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지은이 | 김영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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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출판사 | 복 있는 사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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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작성일 | 2020-01-23 15:48: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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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주년 기념교회에서 거침없이 은퇴한 이재철 목사는 적어도 필자에게는 같은 하늘에서 같은 공기를 마시며 같은 목양의 줄기로 호흡하던 목회의 선배였기에 늘 감사했던 존재다. 해서 섬기는 교회에서 새신자가 들어오면 세인공동체의 멤버십을 함께 일구어 나가는 사역을 위해 함께 나누는 텍스트가 그가 쓴 새신자반, 성숙자반, 사명자반 시리즈다. 적어도 이 책들에게서 느끼는 필자의 소회는 기독교적인 신앙의 체계를 이루는 데에 있어서 대단히 탁월한 교재라는 감흥이다. 이재철 목사께서 은퇴를 한 이후, 일주일에 한 번은 방문하여 선배의 설교를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사라져 너무 아쉽다. 목회가 숨 가쁠 때마다 다시 나를 곧추 세우기 위해 항상 그 분이 강단에서 설파하던 메시지를 통해 위로 받고, 격려 받고, 때론 경책당하면서 무척이나 행복했는데 이제 그 통로가 막혀 너무 아쉽고 아쉽다. 분명한 것은 그는 목회의 보수적인 스펙트럼 안에서 항상 일천한 목회자인 나를 점검해 준 스승이었다는 점이다. 나는 또 한 명의 동역자를 존경한다. 청파교회를 담임하는 김기석 목사다. 그는 여타 일반적인 근본주의적인 색깔을 갖고 있는 목회자들의 관점에서 보면 진보적인 성향을 가진 위험한 목회자라고 색안경을 끼고 보는 동역자다. 허나 필자가 보기에는 그 반대다. 너무 상식적이고, 평범하며, 아픈 한국교회를 위해 날마다 깊은 영적 내공과 인문학적인 소양을 토대로 영적 메스를 대는 참 좋은 선배이자 동역자이기에 말이다. 그래서 필자는 그의 글을 빠짐없이 읽었고, 심지어 2018년에는 ‘시골목사의 김기석 글 톺아보기’(도서출판 동연 간)라는 제하의 그의 글을 북 리뷰한 책까지 출간했다. 필자의 절친 중 한 명은 그래서 필자를 ‘김기석빠’라는 통속의 단어를 쓰며 놀리기까지 한다. 김기석 목사를 필자가 좋아하는 동역자로 선정한 이유는 너무 많지만 그 중에서 두드러진 이유는 감사한 ‘글 벗’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그의 목회적인 성향은 필자에게 이재철 목사가 보수적 관점에서 적지 않은 영향을 준 멘토이듯 진보적 관점에서 나에게 적지 않은 도전과 선한 영향력을 미치게 해준 함께 걸어가는 분명한 동지 중에 한 명이다. 이제 한 명을 더 소개하고자 한다. 지금 이 글을 쓰게 한 장본인이다. 워싱톤 사귐의 교회를 섬기는 김영봉 목사다. 앞서 언급한 두 목회자는 필자하고는 지인의 관계인 데 비해 김영봉 목사는 전혀 모르는 관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 목사는 나에게 대단히 친근한 목회자로 자리 잡고 있다. 필자는 그가 쓴 15여 권의 책 모두를 섭렵했다. 그 중에서 ‘숨어계신 하나님’, ‘바늘귀를 통과한 부자’, ‘세상을 바꾼 한 주간’, ‘사귐의 기도’, ‘가장 위험한 기도, 주기도’,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나 아프다.’, ‘팔레스타인을 걷다’(이상 IVP)와 ‘엄마가 희망입니다.’(포이에마), 그리고 지금 소개하는 ‘나는 왜 믿는가?’는 필자의 서재 책장의 가장 가까운 곳 즉 눈에 잘 보이는 곳에 위치해 있을 정도로 김영봉 목사의 글은 나에게 친근하다. 그의 글을 읽을 느끼는 감동은 행복하게 한다는 점이다. 왜? 그는 균형 잡힌 학자이자 목회자이기 때문이다. 재 강조하지만 김 목사의 글은 균형이 반듯하다. 이렇게 말하면 어떨까! 이재철 목사는 보수, 김기석 목사는 진보, 그런데 김영봉 목사는 그 중간의 중도라고 표현하면 당사자들에게 실례가 될까(?) 싶지만 여하튼 필자는 세 사람을 그렇게 정리하곤 한다. 필자의 세 권의 졸저에서도 밝혔듯이 이재철 목사께서 현역에 있을 때, 일주일 중에 특별한 일이 없으면 언급한 세 명의 목회자 시무하는 교회 사이트에 방문하여 그들의 감동적인 메시지를 들으며 너무 기뻐했다. 설교하는 목사들에게 당면한 가장 심각한 문제는 다른 목회자의 설교 듣기를 싫어한다는 교만함이다. 물론 도무지 들어줄 수 없는 엽기적 수준에 있는 설교들이 비일비재하다. 그러기에 타 목회자의 설교는 어쩔 수 없이 취사선택할 수밖에 없는데 이런 염려를 일거에 날려버리는 설교자들이 언급한 세 목회자들이다. 적어도 그들의 설교를 들으면 수지맞는 장사(?)를 할 수 있다. 그래서 설교하는 목사로서 설교를 듣게 해 주는 목사들이 있어서 너무 행복했다. 작년에 출간한 김영봉 목사의 ‘나는 왜 믿는가?’(복 있는 사람)는 21세기의 관점에서 볼 때, 대단히 촌스러운 전도학 교과서 같은 느낌이 드는 책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복음을 믿기로 결심한 첫 걸음의 초신자들 그리고 그 믿음의 길에 들어설 것인가, 말 것인가에 대해 혼돈스러워하는 기신자들에 대하여 저자 스스로가 공부하고 체휼한 교리적인 교통정리를 해준다고 할까 싶은 내용들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총 14개의 chapter 로 이루어져 있는 본서를 읽다가 아주 조심스럽지만 이런 생각이 들었다. 먹힐까! 유감스럽지만 아직도 이런 고리타분한 교리를 말하고 있는 글들을 읽는 사람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고지식한 내용이 담겨 있다. 신론, 구원론이라고 정의할 수 있는 그만이 갖고 있는 고지식한 교리 강의를 따라가다 보면 필자 같은 목사야 마땅히 공감대를 형성하는 내용들에 대하여 박수를 보내겠지만, 포스트모던을 넘어 포스트휴먼 그리고 트랜스휴먼을 운운하는 시대에 김 목사의 글이 얼마나 효과를 낼 수 있을지 미지수라는 생각을 갖고 읽었다. 2020년 설 명절의 트렌드가 이 문장이라는 인터넷 뉴스를 보았다.“90년생 며느리들의 말, 어머니, 이번 설 명절에는 친정 갈게요.” 이 글 말미에 수없이 많은 반론과 지지의 글이 댓글로 달렸다. 이 기사에 대한 호불호를 가리자고 소개한 것이 아니라 이 정서가 대세인 시대인데 김영봉 목사의 고리타분한 교리적 매뉴얼의 글이 왠지 힘겨워보였기 때문에 목사인 필자부터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럼에도 김 목사의 글을 읽고 리뷰를 쓰기로 마음먹은 이유는 chapter 3 때문이다. “지금 여기서, 어떻게 구원의 삶을 살 것인가?” 이 문장 자체가 얼마나 위험한 발상인가? 싶은 것은 저자의 객설이 틀려서가 아니라 이 지적을 순전하게 받아들이는 교회 공동체가 과연 얼마나 될까에 천착했기 때문이다. “복음적인 삶에 대하여 배우고 연습하는 것, 세상을 뒤집어 보고 거꾸로 사는 일을 서로 배우고 서로에게 실습하는 것”(p,282)에 우리는 얼마나 열려 있을까? 나는 얼마나 열려 있으며, 내 사랑하는 교회는 얼마나 열려 있을까! “교회의 실력은 무엇이고, 교회의 자랑은 무엇인가? 만일 교인 수, 교회 건물, 교회 재정을 자랑하다면, 그 사람은 아직 세상을 뒤집어 보지 못한 사람이며, 복음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사람이다. 교회의 유일한 자랑은 그 안에 얼마나 복음이 실현되고 있는가, 교회에서 세상과 다른 가치관과 원리가 얼마나 실천되고 있는가가 되어야 한다.”(p,285) 내가 섬기고 있는 세인교회를 향하여 필자는 아래의 글로 사자후를 발하는 것 같아, 이 구절은 세인 강단에서도 인용하며 새겼다. “하나님 나라를 보기 위해 어디로 가야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선 자리에서 마음의 눈을 뜨면 보이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다.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할 때까지 우리는 그렇게 하나님 나라를 보면서 이 땅의 나라를 살아가는 것이다.”(pp,306-307) 저자의 균형 잡힌 이러한 신학적 성찰에 뜨거운 박수를 보낸다. 필자가 섬기는 세인 교회의 금년 표어를 ‘성령이 기름 부으시는 지성적인 교회’라고 정했다. 적어도 제천에 이런 교회를 만들어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표어를 새우고 나니 부연해야 할 여백이 보였다. 혹여 어떤 이가 ‘지성적인 교회’라는 어군에 불편함을 느끼는 것을 인지했기 때문이다. 왠지 지성이라는 단어는 영성을 억누르는 의미가 있다고 세뇌되어 있는 자들이 보였기 때문이다. 이제는 아주 희미하게 남아 있는 직전 교회에서 시무할 때의 웃지 못 할 에피소드가 있다. 교회의 터주 대감으로 살던 책 한 권을 읽은 용감한 자가 있었다. 어는 날 그가 필자에게 찾아와 혈기 왕성하게 이렇게 공격했다. “목사님, 똑똑한 목사들은 목회를 못해요. 목사가 성령이 충만해야지 똑똑하면 되겠어요!” 지금 생각을 해도 그 치가 말한 내용이 얼마나 가학적인 공격인지 소름이 끼친다. 그때 그에게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주께서 종교지도자들이 트집 잡기 위해 무언가를 밝힐 것을 요구할 때, 반응하신 방법이 침묵하신 것이었다. 왜? 대꾸할 가치를 느끼지 못하셨기에 말이다. 그때는 대꾸할 가치를 느끼지 못해 묵묵부답했지만 이제는 그래도 이렇게 말을 해야 할 것 같다. “아무개여! 성령이 충만한 게 똑똑한 겁니다.” 교회가 지성을 무시할 때, 얼마나 천박해지며, 비상식화 되는 지를 필자는 15여 전에 절감했다. 반대로 지성적인 믿음은 결코 나를 천박하게 하지 않는다. 그리고 나를 상식이 있는 그리스도인으로 만든다. 필자는 이 책에서 무조건적인 오직 믿음주의를 제창하지 않는다. 적어도 지성적인 믿음을 요구한다. 중요한 것은 이 요구가 이 책을 읽는 자에게만 요구되는 시급한 요청이 아니라는 점이다. 적어도 필자에게도, 내 사랑하는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성도들에게도 공히 절실하게 요구되는 간절한 외침이다. 필자는 한국교회가 천박해지지 않기를 소망한다. 주의 말씀에 민감한 경청과 지성적 성찰이라는 수고를 배태하는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래야, 하나님, 까불면 나한테 혼나! 라고 말하는 정신병자가 사라진다. 존경하는 신학교 선배이지 조직신학자인 이신건 박사가 교회를 이렇게 일갈하며 정의했는데 동의하며 적극적인 지지를 보냈다. “교회는 아무에게나 인지될 수 있는 실체가 아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믿는 자들의 공동체로서 오직 믿음에 의해서만 인지되고, 성령의 활동 가운데서 일어나기 때문이다.”(이신건, “조직신학(제 1권)”,신앙과 지성사,2018년,p,253) 나는 성령이 기름 부으시는 지성이 있는 교회가 한국교회가 되기를 소망한다. 이 은혜를 알고 체감하기를 원하는 동역자들에게 김영봉 목사의 본 서를 추천한다. 행복한 설 명절이기에 모두가 고향을 향해 가지만 팔자가 교회를 지켜야 하는 목사이기에 오늘도 교회 서재에 앉아서 책읽기로 분풀이 하는 세인지기 이강덕 목사가 조잘거렸다. 2020년 1월 23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