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30일 화요일 성서 일과 묵상 당연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늘의 성서 일과 시편 111편, 출애굽기 24:1-11, 로마서 15:22-33, 시편 37:12-22, 사무엘하 11:22-27 꽃물 (말씀 새기기) 출애굽기 24:1-2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와 이스라엘 장로 칠십 명과 함께 여호와께로 올라와 멀리서 경배하고 너 모세만 여호와께 가까이 나아오고 그들은 가까이 나아오지 말며 백성은 너와 함께 올라오지 말지니라 마중물 (말씀 묵상) 시내산에서 이스라엘과 언약을 체결하는 야훼께서 언약 체결 전에 대단히 엄중한 모드로 모세에게 하명(下命)하신 메시지가 오늘 성서 일과다. 눈에 띄는 구절이 보인다.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와 이스라엘 장로 칠십 명과 함께 여호와께로 올라와 멀리서 경배하고” 시내산으로 모세와 같이 올라간 동행자는 아론, 그의 장남과 차남인 나답과 아비후, 그리고 70명의 장로들이었다. 언약 체결 장소에 있었던 인물 중에 나답과 아비후가 있었다. 정말로, 영광스러운 장소였다. 아무에게나 허락되지 않은 신현현(theophany)을 경험할 수 있는 은총의 자리에 초대받은 것이다.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각기 향로를 가져다가 여호와께서 명령하시지 아니하신 다른 불을 담아 여호와 앞에 분향하였더니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그들을 삼키매 그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은지라”(레 10:1-2) 은총의 현장에서 야훼께서 직접 체결하신 언약 현장에 있었던 나답과 아비후가 그들의 삶의 노정 중에 당한 비극적 결말을 레위기는 이렇게 보고했다. 아이러니하다. 은총의 현장에 가장 가까이 있었던 이들이 하나님의 심판으로 죽음을 당했다는 보고는 씁쓸하다. 왜? 왜? 그럴 수 밖에 없었을까? 성경의 내증은 구체적인 설명을 생략하고 있어서 레위기 정황으로만 추론할 수 있는데, 표면적 이유는 하나님이 금하신 것을 자행한 죄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 성서를 묵상하면서 질문한 것은 이 답을 몰라 질문한 것이 아니다. 왜 나답과 아비후는 하나님이 금한 금지명령을 한 것일까의 질문이다. 나에게 임한 교훈으로 적용해 본다. 받은 은혜에 대한 감사의 상실. 그렇다. 기실, 잘 살펴보면 내가 받은 은혜는 이론으로 설명할 수 없는 엄청난 복이다. 하지만 그 복이 매일 임하면 너무 당연한 일로 치부하는 것이 인간이 갖고 있는 헛헛한 영적 자화상이다. 지금 내가 섬기고 있는 교회를 주신 은혜가 은혜가 아니라 너무 당연한 일이라고 평가절하한다. 내가 오늘 공급받는 하나님의 말씀과 레마가 은혜의 줄기가 아니라, 뭐 그냥 그렇게 주어지는 당연한 일이라고 치부한다. 나에게 꼭 필요해서 보내 주신 동역자가 뭐 그냥 그렇게 우연히 내가 만난 사람이라는 무감각으로 굳어져 은혜를 상실하는 내 현상이 나의 연약한 영적 자화상임을 인지해야 하는데 그것조차도 느끼지 못하는 마비 증상으로 인해 은혜를 상실한다. 손경민 목사의 고백 그대로 은혜는 당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이라는 영적 민감함을 상실하지 않도록 매 순간 오롯이 긴장해야겠다. 아비후와 나답을 통해 받는 반면교사의 울림이다. 두레박 (질문) 은총을 은총으로 느끼고 있는가? 손 우물 (한 줄 기도) 내 영혼이 은총 입은 그 감동을 상실하지 않게 하옵소서. 나비물 (말씀의 실천) 다시 각인하자. 민감함이 영적 승리의 제일 요인임을. 하늘바라기 (중보기도) 하나님, 이요한 목사가 섬겨야 하는 고등부 공동체의 여름 수련회가 승리하게 하시고, 위로부터 내리시는 성령의 역동하심은 충만하게 하옵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