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지은이 | 톰 라이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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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출판사 | 비아토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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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작성일 | 2021-03-03 16:53: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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톰 라이트의 “하나님과 펜데믹”(비아토르, 2020년)를 읽고 오늘(3월 2일)부터 다시 탁구장에 나가 운동을 재개했다. 작년 제 3차 대유행이 시작되면서 중단한지 4개월 만에 운동 중에도 마스크를 절대로 벗지 않을 것을 서약하고 아내를 설득해서 다시 구장에 나가게 되었다. 운동을 하지 못해 몸에 만신창이가 되는 느낌, 그리고 이대로 가다가는 코로나에 걸려 죽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 같은 심리적, 육체적 무기력을 더 이상은 참을 수 없어, 결단하고 운동을 다시 시작하기로 마음먹은 셈이다. 코로나! 정말 내 삶의 많은 것들을 바꿔놓았다. 우리나라도 백신을 맞게 시작했지만, 전문가들에 의하면 금년 겨울까지는 마스크를 벗을 수 없을 것 같다고 진단하는 것을 보면 만 2년 동안 코로나 19의 습격은 지속될 듯싶다. 목사로 살기에 내 개인의 삶은 곧 교회 사역과 맞물려 있다. 소상공인들, 자영업자들이 당하는 고통처럼 목사로 살아가는 내게 코로나 19로 인한 교회가 행하여야 하는 일체의 사역에 대하여 셧-다운을 경험한 지난 14개월은 이론으로 설명할 수 없는 고통의 시간들이었다. 상당히 많은 지성적 그룹의 크리스천 지도자들이 펜데믹으로 인하여 자연발생적으로 변화되어야 할 교회의 체질 변화는 도리어 약이라고 처방전을 내리지만, 현장 목회자들이 아닌 그들의 말은 현장에서 치열한 고투를 벌이고 있는 목회자들에게 어떤 경우에는 잠잠히 있으라고 소리치고 싶은 분노가 목까지 치밀어 올라올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쓰라린 추억이지만 직전 교단에서 사역할 때, 교회에서 처리해야 할 부동산이 있어 유지재단에 등기 되어 있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제반 서류를 요청했다. 일을 신속하게 처리해야 하는 시간적 긴박성이 있는 건이었는데, 총회에서 이것, 저것 토를 달며 늦장을 부리는 졸속행정을 보였다. 시분초를 다투는 로컬의 분위기를 조금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총회와 재단의 관료적인 태도 때문에 정말로 그러고 싶지 않았는데 총회와 유지재단을 들었다 놓은 웃픈 기억이 생생하다. 목사에게 코로나 19로 인해 놓을 수밖에 없었던 목회적인 아딧줄을 내 손으로 끊었을 때, 많이 울었다. 이러고도 내가 목사로 살아야하나! 자책감 때문에 한 동안 심한 우울 증세까지 보였다. 코로나 19는 적어도 나에게는 괴물이자, 옛 뱀과도 같은 존재다. 고통스러운 것은 이 존재는 아직도 활동 중이라는 점이다. 더 심각한 것은 화려한 미사여구로 포장을 했지만, 교회가 코로나 사태가 벌어진 14개월 동안 정치역학적인 구도와 전혀 다르지 않게 진영논리적인 해석을 내놓는 것에 길들여져 있어, 혹여나 펜데믹에 대한 신학적, 목회적인 차원의 글이 눈에 띄어 읽다 손치면 언제나 초록이 동색이라는 분노나 실망감에 빠지게 해 시간 낭비했다는 후회에 땅을 치곤했다. 또 손해를 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이번에는 톰 라이트인데 하는 마음으로 ‘God and the Pandemic’을 손에 들었다. 그리 길지 않은 분량이기에 기대하는 마음으로 독서했다. 제일 먼저 라이트의 서언(prologue)이 마음에 들었다. “이 책의 목적은 펜데믹을 불러일으킨 질문들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한 것도 아니고, 우리가 거기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이나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을 완벽하게 분석한 것도 아니다. 내가 주장하는 바는 마음속에 쉽게 떠오르는 자동적인 반응을 거부해야 한다는 것이다.” (pp,8-9) 실로 그렇다. 톰 라이트의 이 자세가 마음에 들었다. 작년에, 존 맥아더의 서슬이 시퍼런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로서의 코로나 19로 직격탄을 맞았을 때 대단히 불편했다. 그가 주장하는 일방통행식의 심판의 도구로서 인간에게 습격한 코로나 19 강론은 감히 말하지만, 기독교 신앙을 빙자한 폭력에 가까운 압박이었다. 신정론의 차원에서 악의 존재에 대하여 우격다짐으로 주입시키려는 글을 보면서 느꼈던 불편을 그의 글을 읽다가 고스란히 느꼈다. 존 맥아더가 말한 근본주의적인 펜데믹 이해 강요에 타격을 받아서인지 그 다음부터는 이런 종류의 책을 피하려고 했던 것이 사실이다. 월터 브루그만이 쓴 ‘다시 춤추기 시작할 때’를 늦여름 만나서 나름의 치유와 회복이 어느 정도 이루어졌는데, 이후 만난 이 책의 저자가 톰 라이트이기에 그의 균형 잡힌 신학적 지성을 믿고 본서를 연 뒤에 의미 있게 읽었다. 책을 덮으면서 두 단어에 천착했다. 애통과 균형이다. 애통이라 함은 코로나 19의 엄습을 통해서 우리들이 진짜로 주목해야 하는 것은 인간이 그렇게 만들어놓은 창조 세계의 신음에 대한 同痛에서 오는 감정이다. “세상의 신음, 교회의 신음, 교회 안과 세상 안에서 나타는 성령의 신음이다. 나는 이것이 코로나 바이러스 위기를 종말의 표적이나 회개의 요청, 복음 전도의 기회로 해독할 수 있는 하나님이 주신 분명한 메시지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야 하는 궁극적인 대답이라고 생각한다.” (pp,80-81) 가슴에 새겨진 톰 라이트의 직설이 교회가 해야 할 일은 코로나의 원인을 제거하기 위한 첨예한 의과학적인 분석과 연구를 통한 치료 방법론 개발이 아니라 애통이라고 진단한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저자는 계속 이렇게 말한다. “지금 세상이 울고 있다. 교회의 첫 부르심,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부르심은 우는 사람들 사이에 겸허히 자리를 잡는 것이다. 슬픔도 사랑의 일부다. 슬퍼하지 않는 것, 애통하지 않는 것은 사랑이 흘러나오는 가장 내밀한 마음속 같은 장소의 문을 닫아버리는 것이다.”(p,99) 예수께서 나사로의 죽음을 목도하고 애통해 하셨다. 바울이 로마교회에 편지한 글 말미에 남긴 사족은 오늘 한국교회가 지켜가야 할 금언이다.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저자는 책의 끝에 이렇게 적시하고 있다. “창조의 세계와 함께 신음하면서, 성령이 우리 안에서 탄식함으로 새로운 창조세계가 탄생할 수 있도록 비전과 현실을 나란히 붙잡자.” (p,129.) 또 하나의 단어는 균형이다. 톰 라이는 세인트루이스대학의 교수다. 동시에 영국 성공회의 주교이기도 하다. 해서 그는 영국을 덮친 코로나 19의 한 복판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영국 교회의 주류에 속해 있는 성직자다. 그러기에 그는 균형에 초점을 맞춘 것이 분명해 보인다. 영국 성공회는 펜데믹 하에서 교회 문을 닫았다. 이 행동에 대하여 저자는 이렇게 갈무리했다. “이 유행병 시대에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 치유와 소망을 주시기 위해 고통 받고 죽어 가시면서 최전선에 계신다.” (p,120) 이것에 대한 그의 신학적 방점은 이것이었다. 그는 이렇게 영국은 물론, 한국에 있는 교회 예배 사수파에게 도발한다. “교회 건물은 세상을 피하는 도피처가 아니라, 세상으로 나아가는 교두보다. 올바른 ‘성소’ 신학은 공공예배를 드리는 건물을, 하나님의 영광이 온 창조세계를 채우실 때를 미리 보여주는 징표가 되어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가 정기적으로 교회 건물에서 예배하는 살아계신 주님이 교회 건물이라는 눈에 보이는 제약을 넘어서서 온 세상에 치유와 소망을 가져다주시는 모든 방식을 경축해야 한다.” (p,118.) 부인할 수 없는 빼박(?)의 강타다. 이렇게 말하면 발끈할 반대자들을 알았나? 아니, 사실은 그들을 염두 해 둔 멘트가 아니라 너무나 당연한 크리스천 지성으로, 현직 성직자로 결코 착각하면 안 되는 것을 조금은 진보적인 생각의 지도자들에게도 뼈에 새길 경종을 남긴다. “영국교회처럼 교회가 문을 닫은 나라들에서 충분히 이해할만한 이유에서 엉뚱한 신호를 보낼 위험이 있다. 대중의 사고에서 기독교 신앙은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하듯 공적인 삶에는 전혀 자리가 없다는 의미에서 ‘사적인 운동’으로 축소되어 버렸다. 종교의 사유화와 문 닫은 교회가 마치 결탁한 것처럼 보일 것이다. 임시로 공동예배를 중지하고 목회자의 거실에서 송출하는 생방송예배를 드리면서, 우리는 사실 조금은 신비로운 취미를 추구하는 마음이 맞는 집단에 불과하다고 동의하는 실수를 범한다. 이런 문화적 압력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이 위험을 인지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pp,120-121) 예배 자체도 사유화시켜 예배의 본질적인 신학을 호도할 부지기수의 종교인들에게 서슬이 시퍼런 칼날을 들인 댄 저자를 보며 왠지 모를 감사가 흘러넘쳤다. 필자는 천상 현장 목회자다. 저자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예배가 예배 아닌 사적 취미생활로 변질되고 있는 위험스럽기 그지없는 강요된 유배기를 보내고 있지만, 잊지 말 것은 우리 교회가 원래 계획된 용도로 기능할 날이 오도록 기도해야 한다고 못 박고 있다. 이 잡으려고 초가삼간 태운다는 속담에 대하 경성을 알려주는 한 영국 지성인의 발상이다. 필자는 톰 라이트의 접근을 동의한다. 애통함과 균형 잡기는 코로나 정국을 이겨가는 슬기로운 신앙생활의 길라잡이가 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잡시 언급했지만, 월터 브루그만의 ‘다시 춤추기를 시작할 때’를 접하고 이 책을 읽으면 코로나 19시대에 그리스도인과 교회가 어떻게 반응하면서 행동할 것인가를 배우는 의미 있는 공부 시간이 되리라 믿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