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지은이 | 이정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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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출판사 | 책과 강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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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작성일 | 2023-04-06 14:57: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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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훈의 『쓰려고 읽습니다』 (책과 강연 간, 2023년)를 읽고 저자는 인기 있는 기획 디자이너다. 책과 강연 대표이기도 하지만 북 콘텐츠 기획자에 더 가깝다. 그가 최근에 펴낸 ‘쓰려고 읽습니다.’를 목욕탕에 가지고 가서 읽었다. 읽기에 그리 무거운 글감도 아닐 것 같아 목욕탕 독서를 택했다. 아직 책 읽기에 불편할 정도로 시력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북 콘텐츠 기획자답게 책의 활자 포인트도 연령이 있는 독자들까지 배려한 12point로 제작한 것을 보면서 기획전문가답다는 평가를 내릴 수밖에 없었다. 저자가 책 전반에 걸쳐 줄곧 강조한 논지가 있다. 쓰기다. 그의 지론은 몇 가지로 요약된다.(pp,210-214) ① 쓸 때, 노트북, 태블릿, 필요한 책 준비, ② 읽고, 밑줄 치고, 옮겨 적고, 덧붙인다. ③ 글쓰기에는 특별한 필력은 필요 없다. ④ 프롤로그와 목차에 대한 중요성 강조 ⑤ 세상이 글감이다. 젊은 작가답다. 저자는 e-book 예찬론자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전자책에 대한 선호도가 높다. 그도 그럴 것이 아날로그 책에 비해 저자의 용어를 그대로 빌리자면 e-book은 「문장 수집」에 대단히 용이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충분히 그럴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의 예리함이 돋보인 부분은 프롤로그와 목차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한 대목이었다. 그의 선명한 책 출간에 따른 필수적 요소인 프롤로그와 목차에 대한 고집은 눈여겨볼 만하고 귀담을 만하다. 이유는 필자의 생각과 거의 동일하기 때문이다. “목차는 프롤로그 그 다음에 바로 붙입니다. 그리고 첫 번째 글쓰기를 시작합니다. 예를 들어 1장의 첫 번째 소주제를 쓴다면 1-1. 제목의 원고는 프롤로그와 목차 사이에 들어갑니다. 목차 뒤가 아니라 프롤로그와 목차 사이에 끼워서 씁니다.” (pp,188-189) 이 말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독자라면 아직은 글쓰기 수준에 올라서지 못한 것임을 전제한 기술이다. 저자는 프롤로그의 글이 책의 승부수를 결정 짓는다고 역설한다. 필자 역시 이 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나 역시 책을 출간함에 있어서 가장 심혈을 기울이는 영역이 프롤로그다. 프롤로그가 중요한 이유는 프롤로그를 읽고 독자들은 이 책을 읽을 것인가 말 것인가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동시에 저자가 프롤로그를 강조한 또 다른 이유는 프롤로그에 밝힌 책의 논지가 분명해야 목차도 나오기 때문임을 시사 한 셈이다. 물론 이런 전개는 책 읽기를 통한 책 출간 목적의 내공이 쌓인 것을 전제하는 것이다. 저자가 책에서 남긴 글말 중에 인상적인 문구가 있다.
“추상에서 구체로”(p,269)
이 문구는 자연과학을 하는 사람들의 레테르가 아니다. 저자가 강조한 글 쓰는 자가 되기 위해 반드시 경험해야 하는 수준이라고 해두자. 하지만 이 점은 간과해서는 안 되는 과정이다. 왜? 추상을 구체화시키는 작업은 반드시 쓰는 작업을 통해서만 취득할 수 있는 수확이기에 그렇다. 글 읽기는 책 저자의 함축되어 있는 사상을 나에게 추상화하여 체득하는 작업이다. 그러기에 독서는 중요하다. 하지만 그 안에 담겨 있는 내용은 저자의 것이지, 결코 내 것이 아니다. 저자의 고유한 사상을 내 것으로 만들려면 내 것으로 체화할 수 있어야 한다. 그 체화는 끊임없는 글쓰기로 가능하다고 저자는 역설한다. 글을 잘 쓰고 못쓰는 것은 쓰기를 행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일이지, 쓰지도 않는 사고에서 결코 일어나는 일이 아님을 강조한다. 나 또한 저자의 이 생각에 동의한다.
“책은 남의 인생입니다. 강연도 남이 얻는 통찰입니다. 남의 것을 읽고 들어서 기록할 수는 있지만 기록만으로 그것이 내 것을 체화되지는 않습니다. 실체가 있는 변화 성장을 원한다면 직접 해야 합니다. 당신의 몸과 마음과 머리를 직접 써서 얻는 산 경험이어야 합니다.”(p,123)
나 같은 목사에게 이 문장은 충분한 도전으로 다가왔다. 세속의 영역에서 치열하게 글을 읽고 쓰는 지성들의 수준도 이 정도다. 하물며 영혼을 책임지는 목회자가 내 것이 없는 빈집에서 상상만 하고 산다면 얼마나 치욕적인가! 결국 쓰기는 삶에서 얻어낸 기록을 쓰는 거다. 자기를 알아가는 것은 고통이지만 그 고통은 참 멋있는 일이다. 이 멋있는 일을 표현해 내는 것이 글쓰기다. 겁먹지 말아야 할 이유는 또 있다. “글쓰기에 필력은 필요 없다. 재능에 의한 글쓰기는 성공할 수 없다. 글을 쓰는 이유는 가까이 자기를 알고 멀리 세계를 이해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구 때문이다. 큰일을 위해 작은 일부터 시작해야 하고 멀리 가기 위해서는 가까운 곳에서부터 걸음을 옮겨야 하는 게 삶의 이치다. 이 작은 걸음으로 시작한 삶의 출발에서 글이 차츰 외연을 넓혀갈 때, 까마득한 지면을 밀고 가게 될 것이다.”(pp,212-213)
저자의 이 독려는 단순히 립 서비스로 가장한 위로가 아니다. 내 삶의 가장 촉촉한 내용들을 촉수로 삼아 단순하게 쓰기를 지속하면 글은 써진다. 삶의 내용을 주마간산 식으로 가볍게 여기는 자는 글을 쓸 수 없다. 하지만 삶의 내용을 은유화 하고 진솔하게 여기는 자는 삶의 곧 글쓰기의 재료가 된다. 작가 이기주의 글이 떠오른다.
“글쓰기는 삶을 부대끼고 미끄러지면서 생각의 결과 감정의 무늬를 문장으로 새기는 일이다.”(이기주, “한 때 소중했던 것들”, 도서출판 달, p,239) 너무 적확한 성찰이 아닌가! 왜 삶이 치열해야 하는가? 그래야 내 삶의 이력을 쓸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도 더불어 또 한 가지는 말할 것도 없이 독서다. 저자가 말한 독서는 글을 쓰기 위한 독서를 강조하다보니 필자가 생각하는 책읽기와 여타 면에서 차이를 보인다. 다독과 정독에 대해서 부정적인 입장을 보인 저자의 일갈이 조금은 부담스럽다. 예건대, 전체를 읽지 않는 독서, 필요한 책에서 필요한 부분만 발췌하여 읽기 등등은 필자의 생리와는 맞지 않는다. 더불어 책을 많이 읽었다는 것을 자랑하지 말라는 콘텐츠에서 그는 이렇게 강조한다. “책에는 삶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책을 뚫고 나온 지식의 혈관이 당신의 삶으로 이어져 영혼의 심장을 펄떡이게 할 때 비로소 책은 의미가 됩니다.”(p,62) 백번 지당한 갈파다. 문제는 이런 역동이 다독과 무슨 연관이 있느냐에 대해 묻고 싶다. 다독을 독서의 의미로 삼은 자들은 책을 자랑하지 않는다. 오히려 부끄러워한다. 다독과 정독은 그것만의 의미를 부여하며 충분한 가치가 있다. 저자가 독자들이 잘못하면 오독할 수 있도록 자극하는 다독에 대한 편견은 매우 유감천만이다. 저자가 말한 ‘책을 믿지 말라’는 당부는 안 들은 것으로 하겠다. 레베카 솔닛이 이렇게 말했다. “글쓰기는 누구에게도 할 수 없는 말을 아무에게도 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모두에게 하는 행위이다. (중략) 글쓰기는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침묵으로 말을 걸며, 그 이야기는 고독한 독서를 통해 목소리를 되찾고 울려 퍼진다.”(레베카 솔닛, “멀고도 가까운 읽기, 쓰기, 고독, 연대에 관하여”,p,100.) 이정훈의 책을 덥고 나니 솔닛의 외침이 더 선명하게 들리는 듯 했다. 글쓰기는 책을 내기 위함이 아니라, 살아내기 위한 외침과도 같은 것이라는 그녀의 말이 내게는 더 귀에 공명된다.
젊은 작가에게서 또 많이 배웠다. 역설이다. 그러니까 책은 할 수 있으면 많이 읽어야 한다. 나는 이정훈이라는 인물을 전혀 몰랐으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