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지은이 | 나희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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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출판사 | 나라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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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작성일 | 2021-05-07 20:12:5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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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희덕의 “유리병 편지”(나라말, 2013년)를 읽고
에베소서 2:10절 상반절을 보면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고 기록하고 있다. ‘만드셨다.’는 헬라어 원어가 ‘포이에마’임을 안다. 이 단어에서 시를 뜻하는 영어 단어 ‘poem’이 나왔다고 했다. 근래 무작위로 시를 읽고 있다. 정현종 시인이 감상한 스페인이 낳은 세계적인 ‘로르카’ 시선을 비롯해서 ‘라이너 마리아 릴케’도 접하고, 칠레의 시성인 ‘파블로 네루다’도 읽고 있다. “시는 어딘가에서 띄워 보낸 유리병 편지와 같다.”고 파울 첼란이 말했다. 그래서 그런지 그 어느 해보다 나 역시 시성(詩性)이 조금 더 풍성해 진 느낌이다.
문학 집배원 나희덕의 ‘유리병 편지’를 파라과이 안티구아를 드립에서 한 잔 들고 교회 뒤뜰로 나가 읽었다. 읽다가 사계절에 읽기 좋은 시를 선별한 이 시집이 나를 더욱 풍요롭게 했다. 감성과 지성 둘 다를 그렇게 만들었다. 김해자는 20년을 함께 한 걸레를 이렇게 표현했다. “20년의 생애/더럽혀진 채로는 버릴 수 없어/거덜 난 생 위에 비누칠을 하고 또 삶는다/화염 속에서 어느덧 화엄에 든 물건/쓰다 쓰다 놓아 버릴 이 몸뚱이” (p,18.) 시 연을 읽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난 걸레가 행한 삶보다 더 나은 삶을 살아왔나를. 안도현이 말한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말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는 의미의 외연 확장을 김해자에게서 배웠다. 김영승은 ‘이방인’에서 말한다. “서러움이 있기 때문에/우리는 죽을 수 있는 것이다/恨이 있기 때문에/含笑入地할 수 있는 것이다.”(p,33) 서러움이 없는 인생이 있겠나 싶지만, 서러움을 해학과 해피엔딩으로 승화시킨 시인의 실력이 발군이다. 김선우는 ‘낙화, 첫 사랑’에서 기막힌 글말을 남겼다. “추락하는 그대의 속도를 앞지르겠습니다/내 생을 사랑하지 않고는/다른 생을 사랑할 수 없음을 늦게 알았습니다.”(p,36) 나희덕이 해제에서 말했다. “낙화는 닫힘이 아니라 새로운 열림을 의미한다.”, “폐경이라니, 엄마, 완경이야, 완경!”고.(p,37.) 그렇다. 멀어져 가는 뒷모습을 끝까지 지켜보는 것까지가 온전한 사랑의 몫이다. 손택수 시인의 ‘아버지의 등을 밀며’를 읽다가 그만 울었다. “아버지는 단 한 번 아들을 데리고 목욕탕엘 가지 않았다. 여덟 살 무렵까지 나는 할 수 없이 누이들과 함께 어머니 손을 잡고 여탕엘 들어가야 했다. 누가 물으면 어머니가 미리 일러준 대로 다섯 살이라고 거짓말을 했다. (중략) 아무렇게나 비난했던 아버지 등짝에 살이 시커멓게 죽은 지게 자국을 본 건 당신이 쓰러지고 난 뒤의 일이다. 그렇게 밀어드리고 싶었지만, 부끄러워서 차마 자식에게도 보여줄 수 없었던 등” (pp,38-39) 나는 이 대목에서 소리죽여 울었다. 내 아버지도 그랬고, 나도 그럴 것 같아서. 손택수 시인이게 머리를 숙인다. ‘첫’에서 김혜순은 노래한다. “세상의 모든 첫 가슴엔 칼이 들어있다.”(p,77) 나희덕의 해설은 통렬하다 못해 장렬했다. ‘첫’은 관형사나 접두사가 아니라 아주 특별한 고유명사로, 과거형이 아니라 늘 현재형으로 우리 마음속에 빛나고 있을 겁니다. 내가 주를 처음 만났을 때, 내가 첫 사랑을 고향교회에서 처음 만났을 때, 내가 내 아들을 신생아실에서 처음 보았을 때, 내가 첫 첫 첫 첫 첫 모든 것을 경험했던 것은 그래서 지금이고 미래다. 적어도 내 마음속에서는. 전동균의 ‘까막눈 하느님’을 읽다가 불경스럽다고 생각해야 하는 목사인데 왠지 성스러워 보이니 내가 문젠가 보다. 이 시는 전문을 실어본다. “해도 안 뜬 새벽부터/산비탈 밭에 나와 이슬 털며 깻단 묶는/회촌마을 강씨 영감/성경 한 줄 못 읽는 까막눈이지만/주일이면 새 옷 갈아입고/경운기 몰고/시오리 밖 흥업공소에 미사 드리러 간다네/꾸벅꾸벅 졸다 깨다/미사 끝나면/사거리 옴팍집 손두부 막걸리를/하느님께 올린다네/아직은 쓸 만한 몸뚱아리/농투성이 하느님께 한 잔/만득이 외아들 시퍼런 못물 속으로 데리고 간/똥강아지 하느님께 한 잔/모 심을 땐 참꽃 같고/추수할 땐 **같은/세상에게도 한 잔……/그러다가 투덜투덜 투덜대는/경운기 짐칸에 실려/돌아온다네” (pp,80-81.) 나희덕은 이렇게 전동균을 두둔한다. “예수님이 지금 한국에 오신다면 십자가 대신 똥짐을 지실지도 모른다는 권정생 선생의 말씀처럼, 농부는 몸과 영혼을 두루 살리는 일군이지요. 그러니 농부의 한숨과 중얼거림, 새벽에 이슬 젖은 깻단을 묶는 노동도 일종의 기도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p,83) 대학원에서 만났던 토마스 뮌처를 공부하다가 나는 불온하게도 마르틴 루터보다 더 큰 애정이 갔으니 내가 문제는 문제아인가 보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생겨 먹은 것이 그러니 어쩌랴. 길이 길어져 마감해야겠다. 마종기 시인의 ‘기적’으로 갈무리한다. “추운 밤 참아 낸 여명을 지켜보다/새벽이 천천히 문을 여는 소리 들으면/하루의 모든 시작이 기적이로구나” (p,190) 그랬다. “기적은 물 위를 걷는 것이 아니라 땅위를 걷는 것이라고 카프카가 말했던 것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인 것도 기적이지만, 우리가 오늘 식탁에 앉아 한 그릇의 밥을 먹는 것도 기적이이지요.”(p,191)
나는 매일 기적을 일으키며 살고 있는 것을 인지하고 있나, 나는 매일 기적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있나 성찰해 본다.
예전에도 왠지 나희덕 시인에게 끌렸지만 근래는 더 더욱 그렇다. 너무 아름다운 ‘유리병 편지’를 배달해 주어 감사의 고개를 숙인다.
ps: 서평이 어렵다는 소리를 너무 들어 쉽게 쓰려고 했는데 가벼워 보이는 느낌이 들어 송구하다. 하지만 이제는 이렇게 살련다. 나도 너무 치열하지 않으련다. 아들과 아내를 위해 조금은 더 살아야 해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