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지은이 | 매슈 크로스문, 미로슬라브 볼프 공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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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출판사 | IV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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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작성일 | 2021-03-15 11:22:5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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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적 삶 없이는 신학 연구도 없다.” (p,151) 벌써 10여 년 이상은 족히 될 것 같다. ‘부흥과 개혁사’에서 출간된 책에 빠져 있었던 시기가. 심리학, 상담학이 강단을 융단 폭격하고, 긍정의 삶, positive thinking, 잘 되는 나, 목적이 이끄는 40일, 청부론, 청빈론이 강단에서 선포되어 할 십자가의 도를 확인사살하고 있는 바로 그 때, 고든 콘웰의 데이비드 웰스 교수가 쓴 ‘신학실종, 윤리실종, 위대한 그리스도, 거룩하신 하나님, 용기 있는 기독교’와 웨스트민스터의 마이클 호튼이 쓴 ‘Christless Christianity, 기독교의 핵심, 언약신학, 세상에 포로 된 교회’를 미친 듯이 읽으며 반항했던 그 치열함이 고스란히 뇌리 속에 남아 있다. 그리고 지금도 이 책들은 필자가 애지중지하며 아끼는 愛書들이기에 언제나 설교 원고에 인용되는 단골 메뉴이기도 하다. 데이비드 웰스가 정신이 번쩍 들게 했던 엄청난 갈파를 하나 소개한다. “신학적 성찰에는 과거에 대한 전체적 연구가 포함되어야 한다. 과거에 하나님이 교회에서 일하시고 역사하신 사실에서부터 현재의 폭풍우 가운데서 교회라는 배가 흔들리지 않도록 해 주는 무게 중심을 찾게 해준다. 과거의 영적인 부요를 모으며, 현재를 절대화하지 않고 상대화해 줄 수 있도록 만드는 반성적 성찰을 준다. 그러므로 신학적 성찰을 하는 자는 언제나 신앙으로 고백되는 내용과 한 사회에서 정상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것 사이의 연관성을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데이비드 웰스, “신학실종”, pp,154-155.) “한 사회에서 정상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것 사이의 연관성을 이해하는 것이 신학”이라는 이 문장이 왜 그리 뜨겁게 다가왔는지 복기하다보니 지금도 흥분된다. 교회와 목사와 신자가 천박해지는 이유는 이런 치열한 공부와 성찰을 포기했거나 관심을 갖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반드시 해야 하는 신학적 노력과 공부에 소홀했기 때문이다. 매슈 크로스문, 미로슬라브 볼프 두 사람은 본서에서 이런 치열한 공부에 소홀한 독자(목사, 신자 모두를 포함함)를 몰아치며 야단친다. 이런 게으름의 결과는 두 가지라고 맹공 하는데 바로 교회의 무너짐과 그리스도인을 향한 업신여김이다. 수치요, 치욕이다. 필자가 오늘의 언어로 대치해서 표현한 이 테제를 저자들은 제 2장에서 신학의 위기로 진단했다. 신학의 위기라는 말이 이제는 예사롭게 들리지 않는 이유가 있다. 이미 걷잡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고, 너무 많이 무너져 있기에 대안제시가 그리 설득력이 있어 보이지 않기 때문이리라! 그럼에도 뒷짐 지고 있어서야 되겠는가! 저자들은 제일 먼저 신학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정신 차리고 접근해야 할 공부를 아이러니하게도 신학 공부가 아닌 인간 공부라고 진단한다. 필자는 작년 12월에 이번만큼은 반드시 정복하리라 생각했던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독서를 마쳤다. 한 번 읽어서는 이해의 폭이 좁을 수 있기에 최근까지 어려운 대목은 또 다른 니체 주석을 펴놓고 씨름하고 있다. 그리고 나름 필자 역시 정리한 것이 이렇다. 대체적으로 보수 기독교에서 공격의 타깃으로 삼은 니체가 이해하고 있는 인간 이해의 수준을 공격의 당사자인 우리는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가에 대한 절절한 반성이 니체 공격 이전에 우리들이 갖추어야 할 예의라고 말이다. 입바른 소리인지는 모르겠지만, 니체 철학을 접한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하는 ‘Übermensch’에 대한 이해에 따라 니체의 해석이 달라진다는 논리 전개에 필자도 동의한다. 인간을 모르고 신학을 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신학이 인간학이라는 불온한 논제에 대하여 치열하게 논쟁하는 것은 차지하더라도 올바른 신학으로의 진입을 위해서는 올바른 인간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두 저자의 지론에 적어도 필자는 박수를 보내고 싶다. 이런 자세로 임하는 신학은 적어도 위기에 직면한 신학을 살리는 갱신의 가능성이 있음을 저자들은 타진한다. 이들은 적어도 필자에게는 신선하게 다가온 화두를 한 개 던졌다. 제 4장에서 제시한 ‘보편성의 도전’이다. “특정 해석이 나에게는 좋거나 참될 수 있겠지만 상대방이나 다른 누군가에게도 반드시 좋거나 참된 것은 아니다. 오늘 나에게 좋거나 참되다고 해서 내일도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p,117) 이 갈파는 대단히 신선했다. 그 동안 신학은 교회를 두둔했다. 동시에 교회가 반드시 해석하고 설명해야 하는 것조차도 불편한 진실을 요구하는 자들의 딴지걸기라고 눈감은 적이 많다. 설상가상으로 신학이 교회만을 위한 시녀처럼 비판적 성찰이 아닌 무조건적 지지 쪽에 기울었던 중대한 과실을 저질렀던 것이 사실이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세인(世認)의 정서는 관심 외였다. 신학이 그렇게 보잘 것이 없었던 것인가? 아니면 스스로 움츠려져 있는 것인가? 신학의 갱신은 보편타당함으로의 진입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그 자신감이 있어야 한다. 불편하며 불편한 데로 인정하고 공부하면 된다. 적어도 신학 하는 사람들은 정직하고 솔직해야 한다. 적어도 이런 평가는 받지 말아야 하지 않겠는가! “현대의 수많은 종교 해석이 종교적 진리 주장은 무시하고 종교의 언어, 실천, 의례와 같은 기능에 집중하는 쪽을 선호한다. 심지어 이런 해석은 종교를 외부인에게 유리한 시점에서 기술하려고 하는 경향까지 있다.”(p,120) 과유불급이다. 저자들은 이렇게 반문하며 독자들의 공명을 기대한다. “기독교적으로 분별한다는 것은 무엇보다 성경에 기록된 예수그리스도의 삶과 더불어 과거 현재의 구름같이 허다한 증인들 사이에서 믿음직스럽게 지켜온 그리스도인의 삶을 위한 여러 가능성과도 공명을 이루기를 기대하는 일을 의미할 것이다.” (p,146) 얼마 전, 전 아무개 목사가 매스컴을 이용하여 이렇게 열변을 토하는 것을 들었는데 그 날 밤 난 꿈에서 그에게 뺨을 맞는 악몽을 꾸었던 기억이 있다.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다. “나는 대한민국의 예언자다. 세상에 예언자를 구속시키는 나라가 세상에 또 어기에 있나!” 무식도 정도가 있다, 예언자 나비에 대하여 1도 모르는 자의 소리침을 들으면서 신학을 치열하게 공부하지 않는 자들이 도달하는 천박함 때문에 목사로서 참담했고 비참했다. 저자들은 이 책을 마감하면서 이렇게 썼다. “신학이 다루는 문제는 오직 한 가지, 즉 하나님이라고 말하는 것은 단순하지만 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위한 신학자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존엄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고뇌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소망이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위한 신학자이기는 해도, 하나님의 유익을 위한 신학자는 아닙니다. 하나님은 신학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신학이 필요한 존재는 바로 인간이다. 세상의 생명을 위한 참된 삶을 위한 신학자들이 되자.” (p,230) 왠지 이 글을 읽다가 두 손을 모으고 아멘 해야 할 것 같아 두 손을 모았다. “하나님은 신학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신학이 필요한 존재는 바로 인간이다.”
필자도 공명하며 저자들의 소리에 보폭을 맞추려고 몸부림치는 목사가 되고자 다시 한 번 결기해 본다. 그래도 난 신학을 공부했고, 지금도 공부하는 목사인데 젊은 아이들 말대로 쪽팔림(?)을 당해서야 되겠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