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지은이 | 박노해 |
---|
ㆍ출판사 | 느린걸음 |
---|
ㆍ작성일 | 2023-06-08 08:21:58 |
---|
박노해의 『하루』 & 『단순하게, 단단하게, 단아하게』 (2019, 2020년, 느린 걸음 간)를 읽고 하느님! 지옥처럼 캄캄한 2000미터 아래 지하 갱 속입니다. 여기는 육신을 위한 그리고 생존을 위한 전쟁을 하는 총 없는 전선이옵니다. 어제는 동료를 만나니 제가 살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꼭 이렇게 해야만 밥을 먹을 수 있나 하는 생각을 오늘도 수없이 합니다. 우리는 서로 말이 없지만 아침에 보고 온 식구들과 높은 하늘, 맑은 공기를 다시 한 번 보고 느끼고 싶어 합니다. 태양을 그리며 오늘도 하루를 지내는 인생 두더지들이옵니다. 도시락을 열면 탄가루가 더러 떨어지겠지만, 어두운 곳이라 잘 보이지 않으니 맛있게 먹을 수 있어 좋습니다. 시원한 선풍기를 쐬 가며 상큼한 냉면 한 그릇 후루룩 먹고 싶지만, 아내의 손길이 머무는 이 음식을 더 맛있게 먹도록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아내의 정성과 사랑을 그리고 당신의 더 크고 큰 은혜를 이곳에서도 꽃피우게 하시는 하느님, 찬미와 영광을 받으시옵소서! 몇 시간만 무사히 넘기게 해주십시오. 오늘 저녁은 큰 녀석과 레슬링을 해볼 작정입니다. “아버지, 나 큰 학교 안 갈 테니 굴속에 들어가지 마” 하던 큰 녀석이 벌써 5학년이 되었습니다. 하느님! 더 깊은 갱 속에 머물더라도 그 속에 함께 계시는 하느님. 당신을 믿습니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김영진, 『밀가루 서 말짜리 하느님』, 성바오로출판사, 1992, pp,31-32)
김영진 신부의 글 『밀가루 서 말짜리 하느님』 에 수록된 ‘어느 광부의 밥’이라는 시입니다. 이 책의 1쇄가 1992년 판인데 영등포 문고에서 1993년에 구입해서 9월 16일에 완독한 기록이 남아 있는 걸 보면 내 나이 파릇파릇한 32살에 친구한 글이다. 습관처럼 독서를 끝내고 나면 남기는 독서 후기 사족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4월에 목사 안수를 받은 새내기 목사는 무지하게 울었다. 나를 이렇게 울린 시도 또 오랜만이다. 이 광부 같은 민초들이 아들들과 계속해서 씨름하는 날이 오기를 기도해 본다. 나는 이들을 위해 사는 목사가 되자. 이들이 하느님과 같은 존재니까.”
기억을 더듬어보니 당시 나는 경남 밀양에서 단독목회를 하든 시절이었다. 목회와 더불어 서울신학대학에서 M.A 과정 중이었기에 무려 5시간 30분이 걸리던 통일호 열차 안에서 이 책을 읽다가 주변 사람들이 흉을 보든 말든 흐느끼며 울었던 글이라 더욱 기억이 오롯하다.
새벽부터 캄캄한 지하 갱도에서 일한 광부가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눈을 가늘게 뜬다. “지상은 내게 늘 눈이 부셔 눈물이 나요. 오늘도 세상은 해가 떴구나. 오늘도 내가 살아 나왔구나. 열두 살 때부터 광부로 일을 했어요. 어른들이 못 들어가는 좁은 갱도를 개척했지요. 지상에서 산 날보다 지하의 날들이 더 많았네요. 세상이 조금은 더 환해진 거겠죠. 지상의 환한 햇살만 보면…그냥 눈물이 나요.” (박노해, 『하루』, 느린 걸음, 2019년, p,56.) 박노해 작가의 본서에 수록된 ‘눈부신 지상의 시간’이라는 제하의 에세이 글이다. 읽다가 마치 30년 전의 추억이 복기되는 느낌이었다. 광산에 들어간 아빠가 지상으로 나와 집으로 오는 길에 딸들이 그 아빠를 품으로 맞이한다. 볼리비아 우아누니 광산의 지하 갱도 속으로 어젯밤 다이너마이트를 가득 지고 들어간 아빠. 딸들은 광산 입구까지 달려가 아빠를 맞이한다. 작은 새처럼 지저귀며 아빠의 팔에 매달리는 딸들. “오늘도 덕분에 무탈했네요. 딸들이 제 수호천사라서요. 하하하. 매일 광산으로 갈 때마다 기도하죠. 우리 아이들이 안전하게 자기 인생을 살고 타고난 걸 다 꽃피울 수 있다면, 네 그거죠. 나는 늘 한번 웃고 지하 막장으로 들어가죠.” 이 무정한 세계에서 서로에게 온 존재를 기울여 가만가만 들어주고 얼굴을 바라봐주는 웃음. 괴롭고 불안한 어둠 속에서 사랑, 사랑이라는 자기 헌신으로 길어 올린 웃음. (박노해, 위의 책, p,105.) 동서양을 막론하고 나나 그대나 이 땅에 발을 딛고 있을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이 파송한 이 사람들의 희생이 있기 때문임을 잊지 말자. 내가 교만해지면 이런 이들에 대한 감사를 죽인다. 이런 이들이 무엇 때문에 존재해야 하는지에 대해 성찰하기를 싫어하며 고개를 돌린다. 결국 하나님이 나를 존재하게 만든 이유를 무시하게 되는 괴물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관심하는 것은 인간 실존의 어느 한 현상이 아니라, 인간 실존 자체다.”(아브라함 죠수아 헤셀, 『누가 사람인가?』, 한국기독교 연구소, 2008년, p,10.) 엄청난 통찰이다. 아브라함 죠수아 헤셀의 이 갈파는 특히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에 안에 거하고 있는 ‘우리’가 곱씹고 성찰해야 할 명제다. 박노해는 이것을 글과 사진으로 증명해 냈다.
“나는 걸음마다 황무지를 늘려가는 사람인가, 걸음마다 푸른 지경을 넓혀 가는 사람인가”(박노해, 『단순하게, 단단하게, 단아하게』, 2020년, 느린 걸음, p, 24.
뭐랄까? 야구 방망이로 뒤통수를 타격 받았다고나 할까. 뭐 이런 혹독한 찔림이 나의 심장을 타격했다. 목사라는 이름으로 살아온 지난 31년 세월, 만에 하나 선후배들이나 지인들이 나를 전자의 인물로 평가한다면 내 인생의 노정이 얼마나 무익한 삶이었을까 싶어 두렵고 또 두렵다. 나는 오늘 한 걸음을 내디디면서 1 에이커만이라도 푸르게 조경하고 경작하는 삶의 흔적을 남겼으면 좋겠다.
미군의 무인 폭격기가 차가운 폭음을 울리는 파슈툰에서 아직 잘 걷지 못하는 어린 양을 품에 안은 목자를 만났다. “전쟁의 현실은 제가 어찌할 수는 없지만 이 어린 양들은 제가 지켜 줄 겁니다. 대대로 살아온 터전을 아이들에게 물려주고 어린 양의 울음소리가 그치지 않게 하는 것이 제가 이 생(生)에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이겠지요” 생을 두고 끝까지 밀어 가는 사랑보다 강한 힘은 없으니. (위의 책, p,46.)
나는 파슈툰의 목자와 같은 목자인가? ‘어린 양의 울음소리가 그치지 않게 하는 일’이 내 목회의 목적이었던가? 울음소리는 생명의 소리다. 생명의 소리를 앗아가는 것은 백번 천 번을 양보해서 그것이 정당한 통치 행위라 하더라도 그것은 최악의 죄다. 아주 질 나쁜 범죄다. 헤롯의 살기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반면, 어떻게든 생명의 고동 소리가 진동하고 울려 퍼지게 하는 것이 목사의 몫이요, 미션이지 않은가 싶어 시인의 글을 심비(心碑)에 새겼다. 요즈음, ‘낭만닥터 김사부 3’을 찾아본다. 김사부가 1,2편의 어디선가 했던 대사는 목사인 내게 복음서의 한 구절처럼 공명되었다. “무조건 살린다.” 무조건 죽이려는 세상에서 무조건 살리려는 사람이 얼마나 외롭겠나 싶지만 나 역시 이 길을 끝까지 가련다.
“전쟁의 반대는 평화가 아니라 좋은 삶을 살아가는 일상이고, 내가 먼저 좋은 사람이 되는 거라고, 바위산처럼 단단한 믿음으로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린다.” (위의 책, p,86.)
또 하나의 산상수훈을 읽는 것 같았다. 위 문장처럼 아름다운 문장이 또 어디에 있겠나 싶다. 내년 총선이 있다. 내가 살고 있는 제천 시내의 길목 좋은 곳에 이 땅 정당의 국회의원과 국회의원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이 내 건 현수막을 금년에는 쏠쏠히 본다. 정치를 해서 권력을 잡으려는 금수(禽獸)같은 존재들에게 기대나 희망을 접은 지 이미 오래라 그들이 내뱉는 독설의 플랜카드는 뭐 그렇다 치고, 정말 염려되는 것은 지나가는 아이들이 그 폭력적 글귀들을 읽고 볼 텐데 그들이 금수보다 못한 어른들이 난자하듯 찌르고 있는 ‘너 죽고 나 죽자’ 식의 글귀들을 보면서 갖고 지니게 될 금수성(禽獸性)은 또 누가 책임질 것인가를 되 되이면 목사의 애간장은 타들어간다. 가슴을 난도질당한 느낌이라서 말이다. 오래되어 출처가 기억나지 않아 각주를 달 수는 없지만 어느 책에서 읽어 기억하는 문장이 이랬다. “나는 다른 한 쪽에 있고 싶었다.” 이렇게 살아가려는 마음을 갖고 있는 사람이 존재하는 세대는 한 편으로는 불행하지만, 반면 또 한편에는 희망이 있어 보여 내심 안심이 된다. 이미 한쪽은 절망이다. 지난 주일 설교 원고에 담은 시인의 시어가 마음을 아리게 한다. ‘풀’이라는 시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김수영 시인이 읊조린 ‘절망’이라는 시에서 시인은 이렇게 일갈했다. “구원은 예기치 않은 순간에 오고/절망은 끝까지 그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다.”(김수영, 『김수영전집』, 민음사, 323.)
이 땅에서 느끼는 절망은 시인의 말처럼 반성하지 않는 절망이다. 모두가 반성을 해도 될까 말까의 현상들이 비일비재한데 그 반성하는 마음은 이미 녹슬어 폐기되었다. 그래서 절망이다. 시인 나희덕이 말한 대로 녹슬어감이 이렇다. “녹슬어간다는 것은 느리게 진행되는 폭발과도 같아서 붉게 퍼지는 말들이 조롱을 갉아먹었다.” (나희덕,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 문학과 지성사, p,106) 박노해는 나에게 이 녹슬어감과 싸우도록 부추겼다. 자극했다. 그래서인지 나는 박노해의 글이 좋다. 신학도로 살던 어느 시간에 나에게 천둥, 번개, 벼락 소리로 다가왔던 ‘노동의 새벽’을 만나면서 받았던 충격의 충격이라는 일깨움이 있은 지 40여 년이 지난 작금이지만 여전히 나에게 박노해의 글들은 대단히 아이러니하지만 잠자고 있는 나의 영성을 움찔하도록 만드는 영의 기폭제가 되고 있다. 작가가 건강하기를, 그리고 ‘느린 걸음’의 스텝들도 건강하기를 화살기도 한다. 이번 주간, 작가의 시집 ‘너의 하늘을 보아’를 만나고 있는데 이런 소회가 임한다.
이렇게 행복해도 되나!
전투적인 저항 시인의 시에서 나는 너무 행복한 영적 울림을 듣고 있으니 나 또한 해석이 잘 안 된다. 어떤 이는 나에게 그러니까 진보적인 목사라고 평하지만, 나는 진보적인 목사가 아니다. 그냥 주군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너무 사랑하는 목사일 뿐이다.
서울|라 카페 갤러리에서 ‘아이들은 놀라워라’ 사진전이 열리고 있다. 느린 걸음 스텝이 목사님, 한 걸음 해 주시면 감사하겠다는 글을 보냈다. 다음 주부터 시작되는 2주 간의 안식월 기간에 꼭 들려보려는 버킷 리스트에 담겨 있는 내용 중에 하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