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부모에게서 태어났어도 우리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선민, 선영 집사님처럼 구분이 안되는게 아니라 우리는 자매라고 해야 자매인줄 안다. 생김새와 키 뿐 아니라 모든 것이 달라도 너무 다르다. 그런데 1년 차이로 같은 학교를 다녀서 나는 엄청 피곤했다. 왜냐고~~~~
우리 언니 영애는 별명이 "국정교과서"였다. 학교 두발 규정이 귀밑 1cm 면 1cm를 넘은적이 없다. 초등학교 부터 대학 졸업까지 전교 1등을 놓쳐본 적이 없다. 계속 같은 학교를 다닌 나는 학교에 내야하는 돈을 한번도 부풀려서 더 받아내지 못했다. 착실한 언니 덕에.... 만약 학교에 내야하는 돈이 4500원이면 아버지는 나에게는 정확히 4500원을 주시고 언니는 만원짜리를 주셨다. 왜냐구~~~ 나는 4500원을 주어도 끝이고 만원을 주어도 끝이었으니까. 하지만 언니는 필요한 돈만 쓰고 거스름 돈을 항상 정확히 가져다 드렸으니까.... 공부만 잘 하는 것이 아니라 언니는 매사에 착실했다. 학교가 마치면 나는 제천 시내 곳곳에 사는 친구 집에 놀러 다녔고 언니는 바로 귀가했다.
언니의 대학 입시 연도가 1980년인데, 그 한 해만 "체력장' 기준이 달라서 윗몸 일으키기가 1분에 57번이 만점 기준이었다. 언니는 매일 공부를 마치면 집에서라도 하루도 빠지지 않고 연습을 했다. 그래서 결국은 1분에 57번을 해냈다. 체육 선생님께서 전교생에게 본받으라고 방송을 하실 정도였다.
그 당시 제천 여고에서 공 들여 키운 학생 이영애, 전교에서 한명. 제천여고 대표로 '이화여자대학교"에 본고사를 치르러 갔다. 밖에서 기다리며 엄마는 언니가 떨어 질 줄 알았다고 했다. 다른 엄마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니 과외비가 얼마... 이런 이야기를 하는데 우리 언니는 그 당시 제천 사는 모든 아이들 처럼 학교만 열심히 다녔으니까.... 내신 제도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본고사도 치르던 때였으니까....
암튼 1차 시험에 떨어지자 언니는 재수를 해 보겠다고 했다. 대성 학원을 찾아가서 입학 허락을 받고 나오는데 엄마는 그 어두운 곳에 내딸을 둘 수 없다는 생각이 너무 강하게 들어 2차 시험을 치르게 했다. 얌전한 여학생들이 모여있는 "상명여자사범대학"에 합격한 언니는 그 곳을 다닐수 밖에 없었다.
대학에서도 내내 과 수석을 했던 언니는 교수님의 만류를 뒤로 하고 졸업과 동시에 시집을 갔다.
시집을 가서도 맏딸에 맏며느리 역할, 요즈음은 그것도 모자라 조카들의 엄마노릇까지 하느라 힘이든다.
말은 그래도 학창시절엔 명랑활달 소녀 였거든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