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을 읽다가 도리어 참 많이 부끄러웠다. 언젠가 교회 주보 칼럼에 이런 글을 쓴 적이 있었다. “갈릴리 예수로 사신 신앙적 그리스도 예수” 현장에서 목회를 하다보면 이 표제처럼 두 예수의 삶을 살면서 정직하게 목회를 해야 하는데 현장 목회는 신앙적 그리스도 예수에 많이 기우는 것이 사실이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지난 30년을 목회하면서 참 많이 고민하고 질문하며 성찰하려고 몸 부린 친 목회자의 팩트 중에 하나다. 불편해도 답을 달아야 한다. 이 질문에 대하여. 모든 목회자가 다 그런 것이라고 단정할 수 없는 전적인 개인적인 소회라는 것을 전제하면서 말할 수 있는 답은 이것이다. 아마도 목회 현장에 있는 교우들의 한 편에 가장 강력하게 자리 잡고 있는 것이 내세적인 소망이 크기 때문이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거기에 걸 맞는 목양의 패러다임을 목회자들이 설정했고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신앙적 그리스도가 더 강하게 설정된 것은 아닐까 하는 답이다. 조금 더 솔직하고 편하게 답하자. 훨씬 후자가 교회 목양에서는 강력한 매력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땅 대한민국, 영적으로 황폐한 질퍽한 땅에서 남은 자의 삶을 살면서 그루터기 그리스도인들로서 살아가는 자들은 갈릴리 예수의 삶에 더욱 천착한다.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지난 주일, 함께 동역하는 사랑 뜰 감리교회를 섬기고 특별히 암환자들을 돌보는 조경선 목사님께서 괴산이라는 지역적인 한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부족한 사람이 섬기는 교회에 방문해 주셨다. 오셔서 함께 은혜를 나누셨다고 하지만, 신앙적 그리스도 예수에 천착하여 폼 나게 목회하고 있는 이 사람이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갈릴리 예수께서 사셨던 그 삶의 한 폭을 척박한 환경임에도 불구하고 감당하고 있는 사역자다. 조 목사님의 목양의 방법은 이강덕 목사가 감히 신발 끈을 풀기에도 힘이 없는 너무 큰 사역이다. 오셔서 함께 나눈 기억을 이렇게 글로 나누어주신 메시지를 보면서 이런 생각을 다시 다짐해 본다. 부족한 사람을 위한 격려의 메시지이자 또 한편으로는 딴 짓하지 말고 갈릴리 예수의 삶을 살아내라는 경성의 메시지라고. 같은 하늘 아래에서 갈릴리 예수의 삶을 그 누구보다도 아름답게 실천해 주시는 조 목사님이 친구인 것이 나에게는 행운이고 축복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