-53년으로 짐작합니다.

더불어 갈라디아 지역 선교도 이 시기와 거의 맞물립니다. (제 2차 전도여행 시기를 학자들은 50-53년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저는 갈라디아서 강해를 처음 시작했을 때 갈라디아서가 저술된 시기를 주후 53-55년으로 학자들이 추론함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그림이 그려집니다.

이 서신을 기록하고 있을 때 바울은 고린도지역에서부터 시작하여 갈라디아 지역에서까지 이어졌던 자비량 사역을 이미 철저하게 경험하였을 것이라는 전제입니다.

아마도 바울이 경험했던 자비량 사역은 바울 스스로에게 대단히 많은 목회적인 소회를 느끼게 해 주었을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또 다른 갈라디아교회에서 경험했던 바울의 아픔을 소개해야 할 것 같습니다.

바울이 갈라디아에 도착하여 교회를 세웠을 때반응은 대단히 귀했습니다.

특히 4:14-15절의 보고는 압권입니다.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 내가 너희에게 증언하노니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라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에게 주었으리라

무엇을 증언합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 있었던 갈라디아 교회 공동체의 지체들은 바울을 그리스도 예수처럼 영접하여 주었다고 했습니다.

더불어 아마도 안질로 예상되는 바울의 고통을 너무나 잘 알았던 갈라디아 교회 교우들은 그에게 눈이라도 빼 줄 요량이었다고 보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구절 다음에 나오는 후속 말씀이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갈라디아서 4:16-20절입니다.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참된 말을 하므로 원수가 되었느냐 그들이 너희에게 대하여 열심 내는 것은 좋은 뜻이 아니요 오직 너희를 이간시켜 너희로 그들에게 대하여 열심을 내게 하려 함이라 좋은 일에 대하여 열심으로 사모함을 받음은 내가 너희를 대하였을 때뿐 아니라 언제든지 좋으니라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내가 이제라도 너희와 함께 있어 내 언성을 높이려 함은 너희에 대하여 의혹이 있음이라

급반전입니다.

배교한 갈라디아 교회의 지체들은 이제는 바울에게 해산하는 고통을 심겨주는 반대자들로 전락했습니다.

바울이 언성을 높이지 않으면 안 되는 적대자로 변질되었습니다.

그들은 할례주의자들의 이간질에 넘어가 바울의 사도권까지 부인하는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에서 사역을 하였던 일을 추억하며 이 편지를 쓰고 있는 시기에는 자기를 그렇게 사랑해 주었고돌보아 주었던 갈라디아 교회 공동체의 성도들이 이제는 그 신뢰에서 완전히 떠나 자신의 사도권까지 불신하는 억장이 무너지는 영적 고통을 당했기에 이렇게 본문에서 강변하고 있는 것인지 모릅니다.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본문 텍스트의 정황 설명은 이 정도면 충분히 이해하셨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더 이상 진도를 나가지는 않겠습니다.

이 말을 오늘 현장의 언어로 이렇게 바꾸어 보겠습니다.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여러분의 영적인 면을 담당하여 말씀을 먹이고 있는 이강덕 목사를 사랑하시고모든 좋은 것을 함께 나누시기를 바랍니다.”

몇 분이나 이 권고에 진정성이 있게 아멘 하셨습니까?

너무 속이 보이는 요구라고 마음에 불편함이 있으십니까?

그래도 본문 텍스트를 21세기의 언어로 바꾸면 이렇게 적용하는 것 말고는 딱히 다른 표현이 없어 다시 한 번 언급합니다.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여러분의 영적인 면을 담당하여 말씀을 먹이고 있는 이강덕 목사를 사랑하시고모든 좋은 것을 함께 나누시기를 바랍니다.”

여기까지의 언급은 본문에 대한 정황 해석에 따른 저의 입장입니다.

이제부터는 정말로 불편한 부분을 나누어야 할 것 같습니다.

지난 목요일에 있었던 슈퍼 메가 처치에 의해 자행된 한국 교회에 행한 자살 행위가 여론에 전해진 뒤에 수많은 네티즌들이 인터넷 상에 올린 가장 많은 댓글은 약간의 정도 차이가 있기는 했지만 다음에서 크게 빗나가지 않았습니다.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목사와 돈을 믿는 기독교의 사망

저는 이 질타에 대하여 전혀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100% 맞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주일에 교우들에게 이렇게 말씀드릴 수밖에 없음이 참으로 애석하고 아프기 그지없습니다.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이강덕 목사를 믿지 말고 예수 잘 믿기를 바랍니다.”

문제는 이렇게 말로 권면한다고 해서 오늘 우리들의 신앙의 문제가 해결될 수 없다는 점입니다.

지금 한국교회의 체계 구조는 개 교회주의이자 교파교단주의입니다.

개 교회주의와 교파교단주의라는 체계 하에서는 지금의 교회 시스템이 바뀌지 않습니다.

어쩔 수 없이 성도들은 회중들의 공의가 통과된 목사를 청빙하여 목회자 중심적인 교회 구조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 한계가 있습니다.

앞으로 한국교회의 파격적인 변화나 혁명적인 틀을 바꾸는 일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어쩔 수 이 체계로 가야 하는 것이 운명입니다.

앞으로 제가 은퇴를 하고 난 뒤우리 아들이 또 다른 현장에서 담임목회를 할 때 즈음이 되면 이런 기대가 이루어질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는 교회 체계이기에 가장 현명한 방법은 지금의 상황에서 가장 건강한 교회 형태를 목사와 성도가 만들어 가는 수밖에는 없습니다.

이렇게 언급한 것은 결코 상투성이 있는 구습으로의 후퇴가 아니며 최선은 아니더라도 차선의 방법을 모색하여 교회를 일구어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역설하기 위함입니다.

이것을 위해 저는 오늘 본문에 제시된 바울의 권고 안에서 두 가지의 내용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1) 가르치는 자가 바르게 가르치도록 성도들이 경계하십시오.

 

새물결 플러스 출판사 대표인 김요한 목사는 2017년에 상식이 통하는 목사라는 제하의 약간은 도발적인 글을 모아 책을 출간했습니다.

그는 교계에서 야성이 있는 목사고 개혁적인 목사의 그룹에 속해 있는 목회자입니다.

그가 책을 열면서 했던 말을 교우들에게 소개합니다.

나는 교회와 목사의 기준을 가급적 높이 잡는 것이 옳다고 믿는 사람이다바꿔 말하면 교회와 목사의 기준을 낮추는 것은 일종의 죄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p,9)

김 목사의 이런 의견 개진을 저는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적어도 김 목사가 본인이 제시한 수준 높은 목사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선행해야 하는 4가지의 지침을 이 책에서 내놓고 있습니다.

첫째목사가 계속해서 질적 수준을 높이기 위해 공부에 목숨을 걸어 하고둘째더불어 신자들이 감히 따라올 수 없는 엄격한 영성 유지가 필요하며셋째아무리 지적으로영적으로 뛰어난 자질을 갖고 있더라도 윤리적인 삶에서 실수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하며마지막으로 개인적인 삶에 있어서 철저한 자기 관리가 이루어지는 목회 행정가(정치하는 목사가 되지 않도록)가 되어야 함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이 네 가지의 영역에 대하여 목사가 성장하고 있는가를 교우들이 경계해야 합니다.

만에 하나 목사가 이 4가지의 영역에서 소홀해지면 압박해야 합니다.

그것은 목회자를 대적하는 일이 아닙니다.

좋은 목회자를 만들어가는 동역입니다.

목사가 4가지에 실패하면 교우들을 바르게 가르칠 수 없습니다.

목사는 바른 신학자이자 목회자이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목숨을 걸고 계속해서 공부해야 합니다.

목사가 공부하지 않는 순간그 교회의 지적 성장은 멈추며 사망합니다.

목사가 공부하고 자기 개발에 최선을 다하고 있는지 감시하십시오.

그러려면 깨어 있는 성도들도 공부해야 합니다.

이 연결고리는 반드시 필요합니다.

목사가 영적으로 계속해서 훈련하고 있는지를 감시하십시오.

성령이 기름 부으신 지성을 사모하고 있는지 눈 여겨 보십시오.

성도들을 스프랑크니조마이의 공감의 사랑으로 살피고 있는지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십시오.

목사가 성령으로 충만한지 그렇지 않은지를 살피십시오.

교회는 세상의 지식을 가르치는 곳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전하는 곳입니다.

그러기에 목사의 영성은 필수적인 도구이기 때문입니다.

목사가 가정과 개인적인 사생활에 있어서 윤리적으로 정직한가를 살피십시오.

목사도 인간인지를 언제든지 넘어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목회자가 이런 윤리적인 문제에서 넘어지지 않도록 교우들은 너무 가깝게 목사의 사생활을 노출하라고 압박하지 마십시오.

목사가 아내를 위해 최선을 다하며자식을 위해 헌신하는 것은 가장 정상적인 가정 목회입니다.

목사가 가정 밖에는 모른다고 불만을 터트리지 마십시오.

가정 목회만을 위해 사역하는 목사는 이미 목사의 자질이 없는 사람입니다.

적어도 가정을 소중히 여길 수 있는 여백을 성도들이 만들어 줄 때 목사는 건강한 목회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목사가 목회의 전문성을 갖고 있는 사람임을 인정하고 성도들은 그 전문성의 심화를 위해 기도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목사가 정치에 관심을 갖는 순간그 교회는 메마르게 됩니다.

주님의 방향성과는 정 반대의 길을 가게 됩니다.

여러분은 담임목회자가 정치적인 목사가 되지 않도록 압박해야 합니다.

지난 주에 스웨덴 출신의 16살 밖에 되지 않은 소녀 크레타 툰베리가 각국 정상들이 모여 있는 유엔 기후 행동 정상 회담 자리에서 강력하게 정상들을 성토하는 연설을 해서 많은 사람들의 호응을 받아 냈습니다.

그녀는 전 세계의 기후 협상의 최대 방해자인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앞에서 이렇게 열변을 토해 냈습니다.

당신들의 그 공허한 말로 인해 우리들의 미래와 꿈을 빼앗아 갔습니다어떻게 감히 그럴 수 있단 말입니까이제는 이렇게 기후 협상을 망치하고는 당신들을 우리들이 더 이상 용서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 어린 소녀가 외친 How dare you? 는 지금도 저에게는 대단히 큰 공명으로 울리고 있습니다.

만에 하나 제가 가르치는 것에 소홀하다는 생각이 들 때과감하게 이렇게 말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How dare you?

 

2) 가르침을 받는 자는 가르치는 자에게 예의를 지키십시다.

 

이제 앞 항목에서 말한 것을 전제로 교우들에게 권합니다.

만에 하나 목사인 제가 가르치는 것을 위해 최선을 다한다고 생각된다면 가르치는 저를 위한 지원을 아끼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분명히 이렇게 말했습니다.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여기에 기록된 함께 하라는 번역에 저는 특별히 주목하고 싶었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이 단어는 헬라어 코이노네이토의 번역이기 때문입니다.

원형 단어 코이노네오가 무슨 뜻입니까?

교제하다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서로 소통하고 교통하는 것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 속에 함축되어 있는 의미는 단지 물질적인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일체의 모든 일에 대하여 교통하는 것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설교를 준비하면서 성도가 목사에게 지원해야 하는 일체의 모든 일이라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를 조심스럽게 들추어 내 보았습니다.

그러다가 이런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목사가 목회를 하는 일체의 과정을 지원하며 좋은 것을 함께 하는 것은 상식의 도()로 대하는 것에서 벗어나지 않는 일이라고 정의하고 싶었습니다.

목사를 먹사로 인식하는 비아냥대는 시대기독교를 개독교로 바꾸어 부르는 시대가 된 이유는 가르치는 자가 제대로 가르치지 못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앞에서 말한 가르치는 자의 4가지의 범례에서 실패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해서 가르치는 자에 대한 위상은 바닥 그 자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닌 추락의 끝을 맛보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올바른 가르침을 목사가 무언가를 요구해도 색안경을 끼고 보는 가슴 아픈 시대가 오늘임을 저 또한 바보가 아니기에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가르침을 받는 자들이 가르치는 자들에게 가장 최소한의 갖추어야 할 태도에서는 저 또한 물러나고 싶지 않습니다.

그것은 목사를 대할 때 상식의 도에서 벗어나는 무례를 범하지 않기를 부탁합니다.

무례하게 목사를 대하는 것은 너무 많아 한 마디로 말하기가 쉽지 않지만 오늘은 한 가지의 내용에 집중하고 싶습니다.

우리 교회에서 약 1년 6개월을 사역한 부교역자가 언젠가 저와 함께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교회에 부임한 뒤에 아주 심각한 어투로 이렇게 질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목사님왜 세인 교회 성도들은 목사님과 사모님에게 반말을 하지요그게 친하다는 표현인가요제가 전에 시무하던 교회에서는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기에 우리 교회로 온 이후 이 일로 인해 너무 당황스러웠습니다.”

이론을 설명할 수 있는 답이 없었던 그날 부교역자에게 너무 수치스러웠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교회 목사로 먹사로 여기고기독교를 개독교로 부르는 참람한 시대이지만세인 교회는 세인 교회의 예를 지키는 보루였으면 좋겠습니다.

지금 제가 요구하는 것은 절대로 무리한 요구가 아닙니다.

가장 상식적인 예의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목회자를 진정성 있게 존중해 주어야 세상 사람도 교회를 존중해 줄 것입니다.

요한복음 13:4절과 12절을 읽겠습니다.

먼저 4절입니다.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이어 12절을 읽겠습니다.

그들의 발을 씻으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주님은 세족 목요일 저녁에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기 위해 입고 있었던 겉옷을 벗으셨습니다.

권위의 내려놓으심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의 발을 다 씻으신 주님은 다시 벗으셨던 겉옷을 입으시고 최후의 만찬 강론을 진행하셨습니다.

권위의 추스르심이었습니다.

주님도 권위를 챙기셨습니다.

행여나 제자들에게 빈틈을 보일까 염려해서 취하신 행동이었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담임목사가 여러분을 가르치는 일에 있어서 앞에서 언급한 4가지 사항을 지켜나가는 종으로 사역을 감당하는 한 목회자가 가지고 있는 영적 권위를 인정해 주는 것은 상식의 예의를 지키는 것임을 명심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가르침을 받는 자들이 가르치는 자에게 좋은 것을 함께 하는 일입니다.

 

결론)

 

이제 저는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슈퍼 메가 처치가 한국교회에 자살골을 넣는 날종편인 jtbc에 출연한 교회 개혁 실천 연대 소속 아무개 목사가 스튜디오에 나와 앵커와 대담을 한 뒤에 마지막 클로징 멘트로 이런 소회를 남겼습니다.

교회가 세상을 염려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교회를 염려하는 이 기막힌 세태에 대하여 목회를 하는 목사로서 너무나 부끄럽습니다죄송합니다얼굴을 들 수가 없을 정도로 부끄럽습니다.”

사랑하는 세인 교회 지체 여러분!

한 대형교회의 무지막지한 폭력에 그 교회와 그것을 암묵적으로 동의한 교단은 겉으로 보기에는 상생한 것 같지만반대로 한국교회는 무너져 내리는 참담함을 앞으로 더 빠르게 목도하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저는 이것을 믿습니다.

아직도 이 땅에는 일련의 이 무시무시한 폭력에도 굴하지 않고 너무나 부끄럽습니다죄송합니다얼굴을 들 수가 없을 정도로 부끄럽다고 말하는 남은 자들이 한국교회에는 존재합니다.

그 그루터기 같은 종들과 교회가 존재합니다.

나는 이 교회들로 인해 이 땅의 교회들이 다시 세워져 갈 것을 믿는 목사입니다.

제가 은퇴하기 전에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나는 지금도 하나님이 계획하신 건강한 교회를 이루어 갈 후배 목회자들이 있음을 알기에 그냥 우리 세인교회도 그들과 보폭을 맞추어 걸어가는 교회이기를 바랍니다.

가르치는 자와 가르침을 받는 자가 서로 아름다운 관계를 맺어야 하는 진짜 이유는 그래야 교회가 교회다워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교회가 이 땅의 마지막 소망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이 땅위에 오신 하나님의 본체
십자가에 달리사 우리 죄 사하셨네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우리 예수 이름 앞에 절하고
모든 입이 주를 시인해
영광 중에 오실 주를 보리라 선포해

왕께 만세 존귀와 위엄을 찬양해
왕의 왕께 만세 주 예수 하나님

우리 고대하내 주님 오실 그날
다시 사실 왕의 영광 이 땅을 비추네
사단의 권세는 주 앞에 무너져
생명과 진리의 주 권세 가장 높도다

예수 이름 앞에 절하고
모든 입이 주를 시인해
영광 중에 오실 주를 보리라 선포해

왕께 만세 존귀와 위엄을 찬양해 

왕의 왕께 만세 주 예수 하나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