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2일 국민일보 미션 란에 기고한 청파 교회 김기석 목사 글에 대하여 답하다. 1) 김기석 목사의 글 요즘 무슨 책을 읽고 계세요? 5월의 숲은 평화롭다. 형형색색을 자랑하던 꽃이 진 자리에 돋아난 연초록 나뭇잎들은 모든 차이를 넘어선 무등의 세상을 보여준다. ‘땅은 푸른 움을 돋아나게 하여라’ 하신 그분의 명령을 땅은 오늘도 묵묵히 수행하고 있다. 말씀으로 지어진 세상이니 모든 만물은 그분의 말씀이 깃든 텍스트이다. 숲이라는 텍스트 속에 들어가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내쉬면 고요한 평화가 스며든다. 마음이 차분해지면서 잊고 있었던 경외감과 신성한 것에 대한 감각이 돌아온다. 간간이 들려오는 새소리가 예배당 종소리처럼 마음에 물결을 일으킨다. 일상은 늘 나를 휘몰아대지만 그래도 그 흐름을 끊고 숲길을 걷는 여유를 빼앗기고 싶지는 않다. 서재는 또 하나의 숲이다. 마음이 무거워지면 마음 둘 곳을 찾기 어려워진다. 그때마다 서가에 꽂힌 책들을 일람한다. 책들은 내 마음의 역사이고 풍경이다. 눈에 띄는 책 몇 권을 꺼내 책장을 설렁설렁 넘기며 밑줄 친 부분을 읽다 보면 어느새 무겁던 마음이 가라앉는다. 가끔은 새소리처럼 청량한 문장과 만나기도 한다. 평생 책과 함께 살아서인지 책이 꽤 많은 편이다. 몇 년 전 수천 권을 덜어냈는데도 집과 교회의 서재는 온통 만원이다. 도서관식으로 분류해 놓지 못한 탓에 책을 찾느라 시간을 허비할 때도 많다. 대부분 애서가가 겪는 일상이다. 처음 내 사무실에 들어온 이들은 대개 두리번거리며 책을 둘러본다. 그러다가 문득 묻는다. “이 책 다 읽으셨어요?” 이 질문을 받을 때마다 난감하다. 읽지 않은 책이 많기 때문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 책 구입을 자제해야겠다고 다짐도 해보지만 관심 분야의 책이 나왔다는 정보를 보면 사지 않을 수가 없다. 얼마간 시간이 지나면 필요해도 구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경험적으로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책을 다 읽기도 전에 다른 책들을 주문한다. 이런 일이 반복되니 딱한 노릇이다. 심문하듯 묻는 그 질문에 움베르토 에코의 말을 빌려 대답한다. “내일부터 읽으려고요.” 강연을 하거나 토론 모임에 참여하면 더러 듣는 질문이 있다. “무슨 책을 읽어야 할까요?”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질문자의 독서 습관이나 문해력 수준을 알지 못한 상태에서 책을 소개하기란 여간 난감한 노릇이 아니다. 내게 좋은 책이 곧 그에게도 좋은 책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실용적인 정보를 얻기 위해 책을 읽는 이도 있고, 위안을 얻고 싶어 읽는 이들도 있다. 각자의 관심에 따라 책을 선택하면 된다. 하지만 독서라는 적극적인 행위를 통해 인식을 확장하고 싶다면, 다소 힘에 부치는 책을 선택해보라고 권하고 싶다. 몇 페이지 읽다가 집어던지고 싶은 책들을 마치 광부가 광맥을 찾아 곡괭이질을 하는 것처럼 파고들다 보면, 어느 순간 인식의 지평이 확장되고 있음을 자각할 수 있을 것이다.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인 오르한 파묵은 자기의 글쓰기를 가리켜 ‘바늘로 우물 파기’라고 말했다. 작가의 그런 열정을 글 속에서 알아차리는 기쁨은 누구도 빼앗지 못하는 독서의 즐거움이다. 오에 겐자부로는 ‘읽는 인간’이라는 책에서 에드워드 사이드를 인용해 독서로 얻는 건 단순한 정보가 아니라고 말한다. “어설프고 얄팍한 수용이 아니라, 전인간적인 경험이라고 주장하는 것이죠. 나를 뭉클하게 하고, 활력을 느끼게 하고, 흥분시키는 것이니, 편리하게 차트화한 지식 정보를 넘겨주는 고요한 것이 아니에요.” 독서 행위는 수동적 정보의 수용이 아니라 작가와 더불어 적극적인 이해의 과정에 뛰어드는 일이다. 삶과 세계 혹은 인간에 대한 인식의 심화는 우리를 편협성의 늪으로부터 건져준다. 욕망의 바다를 는적거리며 헤매기보다는 인식의 광야 속으로 들어가 자기를 단련하는 시간을 마련하면 좋겠다. 요즘 무슨 책 읽고 계세요. 2) 질문에 대한 이강덕 목사의 글 김기석 목사님께 샬롬의 안부를 전합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황사, 미세먼지까지 습격해서 서재의 창밖으로 보이는 제가 살고 있는 제천의 빼어난 산세가 흐릿하게 보여 우울했는데 어제, 오늘은 이런 날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깨끗해져 행복하기 그지없습니다. 건강하시지요? 잘잘법을 비롯하여 유트브로 연결되는 목사님의 여러 알고리즘으로 인해 적지 않은 위로와 감동을 먹고 살고 있습니다. 새벽예배를 인도하고 서재에 올라와 도착해 있는 경향신문과 국민일보 신문을 습관적으로 펼쳤는데 오늘은 목사님이 기고하신 글이 질문형으로 끝났기에 왠지 답하고 싶다는 생각이 불쑥 들어 두서없이 몇 자 적습니다. 拙稿지만 가볍게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어제 아침은 너무 환상적인 하늘이 보여 나태주 시인의 시집 하나를 들고 정원으로 나갔습니다. 그리움 햇빛이 너무 좋아 혼자 왔다 혼자 돌아갑니다. (나태주의 '꽃을 본듯 너를 본다', 지혜 간, P,78.) 글을 읽는데 내가 이렇게 행복해도 되나 싶어 갑자기 미얀마 어린아이들이 떠올랐습니다. 팔레스타인 자치 지구에 살고 있다는 운명 때문에 어디선가 떨어지는 괴물 소리와 함께 이 땅을 떠나야 하는 아이들의 주검이 불쑥 떠올라 몸살 기운이 되살아났습니다. 김 목사님! 십여 년 전, 집필하신 책에서 정현종님의 시를 인용하셨지요? (“길은 사람에게로 향한다.”, 청림출판, p,50. 재인용) 다른 무기가 없습니다 마음을 발사합니다 두루미를 쏘아 올립니다 모든 미사일에 기러기를 쏘아 발사합니다 모든 폭탄에 (하략) 언제나 내가 숨 쉬고 있는 이 땅에 같은 평화가 임하게 될까요? 목사로 살아가고 있는 자로서 同痛의 마음을 가져 봅니다. 나름 하루를 시작하면서 언제나 오전에는 서재에 머물려는 고집으로 삽니다. 그러다 보니 일본의 지성 중에 한 명인 다치바나 다카시의 말을 매일 만나는 행운을 얻곤 합니다. “이상한 현상과 만나는 것은 인간이 건전한 적응 능력을 기르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다치바나 다카시, “나는 이런 책을 읽어왔다.” 청어람 미디어,p,242.) 기실, 시간마다 만나는 이상한 현상을 경험하지 않는 목사가 될까봐 두렵기는 하지만, 그때마다 수없이 많은 지성의 선배들이 일러주는 지혜의 응축 엑기스를 책을 통해 공급받을 수 있어 이런 복이 또 어디에 있나 싶어 저자들에게 감사의 고개를 숙이곤 합니다. 2021년 들어 펜데믹이 길어지는 바람에 사역에 쫒기지 않고 역으로 글을 읽는 시간을 조금은 더 많이 가질 수 있게 되었다고 표하면 타인으로부터 돌팔매질을 당하는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제게는 실로 그런 기회가 된 듯합니다. 오늘 신문 기고문을 통해 물으셨으니까 잠시 답해보려고 합니다. 금년 1월에는 10여권의 책 중에서 지인 여 목사님이 서평을 부탁하여 읽게 된 필리스 트리블의 ‘하나님과 성의 수사학’(태초 간, 1996)을 만났습니다. 순전히 타의적으로(ㅎ) 성결교회 소속 목사로서 도무지 수용이 안 되는 급진적 여성 신학적 관점의 구약 성서 본문 이해(하나님을 자웅동체로 해석하는 것 등등)를 저자가 몰아세우는 것 같아 나름 곤혹스럽고 난처한 부분이 많아 당황스러웠지만, 남성 중심적인 견고한 성서 해석의 틀을 부성과 모성을 동시에 갖고 계신 하나님의 속성으로 균형 잡도록 견인해주는 독서의 시간이었고, 더불어 천편일률적인 성서해석의 위험성을 반면 그리고 진면 교사 삼게 해준 좋은 선생님 역할을 트리블 교수가 해주어 의미 있게 공부를 하며 한 해를 출발했습니다. 2월에는 여러 책 중에 오스 기니스의 저항을 조금은 늦깎이로 만난 것에 대한 감사가 컸습니다. 기니스의 도전이 심비에 새겨졌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창조주로서의 인간에 대한 확신으로 대체되었다. (중략) 우리는 이제 인류를 제조할 수 있다.” (p,58.) 이 무시무시한 공격적 도발에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나는 어떻게 반응하고 있는 목사인가를 되뇌어 보며 전율했습니다. 유발 하라리의 대명사 호모-데우스에 속수무책으로 살고 있는 무기력한 목사는 되지 말아야 하는데 실제로 무기력한 나를 보며 가슴앓이 하고 있는 게 사실이기에 2월은 많이 아팠습니다. 3월에 만난 책, 정세랑 작가의 ‘시선으로부터’를 읽고 아내에게 권했습니다. 아내에게 의미 있는 성찰이 될 것 같아서 말이죠. 저는 페미니즘을 지지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독서 후 책을 덮으면서 저자가 에필로그의 글에서 말한 그대로 “이 소설은 무엇보다도 20세기를 살아온 여자들에게 바치는 21세기의 사랑이다.” (p,334)라는 그녀의 글감이 진하게 다가와 그냥 남자로서 무슨 속죄의 제물이 내가 되어버린 듯한 묘한 감정에 사로잡혔던 기억이 생생하여 이 땅의 어머니들과 누이들과 딸들을 위해 화살기도를 드렸습니다. 4월에는 접한 여러 책 중에 재활용품수집노인들의 일상 일기를 기록한 소준철의 ‘가난의 문법’과 함께 하면서 우리 교회의 설립 목적인 세인(世認)교회의 정체성을 다시 한 번 각인하는 귀한 시간을 가져 보았습니다. 독서 후 책 뒤에 남기는 사족에 이렇게 글감을 남겨놓았습니다. “그렇다. 가난한 자를 위한 연대는 나뿐만 아니라 교회의 역할이다. 교회보다 세상이 이 일에 앞서 나가면 되겠나 싶다. 대학원 시절 필독서로 읽었던 니버의 글이 공명으로 나에게 울린다. 인간관계가 밀접한 곳에서는 사랑의 길이 정의로 가는 유일한 길이다.” (라인홀드 니버,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 현대사상사, p,273.) 5월은 시 읽기의 달입니다. 지금 칠레의 시성인 네루다에 빠져 있고, 스페인 작가 로르카도 접하고 있습니다. 시인들을 만나면서 언제나 제 고백은 하나입니다. “시인들 중에 천재가 아닌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존재하지 않는다.” 나희덕이 쓴 시 한 소절 때문에 펑펑 울기도 했습니다. 그녀의 표현을 빌린다면 그녀가 쓴 시를 읊조리다보면 곡비(哭婢)가 내 안에 새겨졌기 때문입니다. “그 물들/그냥 흘러간 게 아니었구나/닳아지는 살 대신/그가 입혀 주고 떠나간/푸른 옷 한 벌/내 단단한 얼굴 위로/내리치며 때로 어루만지며 지나간/분노와 사랑의 흔적/물속에서만 자라나는/물속에서만 아프지 않은/푸른 옷 한 벌” (“그곳이 멀지 않다” 중 ‘이끼’, 민음사, 1997,p,64.) 김기석 목사님. 질문해 주신 것에 감사를 드린다면 생뚱맞은 필설이겠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배들을 위해 계속 질문해 주셨으면 합니다. 혹시 그로 인하여 무기력한 자들이 꿈틀거리는 동기부여가 될 수 있도록. 아직은 코로나 19의 기세가 무섭습니다. 같은 하늘에 있기에 목사님의 건강을 위해 중보 해 봅니다. 오에 겐자부로가 한 이 말이 제게도 매일 낭독되기를 기대해 봅니다. “인생의 모든 순간, 책이 있었다.”
제천세인교회 이강덕 목사 드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