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 가쁘지만 2월이 지났다. ‘엑사고라조마이’는 낚시를 하는 강태공들이 ‘고기를 낚아챌 때’의 ‘그 순간을 가르치는 단어다. 바울은 이 단어를 에베소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세월을 아끼라‘는 아낌의 의미로 사용했다. 2월을 뒤돌아보면서 그 ’엑사고라조마이‘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새겨본다. 2월은 섬기는 교회의 지체에게 감사해야 할 것 같다. 나는 개인적으로 책 선택을 할 때 신문(특히 구독하는 경향신문)에서 많이 도움을 얻는다. 헌데 2월의 독서 내용은 섬기는 교회의 지체가 독서 버킷 리스트로 소개한 책을 담지하다 보니 그렇게 수지맞는 장사를 했기 때문이다. 박일준의 ‘인공 지능 시대, 인간을 묻다’(동연 간)를 시작으로 2월의 독서 여행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가토 슈이치의 ‘양의 노래’(글항아리 간)를 너무나 잘 읽었다. 3.1절 100년이 되는 해에 이 책을 읽을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다. 제국주의 일본이라는 나라의 적나라한 실상을 간접적으로 접근하면서 왜 일본이라는 나라가 정말로 신뢰를 하지 못하는 근성을 갖게 되었는지의 답을 상식적인 지성을 갖고 있는 일본인에 의해 발견했으니 말이다. 가토 슈이치와 같은 자들이 일본을 통제할 수 있다면 일본은 정상적인 국가가 될 수 있을 텐 데라는 강한 느낌표를 갖게 된 선물이 양의 노래였다. 장강명의 ‘팔과 다리의 가격’(아시아 간)을 읽었기에 이번에 북미정상회담의 결과가 더 아프게 다가온다. 이데올로기가 삶의 생존권을 말살하고 있는 것을 정치인들이 어떻게 알랴! 만에 하나 그들이 민초들의 이 아픔을 알 수만 있다면 지금의 국가주의가 얼마나 엄청난 암적 요소인지를 가늠할 텐데 태생적으로 이데올로기에 묶여 있는 괴물들은 눈감고 있든지 이용하든지 둘 중의 하나 일 것이다. 그래서 대단히 유감스럽다. “개 같은 나라… 노동당이 내 아들을 이렇게….”(P,114) 성호 아버지의 독설이 아직도 쟁쟁하다. 미리암 마지다의 ‘나의 페르시아 수업’(달콤한 책 간)은 나를 사유의 장으로 이끌었다. 역시 독서의 가장 아름다운 매력은 사유하게 함이다. 태어난 나라와 자라난 나라 사이의 경계선상에서 정체성의 혼란을 경험했던 저자의 자전적인 글 펼침을 통해 난 작가 최인훈이 ‘광장’에서 그려낸 이명준을 기억해 냈다고 서평에 기록했다. 저자는 부모의 자발적인 망명이라는 과정 속에서도 본인의 정체성 혼란으로 인한 저자는 무시무시한 고통을 당했는데, 가끔 텔레비전을 통해 방송되는 타의에 의해 입양된 내 사랑하는 형제, 자매들의 고통이야 재론의 여지가 있겠나 싶어 괜한 수치스러움이 스멀 올라왔다. 다시는 이런 불행한 경계선에 있어야만 하는 자들이 내 조국에서는 사라졌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휴 프레이더의 ‘나에게 보내는 편지’(판미동 간)에서 적어도 나를 사랑하는 것만큼은 진정성이 있어야 하는 것임을 되새김질했고, 로버트 코링턴의 ‘바람의 말을 타고’(동연 간) 읽으면서 그 옛날 석사과정을 공부할 때 몰입했던 인간의 전인성에 대하여 다시 한 번 감각을 곧추 세우는 공부를 하게 되어 감사했다. 작가 최은영의 ‘내게 무해한 사람’(문학동네 간)에 수록된 7개의 단편들은 뭔가에 빨려 들어가는 느낌의 잔잔하지만 울렁거리게 하는 인간의 인간다움, 그리고 비인간다움이라는 상극을 함 공유하게 해 줌으로서 목사로 사는 나에게 적지 않은 파장을 일게 했던 수작이었다. 한승태의 노동 에세이 ‘고기로 태어나서’(시대의창)를 읽으면서 왠지 모르게 닭과 돼지와 개가 되어 도살당하는 객체가 바로 나인 것 같은 오싹함에 치를 떨었다. 더불어 어떻게 이 지경으로 인간은 잔인할까? 에 말문이 닫혀 버렸다. 어느 정도 짐작은 했지만 이 땅에 존재하는 가장 잔인한 동물이 인간임을 노동자 한승태는 강력하게 성토한다. 좋아하는 보신탕을 포기해야 하나를 정말로 처음으로 고민하게 한 작품이다.(ㅎㅎ) 결단은 후속으로 내리리라. ‘모모’(비룡소 간)를 너무 오랜만에 다시 잡았다. 전에 읽었을 때의 감동이 그리 깊지 않았기에. 헌데 2월에 다시 만난 모모는 목사로 마지막 필드에 있는 나를 어린왕자만큼의 감동으로 타격했다. 그 감동을 선사한 미하엘 엔델에게 고개를 숙여 경의를 표하고 싶다. ‘몰락의 에티카’를 통해 공부한 감동이 커서 또 한 번 신형철에게 빠지기로 마음먹고 ‘느낌의 공동체’(문학동네)를 손에 잡았다. 글을 쓰고 싶다면, 그냥 쓰는 게 아니라 잘 쓰고 싶다면 신형철이 ‘느낌의 공동체’를 읽으라고 말하고 싶다. 이 책과 더불어 ‘몰락의 에티카’에서 그가 소개한 책들을 포함하여 함께 도전하라고 감히 권하고 싶다. 나 또한 신형철을 따라가기 벅차다. 그러나 어찌하랴, 그가 말한 강력한 인문학적인 지성의 성찰이 내가 또 가야할 목사로서 지성의 운명인 것을. 2월에 마지막으로 손에 잡은 것은 금년 독서의 23번째 책인 신학교 후배인 김성호가 쓴 ‘디트리히 본회퍼의 타자를 위한 교회’(동연 간)였다. 난 블로그에 이렇게 내가 섬기는 교회를 소개한다. “교회는 이타적일 때만 교회이기에 세인은 이 교회를 꿈꾼다.” 본회퍼의 이 일성을 아주 아카데믹하게 그러나 탁상공론이 아닌 뜨거운 삶의 내용으로 전개하며 신학교 후배가 수작을 써서 출간했다. 응원하는 마음으로 읽으면서 후배 중에 이런 탁월한 수재가 있다는 것에 박수를 보냈다. 지금 조국교회에 한 사람이 필요하다. 본회퍼 같은 목사, 지금 조국교회에 한 교회가 필요하다. 본회퍼가 그렇게 그렸던 이타적인 교회. 3월의 첫날, 2월 독서의 보고를 간단히 정리하면서 나름 선방한 것 중에 하나가 김영호 장로님에게 드린 선물이다. 정말로 허접한 글 내용인데도 부족한 사람의 글을 묶어 졸저를 출간해 주신 그 감사의 내용으로 도서출판 동연의 글들을 손에 많이 잡은 것이 보람이다.(ㅎㅎ) 이제 3월 또 정복해야 할 산들이 서고에 쌓여 있다. 꾀가 나는 게 사실이지만 하나님께 소박하게 기도한다. “주님, 눈이 확 밝아지게 해주소서!” 드리고 나니 어설프다. 3월도 은혜로 하루의 나날들을 크리스티아노스로 살아내기를 기대해 본다. 1919년 3,1일을 100년째 보내는 날 오후 9시 58분에 서재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