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서툰 믿음이라고 공격하지 말라 본문: 사사기 4:8-10 섬기는 교회에 암 투병을 하고 있는 지체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 췌장암으로 사형선고를 받고 시한부 삶을 선고 받은 한 지체가 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옥한흠 목사께서 쓰신 ‘고통에는 뜻이 있다.’를 읽었습니다. 김영봉 목사께서 쓰신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나 아프다.’도 읽었습니다. CS, LEWIS 의 ‘고통의 문제’도 독파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 책들을 읽으면서 저에게 온 소회는 위로가 아니라 고통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일련의 책들을 통해 받는 것은 하나님이 너무 완벽하시다는 점입니다. 나는 하나님이 나에게 완벽하시지 않고 조금은 허물어지시는 하나님이시면 좋겠는데 그래서 참 힘듭니다. 근데 결국은 제 믿음이 약한 것이겠지요?” 30년 목회를 한 현장 목회자로서 그에게 줄 말이 없었습니다. 무슨 말을 주든지 그에게는 위로가 될 것 같지 않아서였습니다. 그리고 또 한 편으로는 더 솔직히 말해서 그의 절규가 필자의 절규이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아무리 그래도 목사가 허물어져서야 되겠습니까? 해서 지체가 남긴 말의 한 사족을 붙들었습니다. ‘제 믿음이 약한 것이겠지요? 기독교에서 말하는 믿음의 본질, 정의, 의미 등등에 대하여 수없이 많은 책들이 시중에 나와 있습니다. 그 책들에서 말하는 일체의 믿음에 대한 각설들이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문제는 절망의 터널을 건너고 있는 사람들에게 사변적으로 느껴진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개인에게 적용해야 하는 믿음을 한 마디로 무 자르듯이 정의하는 것은 어떤 때는 폭력으로 다가올 수 있음에 주의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이미 많은 사사기 강해를 통해 교훈이 정해져 있는 듯한 교과서적인 내용으로 치부될 수 있는 위험한 본문입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드보라는 승리자로, 바락은 실패자로 낙인찍는 교훈 말입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잔머리를 굴린 바락이 드보라에게 빌붙어 전쟁에 참여한 탓에 그는 하나님이 주시는 영광을 맛보지 못한 한심하고 믿음 없는 인간으로 고정하는 폭력 말입니다. 저는 지난 호에 기고를 통해 전통적인 이해인 바락의 믿음 없음을 통렬하게 지적한 적이 있었습니다.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은 또 하나의 상반된 교훈을 나누면서 균형을 잡으려고 합니다. ★ 서툰 믿음이기에 온전한 믿음을 붙들려고 하는 것이라는 교훈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바락은 시스라에게 나가는 다볼 전투에 드보라가 함께 가기를 종용했습니다. 함께 가야 전쟁에 나가겠다는 종용 말입니다. 참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참 믿음 없어 보입니다. 참 얍삽해 보입니다. 극단적 표현으로 남자의 자존심도 팽개쳐 버린 것 같은 비굴함도 느껴집니다. 그러나 필자는 이런 비난이 바락에게 가해져도 그에게 한 가지 점에서는 비난을 가할 수가 없었습니다. 바로 이 대목입니다. 믿음이 없었던 바락이었기에 믿음이 있었던 드보라는 붙들려고 했던 것 말입니다. 분명 사사기 4장의 주인공은 드보라였지 바락은 아니었습니다. 이 말은 바꾸어 말하면 드보라는 믿음의 여인이었지만 바락은 그렇지 않았다는 반증입니다. 그러니 바락이 드보라를 붙들려고 했던 것은 너무나 당연한 신앙적인 정당방위가 아니었겠습니까? 바락의 믿음의 연약함을 탓할 수는 있지만 믿음이 있는 자를 붙들려고 했던 바락의 신앙적 행위까지 탓하는 것은 지나쳐 보입니다. 잔인합니다. 이 땅에 존재하는 믿음 있는 자의 처음이 드보라처럼 시작한 자가 과연 얼마나 됩니까? 바락처럼 시작하여 어떤 때는 드보라의 치맛자락이라도 붙들고 나아가며 쓰러졌다가 일어나고, 고꾸라졌다가 곧추 세워지고, 절망했다가 다시 드보라의 역할을 해준 믿음의 선배들로 인해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닙니까? 저는 오늘 본문 10절을 아린 마음으로 읽었습니다. “바락이 스불론과 납달리를 게데스로 부르니 만 명이 그를 따라 올라가고 드보라도 그와 함께 올라가니라” 바락이 다볼로 갔습니까? 안 갔습니까? 갔습니다. 비록 하나님의 영광을 드보라에게 빼앗기는 수모를 당했지만 그는 다볼 산으로 나아갔습니다. 믿음의 현장으로 나아간 것입니다. 이 구절이 필자를 감동시키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러기에 서툰 믿음이었기에 온전한 믿음을 붙들려고 하는 행위는 비난받을 행위가 아니라 격려해야 할 믿음입니다. 오늘 내가 섬기는 조국교회에 필요한 것은 믿음 없음에 대한 타박이 아니라 서툰 믿음이라도 가지고 온전한 믿음으로 행군하는 자들을 향한 격려가 필요한 것은 아닐까 뒤돌아보게 합니다. 김기석 목사의 글에서 본 내용에 밑줄 그은 적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여느 사람 사람과 다른 방식으로, 즉 내 눈이 아니라 하나님의 눈으로 사람과 세상을 보는 것입니다.” (가시는 길을 따라 나서다. p,145) 샬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