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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사랑은 내 시간을 기꺼이 건네주는 것이다.2024-06-11 10:01
작성자 Level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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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지은이 이기주
ㆍ출판사 황소북스
ㆍ작성일 2021-05-18 08:08:57

 

이기주의 “사랑은 내 시간을 기꺼이 건네주는 것이다.”(황소북스, 2020)를 읽고


소설가 고토 메이세이가 나는 왜 소설을 쓰는가? 라고 자문을 한 뒤에 이 유명한 말로 자답한다.
“소설을 잃어버렸으니까”(사사키 아타루,“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자음과 모음, 2015,p,105.) 말장난 같아 보이는 메이세이의 이 갈파는 대단한 역설이 담겨 있다. 그의 말의 의미를 조금만 넓혀보자. 인문학의 소멸을 눈앞에 두고 있는 참담한 이 시대에 본인은 글쓰기로 저항하겠다는 의지를 보인 셈이다. 신이 인간이 된 호모데우스의 시대를 주창한 유발 노아 하라리의 논거는 이렇다. “고대인들이 신을 의지한 이유는 순전히 자기네가 살고 있는 세상을 통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통제력이 인간에게 있기에 신이 필요 없을뿐더러, 인간이 곧 신이 될 수 있다는 근거인 셈이다.”(팀 켈러, “부활을 입다,”, 두란노, 2021,pp,18-19)
인간이 인간을 통제할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이 있는 시대가 되었다는 개그콘서트에 나올 법한 이 말을 믿으라는 금세기 최고 세계적 석학의 말에 삼가 애도를 표한다.
인문학의 쇠퇴는 인간에게 재앙이다. 백번 양보하여 재앙정도면 또 어떻게든 다른 반대급부를 되살리면서 버텨 보겠다. 하지만 재앙으로 끝나지 않고, 결국은 파국을 맞게 하는 제일 원흉은 바로 인문학의 소멸이다.
지난 주간, 4명의 목사 안수 동기생들과 5인 이상 거리두기 지침을 준수하며 목회의 장(場)을 떠나 고즈넉한 시간을 누리는 모임을 가졌다. 모임 장소가 울산 바위가 보이는 기가 막힌 뷰(view)를 제공하는 장소였고, 또 하나의 보너스는 그날 아침 미세먼지가 제로에 가까워 청명하게 드러난 하늘이었다. 이른 아침, 도저히 이 아름다움을 그냥 무의미하게 지나치기가 너무 아까워 가지고 간 나태주 시인의 시집을 들고 숙소 캠퍼스로 나갔다. 구름 한 점 없는 마치 가을 하늘같은 청명함, 동해 바다에서 불어오는 청량한 바람을 맞으며 읽는 시집 하나는 내게 최고의 행복감을 주는 하나님의 선물이었다. 책을 피자 이 시구가 눈에 들어왔다.
“햇빛이 너무 좋아/혼자  왔다 혼자/돌아갑니다.” (나태주,”꽃을 본 듯 너를 본다“ 그리움에서,지혜, p,78)
시어를 접하는데 왈칵 눈물이 핑 돌았다. 내가 ‘나’ 인 것에 대한 감사만 하고 살았던 ‘나’였는데, ‘나’를 행복하게 해 준 것은 ‘나’가 아니라 ‘너’와 ‘그’였다는 생각이 불연 듯 내게 임해 그 날의 감동을 잊을 수가 없을 정도로 벅찼다. 이제 본론으로.
필자는 이기주가 집필한 모든 책을 읽었다. 특히 2017년에 만난 ‘언어의 온도’를 다 읽고 난 뒤에는 책에 이렇게 사족을 남겼다. “이글은 기적이다.”
5월에 만난 그의 ‘사랑은 내 시간을 기꺼이 건네주는 것이다’를 섭렵한 뒤에 책 뒤에 이렇게 썼다. “이건 또 기적이었다.” 저자의 글에 대해 감히 평하자면 세 가지를 논하고 싶다. 따뜻하다. 절제미가 있다. 그리고 감동이 있다. 
“소중한 사람의 빈자리는 아무것도 없는 무(無)의 공간이 아니라, 쓰라린 사연이 블랙홀처럼 모든 걸 송두리째 삼켜버린 상태다. 이는 공백이 아닌 여백이다.” (p,60)
따뜻한 삶의 길을 걷지 않은 사람은 결코 볼 수 없는 해석이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공백을 남기고 떠난다. 그래서 후회하고 회한의 아픔 때문에 괴로워한다. 그러나 적어도 따뜻한 삶을 살기 위해 몸부림 친 사람들은 공백이 아닌 여백을 남긴다. 이 여백 역시 아쉽고 유감스러움을 남기지만 그래도 공백의 허전함보다는 ‘그래도 다시’의 여운을 남긴다. 그래서 그런가, 여백은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그 여백을 나도 남기고 싶다는 의미를 부여해 준다. 그래서 홀로 남은 사람들은 같이 걸으려 하고, 같이 아파하고, 같이 울려고 한다. 아마도 바울이 말했던 말 그대로 ‘우는 자와 함께 울라’는 동통(同痛)의 공감대를 형성하게 한다.
저자의 글은 절제미가 있다.
“문득 되짚어 본다. 나 역시 한 권의 책에 무조건 많은 이야기를 담으려 애쓴 적이 있었다. 욕심이라는 칼로 내 문장에 화려한 무늬를 새겨 넣어야 많은 독자들이 읽어줄 것 같았다. 글쓰기에 대한 과욕은 지평선 같았다. 걷다 보면 그 끝에 쉽게 닿을 수 있을 것 같았으나 가도 가도 매번 도착할 수가 없었다.” (p,172)
프랑스의 수필가인 도미니크가 말했단다. “우리는 공간을 채우느라 공간을 잃는다.”(p,172, 재인용) 설교 원고를 준비를 하면서 내내 마음에 다짐하는 것이 있다. “내 생각은 가장 많이 빼고 하나님의 생각은 최대로 삽입하자.” 욕심으로 인해 때마다 실패하지만 노력하고 있다.
하나만 더, 행복하게 하는 저자의 글에 박수를 보낸다. 그의 글을 읽을 때마다 행복하다. 울컥울컥하게 한다. 왜? 평생을 설교자로 산 나를 부끄럽게 하는 감동을 그는 글에서 선사하기 때문이다.
“부모는 참 그렇다. 아침저녁으로 밥을 차려주고, 자신의 꿈을 덜어 자식을 꿈을 불려주고, 밖에서 자신을 희생해가며 돈을 벌어다 주고, 그렇게 늘 해주었는데 자식이 커서 뭔가 해드리려면 매번 ‘미안하다’고 말한다. 단지 받는 게 미안해서가 아닐 것이다. 더 주고 싶지만 주지 못하니까, 그래서 부모는 자식을 향해 ‘미안하다’고 입을 여는 것은 아닐까?”(p,89)
감동은 말이 아니다. 삶이지. 글을 읽다가 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졌다.
“엄마, 하나님 나라가 여기보다 더 좋죠? 그치만 아주 가끔은 막내가 있는 이곳도 보세요. 너무 보고 싶거든요.” 

작가 이기주의 ‘사랑은 내 시간을 기꺼이 건네주는 것이다.’는 힐링 교과서다. 접해 보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