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2월 16일 월요일 성서 일과 묵상 제1 이사야가 품었던 그날 오늘의 성서 일과 이사야 11:1-9, 민수기 16:1-19, 히브리서 13:7-17 꽃물 (말씀 새기기) 이사야 11:6-9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마중물 (말씀 묵상) 작금, 이런 세상은 요원한 것일까? 예언자가 보았고 기대했던 이런 날은 오늘 불가능한 것일까? 평화가 충만한 나라, 폭력이 존재하지 않는 나라, 이전투구가 없는 나라, 이런 세상이 되는 것은 과연 불가능한 것일까? 성경이 증언하는 이런 나라는 대단히 유감스럽지만 주님의 나라가 이 땅에 완성될 때까지는 불가능하다. 그날이 임하는 것은 주께서 통치자로 이 땅에 다시 오시면 그때 이루어지리라. 지난 주간, 격동의 나날을 보냈다. 적어도 내가 접하고 있는 일체 네트워크에서 알려주고 있는 내용들은 요동함이었고, 격변이었다. 아픈 것은 그 격동의 여백에 샬롬이 기초인 하나님의 나라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예언자 이사야가 노래한 폭력이 멈추고, 샬롬이 충만한 나라는 1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기에 해됨도 상함도 없는 그런 나라는 내 시선에 들어올 리 없었고, 치열한 경쟁 논리, 이합집산의 패거리들이 광기에 날뛰는 씁쓸함만 가득 차 있었다. 아주 가끔, 나는 이런 생각을 한다. 상식이 통하지 않는 것처럼 큰 재앙이 없다고 말이다. 그래서 나는 교회도 상식이 통하고, 인간이 부대끼는 모든 영역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상식을 존중히 여기는 마음이라고 생각할 때가 빈번하다. 지난 주간, 노벨상을 수상한 한강 작가가 수상 소감에서 밝힌 이 단발마적인 외침이 가슴을 뜨겁게 했다. “내 글의 모든 결어는 사랑으로 가는 기초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촌철살인이 떠오른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요 13:1) 이런 마음으로 살다 보면 예언자 이사야가 본 그런 날도 오지 않겠나 싶어 자위한다. 두레박(질문) 나는 예언자가 꿈꾸고 소망한 그 나라를 여전히 꿈꾸고 있는가? 손 우물 (한 줄 기도) 폭력이 사라지게 하소서. 증오와 미움이 박멸되게 하소서. 나비물 (말씀의 실천) 이사야가 품었던 그날을 나도 품자. 하늘바라기 (중보기도) 하나님, 이번 주간도 대한민국의 갈릴리 백성들과 함께하여 주옵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