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지은이 | 김판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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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출판사 | 동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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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작성일 | 2021-03-25 12:25: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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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임의 ‘바울과 고린도교회’ (동연, 2014년)를 읽고 강해 설교를 하는 목회자들은 누구나 같은 마음이겠지만, 성서의 한 텍스트 강해를 완성하고 난 뒤에 오는 감동과 감사와 감흥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은혜다. 적어도 필자에게는 그렇다. 그래도 젊은 목사 시절, 목사들의 로망이라고 하는 로마서를 마쳤을 때 그랬다. 목사들이 쉽사리 접근하지 못하는 12권의 소 예언서의 마지막 사역이었던 스가랴의 원고 작성을 마치고 나서는 하나님께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복음서를 정복하기 위해 시작했던 마가복음을 마쳤을 때는 종으로 오셔서 끝까지 당신의 정체성을 놓지 않고 달리셨던 주군의 삶을 따라가며 목사로 사는 내 모습이 얼마나 초라하고 작으며 보잘 것이 없는지를 여지없이 깨달았다. 작년에 마무리한 욥기를 교우들과 나누면서 재미없는 그렇지만 꼭 성찰해야 했던 욥의 지난했던 흔적들을 끝까지 함께 해준 지체들에게 머리를 숙였다. “2016년 8월 24일 오후 4시 5분 완독” 서평을 쓰고 있는 본서의 책 뒷면에 기록된 독서 완료 시기다. 필자는 섬기는 교회에서 2016년 9월 18일 주일부터 2018년 9월 주일까지 절기를 뺀 90주 동안 고린도전서 강해를 마쳤다. 이 강해를 준비하는 과정이 있었다. 주석 5권, 신학적 해제가 있는 참고 서적 11권, 그리고 여타 고린도전서에 관련된 목회적인 강해가 아닌, 신학적 접근이 있는 강해 설교집 4권을 6개월 동안 집요하게 선 독서했다. 모두가 필자에게는 귀한 자료였고 저자들은 보물 같은 선생님들이었다. 지금 글을 쓰고 있는 본서는 필자에게는 오아시스 같은 고린도전서 강해의 일등 공신이었다. 필자는 저자를 1회 대면했다. 섬기던 바른교회아카데미 세미나에서다. 당시 저자는 발제자였고, 필자는 열심히 공부하는 수강생이었다. 필자의 발제를 듣다가 감사했다. ‘역시’였기 때문이다. 당시 고린도전서 강해가 한참이었던 때였기에 저자의 발제는 필자에게 더 없이 귀한 공부가 되었고, 부족한 것을 채우는 행복한 시간이었기에 말이다. 본서에서 저자는 고린도교회에서 발생했던 첨예한 신학적 담론이 필요한 9가지의 이슈를 추적하며 소논문으로 작성한 그녀만의 탁월한 신학적 해제를 소개한다. 필자가 탁월하다고 표현한 이유는 여타의 경우, 상당수 저자가 갖고 있는 이데올로기적인 성향의 냄새가 글에서 진하게 풍겨 유감스럽고 아쉬울 때가 많이 있는 데에 비해 본서는 진보적인 성서학자임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사상적인 내용을 주입하려는 성서해석이 아닌 주석적 충실함이 엿 보였기에 그렇다. 제 1장, 바울파와 아볼로파, 고린도교회 분쟁의 실상에 관한 연구에서 통상 인지하고 있는 4 당파설을 저자는 아볼로파와 바울파 즉 2개 파당으로 함축하여 본인의 해석을 전개한다. 게바파는 아볼로와 바울파의 치열함을 방지하기 위한 완충의 조절 장치로 임의로 만들어진 것이고, 그리스도파는 아볼로와 바울파에 속한 팔로워들을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나 되도록 독려하기 위해 고안된 수사학적 조치(pp,35-36)라고 一說한 저자의 해석은 신선했다. 고린도전서 5장에 언급된 고린도교회 음행의 실체에 관한 연구에서는 음행의 주범들이 누구인가에 대한 접근에 주목했다. 계모와 남몰래 벌인 아들과의 애정 행각은 고린도에서는 편만하게 이루어진 사회였다. 바울이 음행이라는 단어를 써가며 고린도전서 5:9절에서 ‘음행하는 자들과는 사귀지 말라’고 강력한 천명한 이유를 저자는 다음과 같이 부연한다. “교회에서 일어난 일은 개인의 애정문제가 아니라 교회 공동체 안에서 공공연하게 알린 계모와의 결혼 문제이다. 바울은 이 문제에 관련하여 문제의 장본인을 나무라기보다는 그 일을 접했던 교인들의 태도를 더욱 문제로 여긴다.” (p,58) 왜 고린도교회 공동체는 이 음행에 대하여 관대했는가? 저자는 직설했다. 주 안에 있는 자들은 자유함을 얻는다는 지적인 근거가 그들에게 무기였다는 날카롭게 지적했다. 자유와 방종을 구분하지 못하고 동일하게 여긴 통탄한 무지가 음행의 원인이었다는 저자의 해제는 통쾌하다. 지면 관계상 조금만 건너뛴다. 5장은 ‘바울은 왜 스스로 벌어가며 선교하였는가?’ 즉 9:1-27절에 소개된 자비량 선교에 대한 연구다. 필자는 2020년 3월 8일부터 사순절 첫 주가 시작되기 직전인 2월 21일 주일까지 고린도후서 11장 강해를 진행했고 또 사순절이 끝나면 나머지 섹트를 마감할 예정이다. 주지하디시피 고린도후서 10-13장은 바울의 처절한 사도권 변호의 투쟁장이다. 강해를 진행하면서 목사라는 직책을 갖고 지난 30년을 살아온 필자의 목회여정이 반사되어 바울의 투쟁사를 눈물로 엮어 가고 있다. 저자는 ‘대한기독교서회 100주년 기념 주석 39권 고린도후서’에서 11:1-12:13절 을 주석하면서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부득이한 바울의 자랑은 바울이 교회로부터 부양을 받지 않고 값없이 복음을 전한다는 것에 대한 변호인데, 바울은 자기 입장을 굽히지 않고 그대로 자기의 사역 즉 자비량 선교를 고수하겠다는 선언을 한다.” (김판임,“고린도후서”, 대한기독교서회 100주년 기념 주석 39권, p,249) 고린도교회 안에 있었던 바울의 적대자들은 바울이 스스로 벌어가면서 사는 걸 보니 사도가 아닌 것이 분명하다고 공격하며 사도직에 대한 시비를 걸었다. 바울이 이런 말도 안 되는 공격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자비량 선교를 포기하지 않겠다고 한 것은 다음의 이유라고 저자는 갈파한다. “바울은 사람이 누군가로부터 돈을 받으면 종속된다는 경제상의 기본 사실을 알고 있었다.”(p,144) 이 정도의 사도로서의 자존감이 있었던 바울은 사도가 아니기 때문에 그 권리를 포기한 것이 아니라 더 높은 차원의 사도로서의 자존감 즉 그것은 주존심이었는데 저자는 이렇게 갈무리했다. “바울은 사도로서의 활동에 대한 정당한 삯을 생각했다면 그것은 교인들이 주는 생활비가 아니라 그들 자신, 즉 그들의 그리스도 됨이다.” (p,145) 전율하는 감동이며, 너무 귀하고 아름다운 사도권의 행사다. 하나만 더 소개한다. 7장에 언급한 바림직한 공동식사를 위한 제언이다. 이 내용은 고린도전서 11:17-34절의 연구다. 흔히 알고 있는 성찬식에 애용되는 구절에 대한 해석이다. 고린도교회는 예배 공동체로 모임을 가질 때마다 애찬을 겸했다. 소위 말하는 식탁공동체 혹은 밥상 공동체였다. 문제는 공동체가 가졌던 애찬의 시간으로 인해 야기된 공평하지 못함이었다. 아마도 고린도교회 공동체 예배는 일과 후나 혹은 해가 넘어갈 무렵에 드려졌기에 애찬은 만찬의 성격이 짙었다. 최선을 다해 함께 나누었던 만찬은 고린도공동체의 사회상을 감안할 때 적지 않은 부조화를 일으킨 것이 분명하다. 고린도는 빈부의 격차가 심했던 도시였기에 부자 신자, 가난한 신자가 당연히 존재했다. 부자들은 먹고 사는 문제에 있어서 자유로웠고, 빈자는 노동의 곤비함을 느껴야 했는데 애찬이 열리는 시간, 부자들은 그 자리를 선점함으로 음식도 풍요롭게 즐길 수 있었으나. 생활전선에 쫓기다시피 하는 빈자 신자들은 애찬 시간에 늦기가 다반사였다. 당연히 그들은 허접한 음식을 대할 수밖에 없는 억울함이 있었다. 이로 인해 교회 애찬은 사랑을 나누는 시간이 아니라 서로의 벽을 확인하고, 금이 간 것을 확인하는 차별을 느끼는 시간을 전락했다. 바울은 이 상황을 중대하고 심각한 위기로 인식했다. 바울은 중대한 결정을 내리지 않을 수 없는 리더십이 필요했고, 이런 불합리와 부조화를 극복하기 위해 칼을 빼들었다. 저자는 바울의 이 행보를 세 가지로 분석 정리했다. 첫째, 주님의 죽으심을 기억하는 것이 애찬임을 강조했다. 물론 세족 목요일에 진행되었던 성찬의 모델을 근거함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둘째, 자기 자신을 살펴보라는 권면이었다. 공동체 안에 약한 자를 배려하는 정신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의 삶임을 강조한 것이다.(고전 11:28-30) 셋째, 타인을 배려하는 것이었다. 늦게 오는 자의 음식을 탐하지 말고, 배가 고프면 집에서 먹으라는 공격적 선언이었다. (pp,201-205.) 저자는 고린도교회 공동체의 식탁공동체의 문제점을 한국교회와 다음과 같이 연계한다. “교회에서만큼은 혈육 중심의 가족 이기주의를 벗어나는 것이 필요하다. 교회 가족은 집안이 아니라 교회 식구 모두라고 생각하는 것이 필요하다. 교회는 하나님의 거룩한 성가족이기에 가족끼리 만의 식사가 아니라 혼자 교회에 나오는 멤버에 대한 배려가 있어야 한다.” (p,206) 고 교훈했다. 펜데믹을 경험한 지난 14개월 동안 필자는 교회를 더 많이 생각하며 보냈다. 너무 무기력하고, 무능력했던 지난 1년 2개월, 교회는 잃은 것에 한숨을 내쉬며 자탄했다. 하지만, 얻은 것은 없을까에 천착해보려고도 했다. 예상외로 얻는 것도 너무 많다. 신학 없이 달려온 것에 대한 영적 거품 제거의 성찰, 성경적 본질에 대한 상실 앞에서 차분한 뉘우침과 다잡이, 철저한 이기적 교회 중심주의의 안위에서 벗어나 이타적 교회로서의 진보를 결심하게 된 것은 엄청난 수업료를 내고 얻은 수확이다. CS 루이스의 말이 언제나 필자의 가슴 속에 있다. “신학은 어떤 목표가 바람직하며 어떤 수단이 적법한지를 알려주고, 정치학은 어떤 수단이 효율적인지를 알려줍니다.” (CS 루이스, “피고석의 하나님”, 홍성사, p,114.) 교회가 목표를 상실하고 수단을 목표로 삼을 때 가장 비참해진다는 것을 알기에 필자는 가능하면 목표를 붙들려고 노력해 왔다. 중요한 것은 목표는 성서 안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성서신학은 적어도 내게는 너무 소중한 공부의 자원이다. 본서가 그랬다. 저자는 그래서 필자에게 좋은 선생님이다. 이제 글을 맺어야 할 것 같다. 필자는 서평을 쓸 때, 글이 길다는 핀잔을 많이 받는다. 이 글 역시 그런 비판을 받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해서 저자가 치열하게 연구한 내용 전체를 소개하지 못해 저자에게 결례를 범한 것은 아닐까 송구하다. 그럼에도 이 책을 뽑아 북-리뷰를 시도한 이유는 저자를 위로하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였다. 저자는 필자와 페북 친구다. 근래, 저자가 육체적인 나약함으로 많이 곤고해 하고 있는 것을 그녀의 글을 통해 직감했다. 무언가를 통해 용기를 주고 싶은 마음에 읽은 지 오래 된 저자의 글을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글 평을 써보았다. 졸고가 무슨 큰 힘이 되겠나 싶지만, 잠시라도 위로와 격려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용기를 냈다. 고린도후서 강해를 부활절이 끝나면 다시 시작한다. 그때는 저자와 통화라도 해서 교제를 해야겠다. 고린도전후서 강해의 선생님이기에 말이다. 그게 예의일 것 같다.
PS: 김판임 교수님, 건강하시기를 중보 합니다. 건강하셔서 종과 같은 허접한 목사에게 좋은 선생님이 계속되어주셔야 합니다. 언제나 승리를 보고하시는 교수님이 되기를 화살기도 해봅니다.
제천세인교회 이강덕 목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