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인 차준희 목사가 페이스북에 글을 하나 공유했습니다. 본인이 부흥회를 인도한 교회의 담임목사가 홍보하고 자랑한 글을 공유한 글이었습니다. 그 교회 담임목사는 네 가지의 내용을 소개했습니다. ⓵ 집회가 거듭될수록 참석인원이 많아지는 부흥회 ⓶ 차량운행을 하지 않는 부흥회 ⓷ 부흥회 헌금을 강요하지 않는 부흥회 ⓸ 부흥회 끝나는 시간을 어기지 않는 부흥회 등이었습니다. 친구가 공유한 글을 읽다가 십여 년 전에 직전 교회에서 친구가 인도했던 부흥회가 떠올랐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⓵, ⓷, ⓸번이 똑같이 상기되었기 때문입니다. 더불어 당시에 저는 이 세 가지의 내용 말고 또 하나를 의미 있게 교우들에게 나누었던 것이 있었는데 원고를 보고 설교하는 부흥사라는 타이틀이 있었습니다. 근래 저는 개 교회에서 부흥회를 한다는 이야기를 혹 들으면 아직도(?) 라는 생각에 고개를 기웃거릴 때가 있습니다. 물론 친구가 인도하는 이런 류의 부흥회가 있기는 하지만 대체적으로 정말로 힘든 부흥회가 거의 대부분인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한 번의 집회가 진행되면 인원이 줄어드는 것이 다반사이고, 우격다짐의 헌금 강요는 일상이고, 강사의 신세 한탄, 도무지 듣기 어려울 정도의 역겨운 자기자랑, 조석간 신문의 스크랩 설교 등등 천박하기 그지없는 메시지 선포가 설교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것이 상업적 부흥회의 일상처럼 자리매김했다는 점에서 부흥회 무용론이 목사들이 아닌 성도들에게 부상된 것은 어찌 보면 너무나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구약성경의 흐름 중에 야훼께서 선택한 민족을 일시적으로 버리시는 아픔을 감내하면서까지 이스라엘을 심판하신 가장 강력한 이유가 ‘예흐에 아쉐르 예흐에’ 의 하나님을 ‘만들어진 하나님’ 으로 전락시켜 ‘짜하크’ 의 막장에서 마음껏 유린한 죄 때문임을 익히 알고 있습니다. 그 현대판 ‘짜하크’ 의 현장이 유감스럽게 다름 아닌 21세기의 상업적 부흥회를 통해 버젓이 자행되고 있다는 것이 오늘날 내가 섬기고 있는 교회의 아픔 중에 또 하나의 아픔입니다. 상황이 이럴진대 친구가 페이스북에 소개한 그 교회의 부흥회가 얼마나 귀한 모습으로 다가왔는지 친구 목사도, 저도 주목한 것을 보면 마치 그 교회가 천연 기념물처럼 보였던 귀함에 동의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페이스북에 친구 올린 글에 댓글 다는 것에 인색한 제가 격려의 댓글을 달아주었습니다. 원고 설교하는 부흥사, 건강 조심해라.” 그러자 친구가 다시 댓글을 이렇게 달았습니다. “여전히 원고 보고 부흥회 인도한다. 연구 없이 설교는 없다. 너같이 걱정해주는 친구가 있어서 마음은 늘 건강하단다. 고맙다.” 교회를 개척하고 나서 얼마 후에, 정말로 열악하고 척박한 개척 장소였지만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초청에 응해 준 친구가 ‘예레미야의 영성’ 을 주제로 깊은 은혜의 잔치를 가졌던 것이 엊그제 같은 데 시간이 참 빠르게 흘렀습니다. 한국교회의 일부 가 ‘짜하크’의 현장으로 변질된 아픔을 다시 회복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원고 설교 하는 친구의 사역에 박수를 보내며 응원해 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