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PA(Disciple Pastoral Academy) 특강 독서가 설교에 미치는 영향 제천세인교회 이강덕 목사 들어가는 말 “설교는 인간을 이해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이 행해지는 사건이다.” (루돌프 보렌, “설교학 실천론”, 박근원역, 대한기독교서회, 2002,p,139.) 정신을 번쩍 들게 하는 촌철살인이다. 필자는 아주 가끔 이런 핀잔을 많이 받는다. “목사님, 설교가 너무 어려워요. 신학교에서 강의하는 것 같아요.” 이런 소리를 듣고도 섬기는 교회에서 버티는 것을 보면 기적이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고개를 기웃거리게 되는 유혹은 싫은 소리에 대한 맷집이 커간다는 용기(?)다. 이 정도로 핍박 아닌 핍박을 받으면 청중이 원하는 설교를 해야 마땅하다. 그래야 나도 편하고, 섬기는 교회에서 설교를 듣는 회중도 편한 테니 말이다. 문제는 보렌이 갈파한 설교의 원형적인 정의가 나를 옭아맨다는 데에 있다. 보렌의 말대로 설교가 인간을 이해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행하는 사건임을 믿는다면 설교는 신비적인 하나님의 영역을 선포하는 사역이다. 그런데 어떻게 설교로 전해지는 성서의 계시가 쉬울 수 있단 말인가! 필자가 이렇게 말하면 곧바로 치고 들어오는 반격이 이런 것이다. “청중이 이해하지 못하는 설교를 어떻게 설교라고 할 수 있나요?” 동의한다. 청중이 반응하지 않는 설교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에 필자 역시 동의한다. 그러나 한 가지를 예민하게 짚고 넘어가자. 청중의 반응이 설교 행위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일까? 샘터 교회의 정용섭 목사는 이렇게 진단했다. “설교자 앞에 놓인 성서는 지금 존재하는 세계와 아직 존재하지 않는 세계를 총체적으로 통치하시는 하나님을 우리에게 계시한다.”(정용섭, “설교란 무엇인가?”, 홍성사, 2011,p,21.) 엄청난 통찰이다. 적용해 보자. 계시된 성서의 세계는 대단히 광범위하다. 지금 존재하는 세계와 아직 존재하지 않는 세계를 아우르는 것이 계시된 성서의 영역이다. 이 세계를 이해하는 유일한 방법은 계시된 성서의 주인공이신 하나님을 이해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이해하는 것은 인간에게 불가능한 일이다. 책에서 이런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당신이 그분을 파악한다면, 그 분은 하나님이 아니다. -Si comprehendis non Deus.- (더글라스 존 홀, “그리스도교를 다시 묻다- 부정신학의 눈으로 바라본 그리스도교”,비아,2020,p,42.) “그렇다면 형제여, 우리는 하나님에 대하여 말해야 합니까? 당신이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있다면 그 말은 하나님에 관한 말이 아닐 것입니다. 당신이 이해할 수 있다면 당신은 하나님이 아닌 다른 무언가를 이해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이 생각했던 그대로라면, 당신은 스스로 속인 것입니다. 당신이 그 분을 파악한다면, 그 분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무언가 하나님이시라면 당신은 결코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불편해도 곱씹어야 하는 대목이다. 그러므로 설교자가 행하는 설교 행위를 통해 하나님을 온전하게 이해하게 한다는 것은 시도 자체가 어불성설이며, 한편으로 보면 교만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설교 행위를 통해 청중에게 그 설교의 내용을 이해하기 쉽게 만드는 작업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보아도 틀린 접근이 아니다. 설교를 통하여 회중을 반응하게 하는 것은 결코 설교자의 몫이 아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일하심과 성령의 조명하심만이 계시된 성서를 이해하는 방법이다. 필자는 설교를 쉽게 하는 것과 어렵게 하는 것이라는 두 개의 패러다임을 갖고 평가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이런 이유 때문에 필자가 더 집중하려고 노력하는 테제는 계시된 성서가 말하고자 하는 이미 지금 존재하는 세계(텍스트)와 존재하는 그 세계 너머에 있는 보이지 않는 세계(콘텍스트)라는 두 필드다. 이것을 치열하게 이해하기 위한 노력은 철저한 설교자의 몫이다. 목사 즉 설교자가 해야 할 일은 바로 이 점이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설교자의 역할이 없단 말인가? 그럴 리가 있겠나. 텍스트와 콘텍스트에 대한 이해를 위해 설교자가 해야 할 것이 있다. 바로 공부다. 텍스트와 콘텍스트는 위한 공부를 위한 도구는 말할 것도 없이 독서다. 바로 이 대목에서 분명한 선 긋기가 필요할 것 같아 노파심으로 전제한다. 성서학자인 양승애 교수는 텍스트에 대한 공부를 세 가지로 정의했다. ⓵ 성서의 뒤의 세계 ⓶ 성서 속의 세계 ⓷ 성서 앞의 세계 (정양모, 박태식 공편, “성서를 읽는 11가지 방법”, 생활성서, 양승애, 총론 중에서,2001,p,8.) 이 세 가지의 성서 공부 중에 ⓵번에 해당하는 연구는 성서학자들을 통해 서비스를 받아도 괜찮다. 이 영역은 원전비평, 역사비평 출전비평, 양식비평, 전승비평, 편집비평 등등으로 정의되는 대단히 전문적인 성서언어에 대한 공부와 지식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이 대목은 전문적인 지식이나, 뛰어난 자질이 있는 학자들에게 서비스를 받자. 허나 ⓶⓷에 대해 설교자가 손을 놓아서는 안 된다. 이 필드는 설교자의 철저한 공부를 통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양 교수는 성서에 대하여 이렇게 정의했다. “성서란 한마디로 인간이 인간의 언어로 담아 놓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음 세 가지의 특성을 가진다.” (앞의 책, pp,9-11) ⓐ 성서는 다양한 문화적 산물이다, 즉 성서는 사람들이 제각기 처한 역사적, 문화적 상황에서 하나님을 어떻게 체험했으며,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어떻게 체험했는지를 자기가 속한 문화의 관점에서 그 문화의 언어로 기록한 다양한 문서의 모음이다. ⓑ 성서는 다양한 신관과 신학적 인간관의 모음이다. 신관이란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가에 대한 견해를 말하고, 신학적 인간관이란 인간이 어떤 존재이며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어떠한지에 대한 견해를 말한다. ⓒ 성서는 성서 저자들이 제각기 자기들의 관점에서 제시하는 다양한 신관과 신학적 인간관들이 과연 그들과 전혀 다른 문화적, 사회적, 역사적 상황에 놓여 있는 ‘나’에게,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제시하는가를 묻고 있다. 전술한 세 가지 특성에 대한 이해는 하루아침이 이루어지는 신기루와 같은 것이 아니다. 이 세 가지의 이해는 지속적인 공부를 감당할 때 주어지는 지난(至難)한 과정이다. 그러기에 설교자는 공부에 게을러서는 안 된다. 오늘의 강의 제목으로 바꾸자. 설교자는 독서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1. 무엇을 읽을 것인가? 인문학 고전이다. 필자는 앞에서 성서는 신학적 인간관의 모음이라고 정의한 양 교수의 갈파를 소개하며 동의했다. 작년 연말에 아주 좋은 책을 만났다. 체코 출신의 신학자인 미로슬라브 볼프가 쓴 ‘세상에 생명을 주는 신학’이다. 한 대목을 인용한다. “신학이 다루는 문제는 오직 한 가지, 즉 하나님이라고 말하는 것은 단순하지만 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위한 신학자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존엄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고뇌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소망이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위한 신학자이기는 해도, 하나님의 유익을 위한 신학자는 아닙니다. 하나님은 신학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신학이 필요한 존재는 바로 인간입니다. 세상의 생명을 위한 참된 삶을 위한 신학자들이 되십시다.”( 매슈 크로스문, 미로슬라브 볼프공저, “세상에 생명을 주는 신학”,IVP, 2020,p,230.) 인간을 모르는 신학자가 있을 수 없으며, 인간을 무시하는 목회자, 설교자가 존재한다는 것은 출발부터가 틀린 발상이다. “하나님은 신학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신학이 필요한 존재는 바로 인간이다.” 필자는 이 문장을 이렇게 패러디하는 것에 조금도 주저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설교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설교가 필요한 존재는 바로 인간이다.” 인간을 이해하는 설교자가 되기 위해서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되는 대전제는 인문학적인 소양을 갖추는 일이다. 대단히 조심스러운 논쟁의 거리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설교자는 인간 이해에 대한 기본적인 자질이 있어야 한다고 필자는 확신한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관심이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학을 하는 자는 물론, 설교자는 인간 이해가 필수적 자질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를 간단히 진단하자. 너무 익숙하게 알려진 이해이지만 18세기는 혁명적인 세기라고 할 수 있다. 어떤 면인가? “18세기는 인본주의가 신중심의 세계관에서 인간 중심의 세계관으로 이동함으로 신을 밀어낸 시대다.” (김용규, “그리스도인은 왜 인문학을 공부해야 하는가?”,IVP, 2019, p,65.)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팩트다. 훑어보자. 15-16세기의 르네상스, 16세기의 과학혁명, 17세기의 계몽주의, 18세기의 프랑스 대혁명과 산업혁명, 19세기에 등장한 다윈의 진화론은 그 동안 신본주의적인 가치 하에서 살아오던 인간의 이성을 깨웠고, 그 결과 다양한 인본적인 가치들이 신의 자리를 대신했다. 감히 이런 흐름을 공적으로 여론화시킬 수 없었던 기독교적인 문화에 크로스카운터 펀치를 날린 자가 니체다. “모든 신은 죽었다. 이제 우리 초인이 살기를 원한다. 이것이야 말로 위대한 정오에 갖는 최후의 의지가 되게 하라” (니체,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흥신문화사,2020,p,106.) 1900년 사람인 니체의 이런 시도는 대단히 충격적 발언이었고, 종교(기독교)가 사장화(私葬化) 되기 시작한 분기점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이런 진화론적인 발전을 거듭한 인본주의적인 극점이 오늘을 사는 21세기에 정점을 찍은 듯하다. 히브리대학의 역사학자인 유발 하라리가 선언한 충격적 갈파는 이제 대세적 정의다. “영원한 행복과 불멸을 추구하면서 인간들은 ‘실상 자신들의 신들(gods)로 향상시키고자 한다. 이를 호모 사피엔스로부터 호모 데우스로 업그레이드되는 일로 표현한다. (중략) 결국 우리의 기술공학이 인간의 마음을 ’재-설계‘(re-engineer)하게 될 때, 지금까지 인간을 규정해 왔던 호모사피엔스는 사라지게 될 것이다. 따라서 21세기는 인류의 기획은 ’신성을 달성하는 것(attaining Divinity)’이라고 할 수 있다.” ( 박일준, “인공지능 시대, 인간을 묻다.”, 동연, 2018년, pp,128-130.) 신성을 달성하는 것이 인류의 기획이자 마스터-플랜 인 오늘을 살아야 하며 설교해야 하는 사명자들이 목사요 설교자다. 이 무시무시한 빅 브라더와 맞서야 하는 설교자가 인간을 이해하지 못한 채로 강단에 선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인문학적인 기초 체력을 키워야 한다. 필자는 가끔 강의를 하거나 세미나에 참석하면 가장 많이 받는 질문 중에 하나가 어떤 책을 읽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이다. 그때마다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추천하는 인문학 기초 세우기의 가장 훌륭한 교과서로 고전 읽기를 강조한다. 물론 필자가 이 지면을 통해 먼저 소개하는 고전은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읽어야 할 고전이다. 전제하는 것은 지금부터 소개하는 책들은 필자가 몇 년에 걸쳐 독서한 목록이 아니라 수십 년을 통해 접한 독서 목록 중에 반드시 읽어야 하는 책을 선정한 것이다. 적어도 이 정도는 설교하는 목사라면 필독해야 하는 기본적인 책임을 기억해 주기 바란다. 1) 기독교적인 고전. 여기에 소개하는 책들은 이미 번역되어 있어 다양한 출판사가 경쟁하듯 출간했다. 어느 출판사의 책이 좋은지는 전적으로 독자들의 몫이다. 해서 출간한 출판사는 여기에 싣지 않았음을 미리 밝힌다. 순서 역시 필자의 서재에 꽂혀 있는 것을 참고했다. 존 번연의 ‘천로역정’, 토머스 머튼의 ‘사막의 지혜’, 단테 알리기에리의 ‘신곡’, 토마스 아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 어거스틴의 ‘참회록’, 십자가의 성 요한의 ‘영혼의 어두운 밤’, 블레즈 파스칼의 ‘팡세’, 디트리히 본회퍼의 ‘나를 따르라’, ‘제자도의 대가’,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헨리 나우웬의 ‘탕자의 귀환’, ‘상처 입은 치유자’, 토마스 머튼의 ‘칠층산’, CS,루이스의 ‘순전한 기독교’, ‘고통의 문제’, 피고석의 하나님‘, 스크루테이프의 편지’, 아베 피에르의 ‘단순한 기쁨’, A,J 크로닌의 ‘천국의 열쇠’, 스탠리 하우어워스의 ‘한나의 아이’, 존 스토트의 ‘기독교의 기본진리’, 마틴 로이즈 존스의 ‘교리 강좌 시리즈 1,2,3’, ‘영적 침체’, 아브라함 죠수아 헤셀의 ‘사람은 혼자가 아니다’, ‘누가 사람이냐’, ‘안식’, 달라스 윌라드의 ‘하나님의 모략’, ‘잊혀진 제자도’, ‘마음의 혁신’, 헨리 센케비치의 ‘쿼바디스’, E.M 바운즈의 ‘기도의 능력’, 제임스 패커의 ‘하나님을 아는 지식’, 존 웨슬리의 ‘웨슬리 일기’, 존 칼빈의 ‘기독교강요’, 아빌라 테레사의 ‘내면의 성’, 스캇 펙의 ‘거짓의 사람들’, 유진 피터슨의 ‘이 책을 먹으라’, 리처드 포스터의 ‘기도’, ‘돈, 섹스, 권력’, 리처드 백스터의 ‘성도의 영원한 안식’,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마틴 부버의 ‘나와 너’, 챨스 쉘던의 ‘예수라면 어떻게 하실까?’, 오스왈드 챔버스의 ‘주님은 나의 최고봉’, 아이든 토저의 ‘하나님을 추구함’, 리처드 니버의 ‘문화와 그리스도’, 몰트만의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 등등. 2) 기독교적인 시각으로 보아야 하는 인문학적 고전 두 번째 소개하는 책의 목록들은 인문학적 기초 체력을 굳게 해 주는 양서들이다. 이 책들을 읽으라고 권하는 이유를 작가이자 목회자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이정일의 글로 대변하고 싶다. “지금 한국교회는 당위의 전쟁에 빠져 있다는 생각아 든다. 자신의 생각을 깃발처럼 흔들며 사는 것이 신앙과 삶의 목표가 된 듯하다. 신앙도 물감처럼 굳어질 수 있다.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야 하는 현재라는 맥락에서 말씀을 읽어내지 않으면 경직된 시각을 갖게 된다. 이것을 예방하려면 성경을 치열하게 읽는 것도 중요하지만 성경도 우리를 읽도록 해야 한다. 성경이 우리를 읽도록 할 때 문학은 이를 돕는 좋은 도구가 된다.” (이성일, “시와 소설과 그리스도인”, 예책, 2020,p,9.) 적어도 인문학적인 독서는 성경이 나를 읽도록 하는 데 도움을 준다는 기막힌 성찰에 필자도 한 마음으로 전적인 지지를 보낸다. 설교자는 기독교를 넘나드는 고전 탐독에 욕심을 내야하고, 또 최선을 다해 고전과 씨름하면서 성서 해석의 외연과 보폭을 반드시 넓혀야 하는 진보가 있어야 한다. 몇 가지만 추려 보자. 세익스피어의 ‘4대 비극’, 생떼 쥐베리의 ‘어린왕자’, 리 호이나키의 ‘정의의 길로 비틀거리며 가다’, 함석헌의 ‘뜻으로 본 한국역사’, 시오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랭던 길키의 ‘산둥수용소’, 수전 손택의 ‘해석에 반대한다.’, 조너선 색스의 ‘차이의 존중’,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 새무얼 헌팅턴의 ‘문명의 충돌’, 파커 파머의 ‘가르칠 수 있는 용기’, 칼리 지브란의 ‘사람의 아들 예수’, 치누아 아체베의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월든’, ‘시민불복종’,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털리즘’, 칼 포퍼의 ‘열린사회의 적들1,2’, 마이클 센덜의 ‘정의란 무엇인가’, ‘공정하다는 착각’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의 ‘상실수업’, ‘인생수업’, 괴테의 ‘파우스트’, 엔도 슈사쿠의 ‘바다와 독약’, ‘사해 부근에서’, ‘침묵’, 리처드 바크의 ‘갈매기의 꿈’, 에리히 프롬의 ‘자유로부터의 도피’, ‘토머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 리영희의 ’대화‘ 등등. 3) 고전적인 문학적 장르다. 앞에서 전술한 이성일은 이렇게 자신의 책에서 갈무리 했다. “하나님의 사람이 되려면 따뜻한 감성이 있어야 한다. 타인의 아픔과 자신의 편견도 볼 줄 알아야 한다. 또한 시대의 변화를 읽는 분별력 있는 눈도 필요하다. 열심히 살았지만 자신 만의 이야기가 없다면 긴장해야 한다. 문학은 자녀에게 들려줄 이야기를 만드는 법을 가르쳐 준다. 문학은 이 시대에 주신 하나님의 놀라운 선물이다. 문학은 성경이 아니라 생활에 밑줄을 그으라고 일깨운다. 그러면 우리는 생각보다 더 용감해지고 너그러워진다는 걸, 더 행복해지고 더 웃음이 많아진다는 걸, 문학을 읽으며 알게 된다. 이것이 내가 문학을 읽고 글을 쓰는 이유다.” (이성일, 앞의 책, pp,363-364.) 필자는 몇 년 전에 ‘시골목사의 행복한 글 여행’이라는 제하의 첫 번째 책을 출간했다. 3년 동안 읽은 약 300여 권의 책 중에서 북 리뷰를 했던 27권을 선정하여 졸저를 만들었다. 27권 중에 12권이 소설이다. 지난 세월을 잠시 뒤돌아본다. 박경리 선생의 ‘토지’를 다 읽고서 책을 덮으면서 눈물을 글썽였다.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 내가 토지를 섭렵하다니! 너무 대견해서. 둘째 박경리 선생 같은 분이 우리나라 사람인 것에 대한 벅차오르는 감격 때문에. 무슨 말인지를 알지 못하는 3기생들은 회개해야 한다. 단에 서서 회중을 대상으로 설교를 하는 사람이 아직도 ‘토지’를 읽지 않은 것에 대한 철저한 회개를. 필자는 ‘토지’를 읽은 지가 벌써 20 여년 정도의 시간이 지났지만, 가장 한국적인 글감을 나타낸 책이 또 있을까, 혹은 이런 소설이 다시 태어날 수 있을까 몹시 회의적이다. 이렇게 표현해 보자. 필자는 ‘토지’를 읽으면‘청국장’ 냄새가 난다. 토속적인 진한 향이. 그리고 사람이 누구인지를 어렴풋이 알게 되는 공부가 시작되고 눈이 떠진다. 조금 더 이해를 돕기 위해 선생이 박범신을 설명했던 시 한 편 소개한다. “히말라야에서/짐 지고 가는 노새를 보고/박범신은 울었다고 했다/어머니!/평생 짐을 지고 고달프게 살았던 어머니/생각이 나서 울었다고 했다/그때부터 나는 박범신을/다르게 보게 되었다/아아/저게 바로 토종이구나” (박경리,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마로니에북스,2013,p,96.) 토지를 읽으면 ‘토종’의 감성적 애착이 생긴다. 강의를 끝내고 집에 돌아가면 땡빚을 내서라도 ‘토지’를 구입하라. 후회하지 않으리. 강사의 말을 믿기 바란다. 김훈은 천재다. ‘남한산성’, ‘칼의 노래’는 사적인 한을 쌓도록 돕는다. 한을 모르는 자가 어떻게 설교를 통해 이타적인 신앙의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단 말인가! 그는 말했다. “이 세상에는 슬픈 노래가 많다.” (김훈, “연필로 쓰기”, 문학동네, 2019,p,31.) 소설은 인간을 이해하도록 만드는 최적의 도구다. 외에 필자가 섭렵했던 몇 개의 소설을 적시한다.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 조정래의 ‘태백산맥’, 이문열의 ‘삼국지’, 퀸터 그리스의 ‘양철북’,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 하진의 ‘기다림’, 셀리 모건의 ‘니웅가의 노래’, 나스메 쏘세키의 ‘마음’ 등등 너무 많아 지면에 소개하고 싶은 유혹을 끊는 것이 힘들다. 자제한다.
2. 언제 읽을 것인가? 우연히 유트브에서 ‘통섭(CONSILIENCE)’이라는 학문적인 융합을 시도한 최고의 생물학자 ’최재천 교수의 강의를 듣게 되었는데 그의 말 중에 뿌리 깊게 남은 교훈이 있다. “독서가 취미라고 말하는 사람은 분명히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이다. 독서는 빡세게 하는 것이다.” 1,000% 동의한다. 시간이 날 때, 책을 읽습니다. 거짓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책은 시간을 내서 읽는 것이다. 도무지 바빠서 책을 읽을 시간이 없습니다. 거짓이다. 게을러서 책을 안 읽는 사람이다. 필자의 실례가 모범적이고 정답이라고 생각해서 전하는 것이 아니고, 이렇게 하는 것이 필자에게는 가장 적절한 독서의 방향이라서 소개한다. 참고 바란다. 필자가 시무하는 교회는 새벽예배가 오전 6시다. 이전에는 6시간 정도를 자고 일어나도 컨디션이 괜찮았는데 이순이 되고나니 잠이 보약이라고 라이프 스타일을 조금 바꾸었다. 특별한 밤 스케줄이 없는 한 오후 7시까지는 저녁 식사를 마치고, 약 1시간 빠른 걸음으로 러닝을 한다. 샤워를 하고 저녁 큐티를 하면 9시가 된다. 필자의 기본적인 취침 시간은 오후 9시 전후다. 그리고 오전 5시에 기상을 하면 8시간 수면을 하는 셈이다. 기상 후 세면을 하고 새벽예배를 인도하기 위해 교회 강대상에 도착하는 시간, 오전 5시 30분, 그리고 7시까지 새벽예배 인도 및 기도 시간을 갖고 집에 들어와 세면을 한 뒤, 아침 식사를 한다. 아메리칸 스타일이다. 7시 40분 즈음에 서재로 출근, 간단히 스쿼트와 윗몸 일으키기로 아침 운동을 마치고 나면, 책상 앞에 앉아 촛불을 켠다. 8시 30분까지 아침 큐티와 맥체인 일일 성경 읽기를 마치고, 급한 화살기도 드리기로 아침 경건회를 마친다. 오전 9시 즈음에 드림 커피를 한 잔 내리고, 턴테이블을 열어 음악을 킨다. 리클라인 의자에 앉아 약 2시간 30분 동안, 읽고 있는 책 읽기를 시작한다. 이렇게 오전 중에 만나는 독서량은 하루에 100페이지 이상이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책 읽는 시간이 오전 타임 약 2시간 30분, 월요일 오후에 아내와 함께 가는 온천욕에서 약 1시간 30분 정도 독서, 그리고 차로 이동할 때 읽는다. (아내가 운전하는 경우) 이런 습관으로 책을 읽다보면 일주일에 적어도 두 권은 섭렵한다. 목회자들의 개인적인 삶의 리듬이 달라 종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필자의 경우, 사역은 오후로 미루고 오전 시간에는 책과 노는 시간을 갖는다. 재삼 강조하지만, 독서는 취미가 아니다. 노동이다. 그러므로 빡세게 하는 것이 독서다. 3. 어떻게 읽을 것인가? 시중에 독서법에 대한 대단히 좋은 책들이 많이 나와 있다. 어디 이뿐인가? 유트브는 영의정이다. 얼마든지 독서법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전제하거니와 소개한 독서법은 필자가 시도하는 책 읽기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유익한 채널들이다. 다만 이 지면을 통해 나누고자는 하는 것은 필자의 독서법임을 대전제한다. 1) 프롤로그, 에필로그를 의미 있게 읽는다. 좋은 책의 공통분모는 논지가 분명하다는 점이다, 대체적으로 귀납법적인 글쓰기를 시도한 작가들은 반드시 프롤로그나 에필로그에 논지를 적시하여 밝힌다. 논지는 글의 핵심적 내용을 한 문장으로 정리한 것이다. 논지가 없는 책은 읽지 않는 것이 좋다. 유익보다는 손해가 많기 때문이다. 수 년 전에 김훈 작가가 쓴 ‘공터’를 읽었다. “이 작은 소설은 내 마음의 깊은 바닥에 들러붙어 있는 기억과 인상의 파편들을 엮은 글이다. 그 기억과 인상들은 오랫동안 내 속에서 서식하면서 저희끼리 부딪치고 싸웠다.” (김훈, “공터에서”, 해냄, 2017,p,352.) 작가의 말대로 공터는 치열했던 한국의 근현대사에 살아남은 한 가족의 파편적 역사를 김훈만의 필채로 써내려간 수작이었다. 지난 달에는 ‘보건교사 안은영’으로 유명세를 탄 작가 정세랑의 ‘시선으로부터’를 만났다. 페미니즘적인 성향의 작가였기에 다분히 짐작은 했지만 소설 속에 등장하는 주인공 심시선은 가장 굴곡이 심했던 20세기 대한민국을 살아낸 여성의 심볼이다. 조국에서 피울 수 없었던 여성이라는 무게의 짐을 자의적, 타의적인 몰아침으로 인해 이방의 땅에서 살아야 했던 질곡들을 모계적 가계도로 구성된 후손들에 의해 섬세한 재조명시킨다. 많이 향상되었다고 하지만 여성의 삶은 아직도 ‘을’의 위치가 더 많다. 작가는 이것을 극복하려고 모계중심의 한 가정사를 무대의 중앙에 올려놓는다. 그리고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작가의 거침없는 글말들을 남긴다. “이 소설은 무엇보다 20세기를 살아낸 여자들에게 바치는 21세기의 사랑이다.” (정세랑, “시선으로부터, 문학동네, p,334.) 독자는 에필로그와 프롤로그를 가볍게 여기지 말아야 한다. 적어도 서론과 결론에 해당하는 두 영역은 내가 독서하여 얻고자 하는 목적을 준다. 2) 각주와 참고문헌이 충실한가를 살핀다. 각주와 참고문헌을 살피다보면 두 가지를 얻게 된다. 첫째는 작가의 성향이다. 이른바 해시태그 열풍이 인스타의 영향으로 막강한 시대를 살고 있다. 필자가 참고문헌과 각주를 중요시 여기는 이유는 각주와 참고문헌을 정독하다보면 또 다른 독서의 자양분을 얻게 해주는 정보가 그 안에 있기 때문이다. 의도하지 않은 작가의 성향적인 해시태그를 발견한다는 말이다. 또 하나는 각주와 참고문헌이 바로 그 책의 수준이기 때문이다. 학술적인 도서는 말할 것도 없지만, 일반도서의 경우에도 각주를 달아놓은 책은 신뢰할 만하다. 저자의 학문적인 정직성과 수준을 그대로 보여주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표절에 대하여 심각한 생각을 하는 독자 중에 하나다. 실례로 지금은 현장에서 은퇴를 한 신학교 선배가 있다. 이름만 대면 누구나 다 알 수 있는 교단 선배다. 우연히 그가 보내준 본인의 저서를 훑어보다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이미 다른 책에서 보았던 글이었기 때문이다. 책 상위에 두 책을 가지런히 놓고 비교했다. 1/3은 토씨 하는 틀리지 않은 베끼기로, 또 다른 1/3은 교묘한 표절로 도배했다. 더 놀라운 것은 표절의 대상으로 삼은 서적이 학문적으로는 질이 떨어지는 책이었는데, 하필이면 그 책을 표절의 도구로 삼았다는 것이 후배로 너무 창피하고 수치스러웠다. 내가 보고 있는 책이 정직한 책이며, 본받을 만 책인지를 감수하는 것은 각주와 참고문헌만 보더라도 알 수 있다. 이 말은 설교문 작성에도 그대로 적용된다는 것을 기억해 주기를 바란다. 필자는 주일 낮 예배 설교는 물론, 공 예배 설교의 원고를 홈페이지에 포털 블로그에 동시에 게재한다.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공개해도 될 만큼 노력한 것임을 간접적으로 알리는 것, 또 하나는 비평적 성찰을 위함이다. 3기생들이 필자가 시무하는 교회에 방문해서 설교 원고를 함께 공유하고 날카로운 비평적 성찰을 해 주기를 기대한다. 3) 옴니버스 방식으로 독서하라 필자의 실례를 소개한다. 필자의 서재에는 약 3,000권 정도의 장서가 있다. 방문하는 분들이 있으면 이렇게 질문한다. “목사님, 이 책을 정말로 다 읽으셨나요?” 그때마다 제가 질문하는 분께 똑같이 대답한다. “제가 기계입니까? 이 책을 다 읽게.” 그러면 전시용인가? 남들에게 보이기 위한 전략으로 책을 사는가? 그렇게 책을 구입할 만큼 필자는 경제적으로 넉넉한 목사가 아니다. 지금 서고에 비치한 도서들 중에 앞으로 향후 2-3년 내에 1/4 정도의 책을 폐기할 예정이다. 본 책이 아니라 한 번도 들쳐보지 않은 책들이다. 내 의도와는 전혀 상관없이 정기적으로 누군가가 보내준 책들이 상당수다. 보내준 분들에게는 감사하지만 고물상으로 곧 갈 책들이다. 필자는 나름 상당수의 주석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지레 짐작은 하지 않기를 바란다. 필자가 갖고 있는 주석은 설교만을 위한 주석은 거의 없다. 거의 대부분이 학술적인 주석이다. 이 주석들은 아들에게 물려줄 주석이다. 요약해 보자. “캘빈 주석은 성경을 하나님의 주권 이해의 측면에서 이해하려고 할 때 반드시 보아야 하는 주석이다. 국제성서주석은 필자의 학위취득과정에 기여한 일등공신이다. 성서원어의 이해를 위한 제 2차적 자료(SECONDARY SOURCE)로 최고다. 현대성서주석은 성경 해석의 통전적인 이해를 위해 반드시 필독해야 하는 양서다. 필자가 섬기는 교회에서 진행하는 강해 설교를 준비하는 데 어떤 면에서 가장 중요한 INSIGHT를 주는 주석이다. WBC주석은 조금은 실망스러운 주석이다. 에스더 강해를 위해 영어 원서로 주석을 읽고, 번역서를 우연히 보게 되었는데 너무 성의 없는 번역을 너무 많이 발견해서 실망한 점이 많았다. 절친 교수가 추천해 주어 거금을 주고 샀는데 매우 슬프다. 다만 성서 원어에 대한 이해를 돕는 데에는 일정 부분 도움을 준다. BST 주석은 설교자를 위한 성서신학과 실천신학의 두 영역을 터치한 나름 선방한 수작이다. 설교자는 이 주석을 꼭 섭렵하라고 권하고 싶다. 대한기독교서회 창립 100주년 기념 주석은 조금 올드 한 분위기가 단점이기는 하지만, 대한민국에서 내놓으라 하는 성서신학자들의 주석이기에 목회자들이 공부하는 데 적지 않은 메리티를 주는 주석이다. 전부 다 번역되어 있지는 않지만, 톰 라이트의 신약주석 시리즈(IVP에서 지속적으로 출간하고 있음)” 헤세드, 레마. 호크마 등등의 존 맥아더의 단행본 주석 등등은 가급적 멀리하라고 권하고 싶다. 이제 진의를 말해야 할 것 같다. 필자의 서고에 꽂혀 있는 나머지 장서들은 거의 단행본이다. 아내에게 받는 월급으로, 교회에서 정기적으로 지원해 주는 도서대금으로 구입한 책들이다. 보물들이고 공부하고자 했던 필자의 흔적들이다. 이 책들은 거의 독서를 마친 책들이다. 그 증거는 책 뒤에 남기는 사족이다. 필자의 아들은 지금 연세대학교 대학원에서 TH.M 과정 중에 있다. 해서 대를 이어 충성할 아들이다. 아, 걱정 하지 마시라. 세습 같은 쪽(?) 팔리는 일은 하지 않을 테니. 책을 읽고 나면 반드시 아들에게 사족을 남긴다. 독서 후의 글감을. 유언이자 유서 같은 거다. 그러기에 정독을 하지 않은 책은 거의 없다. 어떻게 이 지난(至難)한 일을 할 수 있나? 옴니버스 독서가 답이다. 필자는 책 한 권을 다 읽고, 또 다른 책을 읽는 수순을 가져 본 적이 없다. 일주일에 내 시야에 보이는 각 공간에 약 20 여권의 책이 언제나 있다. 서재는 물론 사택 안방의 침대 옆에, 거실의 탁자 위에, 화장실에, 승용차 박스 안에, 부교역자 사무실 안에, 심지어는 아들이 살고 있는 서울 집에. 이동하는 장소에서 비치되어 있는 책을 읽는다. 다시 말하면 랜덤 책읽기다. 물론 해시태그로 무장된 책들이다. 그렇게 장시간을 통해 읽은 책이 시오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 유흥준 교수의 ‘나의 문화 유산답사기’, 이재철 목사의 ‘사도행전 속으로’ 등등 쏠쏠했다. 한 장소에 읽은 책의 분량을 페이지-업하고, 다른 공간에서 비치해 둔 책과 만난다. 이렇게 랜덤 식으로 책을 읽으면 1년에 약 100권 정도가 된다. 개인적인 취향이니 이게 정답이라고 고집하지 않는다. 다만 옴니버스식의 독서가 필자에게는 대단히 좋은 독서법임을 한 가지 대안으로 제시한다. 4) 도서 후에 북 리뷰를 반드시 남겨라 목사는 글 쓰는 사람이다. 글쓰기는 교양 필수가 아니라 전공 필수다. 글쓰기는 피하는 목사는 선하게 사역을 마치고 졸업할 수 없다. 필자가 책을 출간하자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질문했다. 바쁜 목회 여정에 언제 그런 글을 쓸 수 있었냐는 질문이다. 그럴 때마다 주저하지 않고 이렇게 답한다. “글을 쓸 수 없을 정도 바쁜 목사는 없습니다.” 필자는 2016년부터 책을 내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졸저이지만 3권의 책을 출간했다. 두 권의 책 분량은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350페이지를 넘겼고, 나머지 한 권은 250여 페이지 분량이다. 계산해보니 약 1,000페이지를 쓴 셈이다. 주지할 것은 이 모든 시작은 간단한 북-리뷰였다는 점이다. 많이 쓰는 것이 잘 쓰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이라도 계속 쓰는 것이 잘 쓰는 것이다. 사람의 뇌로 기억되는 것은 하루를 버티기도 힘들다. 필자의 나이가 되면 더 그렇다. 그러나 글을 평생 남는다. 너무 딱딱한 강의니 조크 하나 하자. 필자의 세 번째 책은 ‘시골 목사의 목양심서’(동연간, 2019)다. 촌스러운 글이지만 DPA 이사장인 오생락 목사에게 추천의 글을 부탁했다. 한 부분을 인용한다.
“저자는 예배당을 건축하고 입당하는 감격스러운 순간에도, 섬기는 세인교회가 혹시라도 세속화의 물결에 함몰될까봐 염려할 정도로, 건강한 고민을 안고 사는 목회자다. 시대와 역사를 보는 안목 또한 탁월하다. 그 뿐만이 아니다. 성도들과 함께 울고 웃는 가슴 따뜻한 목회자다. 故 서정수 집사의 글이 빛을 볼 수 있게 된 것도 그에게 따뜻한 가슴이 있었기에 가능했으리라. 또한 저자는 음악과 문학, 커피를 아는 감성이 풍부한 목회자이며, 사람 냄새 물씬 풍기는 목회자이기도 하다. 나는 목사 같은(?) 목사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싫어한다. 그런 사람을 만나면 왠지 숨이 막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 냄새나는 저자가 나는 좋다. 신학교 동기인 저자는 나에게 있어서 매우 특별한 ‘지음’(知音)이다. 지음이 곁에 있어서 기쁘다. 그 지음을 사랑하고 존경할 수 있어서 감사하다. 지음의 세 번째 책을 가리키는 손가락이 될 수 있어서 영광이다. 적어도 이 책을 읽는 독자라면 견지망월(見指望月)의 우를 범하는 사람은 없으리라.” (이강덕, “시골목사의 목양심서”, 동연, 2019년, pp,8-9. 오생락 목사의 추천의 글 중에서) 가뜩이나 촌스러운 글이 옥고처럼 보이게 만들어준 수작의 글이다. 주객이 전도되어 필자가 부끄러웠다. 앞으로 이사장이 출간하면 무조건 사라. 수지맞는다. 이런 아름다운 글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졌다고 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꾸준한 글쓰기로 다져진 내공의 결과다. 서툴러도 글쓰기에 최선을 다하기를 바란다. 사족을 하나 남기고 싶은 것은 필자는 설교에 대하여 전문적인 지식이나 내공이 없는 사람이다. 해서 설교에 대한 강의는 잊기 바라고 독서에 대한 나눔은 기억해 주기를 바란다. 아마도 3기생들에게 설교에 대한 적절한 강의와 수준 높은 지식 전달은 정인교 목사, 오생락 목사, 임채영 목사가 감당해 주리라 믿는다. 모두가 설교 전문가들이기에 말이다. 필자는 단지 설교하는 목사가 견지해야 하는 책 읽기에 대해 몇 가지 나누었다. 모쪼록 3기생 모두가 조금은 버겁겠지만 독서하는 훈련과 과정을 통해 맡겨진 양들에게 귀한 꼴을 먹이는 신실한 목회자들이 되기를 기대한다. 나가는 말 필자는 2018년에 ‘시골 목사의 김기석 글 톺아보기’를 출간했다. 책을 열면서 독자들에게 소개한 글을 3기생들에게 소개하고자 한다. “이상한 현상과 만나는 것은 인간이 건전한 적응 능력을 기르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치바나 다카시, “나는 이런 책을 읽어왔다.”이언숙역, 청어람 미디어,2014년,p,242.) 일본 지성계의 큰 별인 다치바나 다카시가 쓴 책에 나오는 글이다. 목회 현장은 너무나 이상한 일이 많은 영역이다. 다카시가 말한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이상함의 정글이다. 필자가 31년 이상을 사역하면 내린 결론은 이 엄청난 현상의 자리에서 목회자로서 건전한 능력을 기르는 방법은 이상한 일 자체와 만나는 일이라고 역설한 다카시의 고언을 동의하면서 한 가지를 더 제언하고자 한다. 그것은 독서를 통해 먼저 이 일들을 만난 자들과 교제하는 것이다. 목회는 녹록한 사역이 아니다. 해서 혼자 달려갈 수 있는 사역이 아니다. 먼저 목회를 아름다운 사역으로 만들어간 선배들을 독서를 통해 만나고, 공부를 통해 지속적인 능력을 공급받는 것이다. 목사는 기도의 영성과 말씀의 내공과 지속적으로 공급받는 지성적 기름부음으로 목회 리더십을 만들어가는 자임을 기억했으면 한다. 그리고 잊지 말자. 그 기름 부으심은 독서를 통해서도 이루어짐을. 마치면서 필자가 무척이나 좋아하는 김수영 시인의 그 유명한 ‘풀’을 동역자들에게 선물 하고 싶다. 풀 김수영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도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3기생 모두가 부도옹(不倒翁)같은 절대로 쓰러지지 않는 풀들이 되기를 화살기도 한다. 제천세인교회 아침, 서재에 있는 턴테이블에서 울려 퍼지는 사라사데의 ‘지고이네르바이젠’이 천상에서 들려오는 듯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