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함께

제목눈뜬 자들의 영성2024-06-11 09:50
작성자 Level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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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지은이 크리스토퍼 휴어츠
ㆍ출판사 IVP
ㆍ작성일 2020-01-29 12:16:04

 

크리스토퍼 휴어츠의 “눈뜬 자들의 영성”(IVP 간)을 읽고


김기석 목사의 초창기 글인 ‘길은 사람에게로 향한다.’를 읽다가 인용된 언론인권센터 대외 협력 위원장인 문한별씨의 다음의 글을 만났다.(p,36)

눈뜨고 기도하라
당신은 기도하는가?
이라크 땅 팔루자에서 무고한 주검들이 나뒹구는데
눈감고 기도할 마음이 나는가?
당신은 찬양하는가?
이라크 땅 팔루자에서 비명소리 하늘을 찌르는데
화음 맞춰 찬양할 마음이 나는가?
야만의 시대에
눈감고 기도하는 건 비겁니다. 기만이다.
불의한 시대에
화음으로 찬양하는 건 동조다. 묵인이다.
그대여, 기도하려거든
차라리 눈을 떠라.
죽어가는 형제자매가 저기 있지 않은가.
그대여 찬양하려거든
차라리 외론 목소리로 진혼가를 불러라.
저기 당신의 파트너가 죽어가고 있지 않은가

눈뜨고 기도하라는 시 저자의 절규는 강력한 소리였지만 평자에게는 소리가 아닌 엄청난 무게의 타격으로 다가왔던 기억이 생생하다.
2011, 5, 6일, 이 글을 만난 흔적이 내 책에 있는 걸 보면 이제 거의 9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강대국만이 휘두를 수 있는 힘의 논리, 자국 우선주의라는 신종 민족주의에 빠져서 이타성이라는 것은 한 낱 신기루에 불과한 약한 자들의 항변 정도로 폄훼하는 기류가 지금 전 세계를 강타하고 있다. 해서 세계의 최강국으로 자부하는 나라의 대통령은 우리 세대를 희생시키지 말하는 17세 소녀(툰베리)의 호소를 무참히 짓밟는 야수가 되어 버린 시대가 오늘이다. 그래서 그런가 평자는 작금의 시대를 신 사사시대라고 정의하는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는다.  사사 시대의 영적 기상도를 신명기 사가가 이렇게 기록했다.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삿 21:25)
백번을 양보하여 세속적 가치는 원래 그랬으니까 그렇다 치자. 사정이 이 지경인데 교회는 어떤가? 아니 조금 더 근접하다.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가지고 살아간다고 선포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입장은 어떤가? 다른가? 구별되어 있는가? 세속적인 가치에 맞서 싸우는 카운터파트의 역할을 적절하게 감당하고 있는가?
호주 몰링 대학교의 선교학 교수인 마이클 프로스트가 이렇게 말한 것을 내 기억의 창고 안에 저장해 두었던 적이 있다.
“이 세상 안에 있으나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 것이 의미하는 바는 많은 사람이 찾지 않는 길로 걸어가는데 지속적으로 헌신하는 것이다.”(마이클 프로스트, “위험한 교회”,SFC 간,p,445.)
‘많은 사람이 찾지 않는 길로 걸어가기’가 교회의 역할이요, 성도가 걸어가는 길이다. 그런데 기독교라는 이름의 범주 안에 있는 일체의 존재들이 정말 이 길을 걷고 있는가!
크리스토퍼 휴어츠는 ‘눈뜬 자들의 영성’에서 나름 예수를 잘 믿는다고 떠벌이는 자들에게 비수 하나를 꽂는다. 평자인 나도 맞았다. 맞아서 아팠지만 새겼고 또 새겼다. 해서 나의 심비에 붙임이 된 글이 있다. 헨리 나우웬의 예리한 통찰을 인용한 글이다.(나우웬이 제시한 이 세 가지 거짓말에 대한 고찰은 ‘수정교회 미니스티리’의 1992년 텔레비전 방송인 〈능력의 시간〉에서 그가 전했던 메시지에 기반한 것임을 휴어츠가 밝혔다.) 그는 나와 너의 정체성을 수용하는 것을 방해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너무 쉽게 착각하는 세 가지의 속임수가 있다고 갈파했다.(pp,75-80)
① ‘내가 가진 것이 곧 나’라는 거짓말.
② ‘내가 듣는 평가가 곧 나’라는 거짓말.
③ ‘내가 하는 일이 곧 나’라는 거짓말.
기막힌 성찰이다. 냉정한 갈파다. 나우웬의 세 가지 지적에 소스라친 이유는 나 역시 세 가지 중 어느 하나도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에 전적으로 동의했기 때문이다. 저자가 나우웬의 이 글을 인용한 이유는 본말이 전도된 교회 공동체에 대한 냉정한 해석 때문이다. 위에 열거한 세 가지에 대한 평가가 나름의 교회와 개인에게 긍정적인 모드로 해석된다면 참 괜찮은 교회, 그리스도인으로 착각하기 쉽다는 것을 강하게 지적한 것이다.
하지만 나우웬처럼 저자 휴어츠도 이런 겉멋이 든 교회, 무늬만 그리스도인에 대하여 차갑게 비판한다. 그래서 그런지 번영신학이나, 인위론적 교회 성장주의에 함몰되어 있는 자가 이 책을 읽게 되면 대단히 불편할 것이고, 동시에 불온해 보일 것이다. 반면, 적어도 성서가 증언하는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식적으로 따라가는 자가 이 책을 읽는다면 박수를 칠 것이고, 전율하는 감동을 느낄 수 있는 수작이다.
이 책을 추천한 radical discipleship에 서 있는 세인 클레어본은 이렇게 서문에서 이 책의 성격을 규정한다.
“불편한 마음을 위로하고, 편안한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복음, 이 복음이 우리에게는 좋은 소식인 복음이다.”(p,12)
섬기는 교회의 소그룹에 소속된 지체가 나눔 시간에 이렇게 말했다.
“목사님, 저를 비롯한 상당수의 많은 신자들이 한 주간 살면서 많은 일들을 경험합니다. 어떤 성도는 주일에 선포된 말씀을 붙들고 분투하며 산 사람도 있겠지만, 또 어떤 지체들은 말씀과는 전혀 관계없이 영적으로 무감각하게 살면서 세상 사람들과 전혀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살다가 주일에 교회를 나오는 경우가 허다할 것입니다. 물론 전자에게는 위로가 필요하겠지만,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완전히 무시하고 도리어 세상 사람들보다 더 형편없는 랜덤으로 살다가 온 후자의 사람들에게 목회자가 위로를 선포하고, 앞으로 잘 될 것을 선포하는 것을 볼 때마다 저는 대단히 유감스럽고 화가 납니다. 저를 비롯한 이런 성도들에게 말씀은 불편해야 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지체의 나눔을 듣다가 가뜩이나 부담스럽고 까칠한 설교하기로 정평인 난 평자는 적지 않은 위로(?)를 받았다 그리고 감사했다. 이 정신으로 살아가는 지체가 섬기는 교회의 멤버십을 형성하고 있음에 말이다. 다시 세인 클레어본의 말을 복기하자.
‘편안한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복음’을 듣고 싶은가?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은 이 점을 발견하게 된다는 점에서 본 서를 추천한다. 
저자 크리스토퍼 휴어츠는 미국의 보수적이며 복음주의 신학교를 잘 알려진 에즈베리 신학교를 졸업한 전형적인 복음주의권의 목회자이자 신학교 교수를 역임한 이력의 소유자이다. 이력을 밝히는 이유는 그는 영성과 실천적 사역의 괴리를 좁히는 데 최선을 다한 현장 사역자이며 실천신학자이기도 함을 알리기 위해서이다. 특히 저자는 ‘육신이되신말씀’(word made flesh)이라는 선교단체의 디렉터로 사역하면서 책상 머리가 아닌 전 세계의 가난한 자들을 현장에서 돕는 실천적 사역자이기도 하다. 
저자는 이 책에서 다섯 가지의 꼭지를 형성한다. 그 꼭지는 의도적으로 다윗이 가졌던 다섯 개의 물맷돌로 상징화시켰다. 겸손, 공동체, 단순함, 순종, 깨어짐이 그것이다. 조금만 더 부연하자면 이 다섯 가지의 꼭지를 프레임으로 만든 이유를 이렇게 밝힌다.(p,34)
① 자만과 교만의 거인을 쓰러뜨릴 겸손
② 개인주의와 독립주의의 거인을 쓰러뜨릴 공동체
③ 무절제와 과잉의 거인을 쓰러뜨릴 단순함
④ 권력과 통제의 거인을 쓰러뜨릴 순종
⑤ 승리주의와 반항과 저항의 거인을 쓰러뜨릴 깨어짐   
결국 이 다섯 개의 꼭지는 오늘 우리 시대에 교회 공동체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는 자라면 반드시 갖추어야 할 5가지의 물매인데 주목해야 하는 것은 이 다섯 개의 물맷돌은 필요충분조건들로 서로 상호작용한다는 점이다.
“겸손은 목적에 이르는 수단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환대받기 위해서 우리가 통과해야 하는 문이다.”(p,49)
그래서 고대의 한 신비가가 말한 대로 “진정으로 겸손한 자는 완전히 순종하는데 왜냐하면 자신의 의지를 버렸기 때문이다.”(p,53)라는 말에 평자도 동의한다.
교회 공동체가 무엇에 천착해야 하는가?
“자야쿠마르 크리스천이 이렇게 말했다. 가난한 사람에게 돈을 투자하면, 우리는 그들을 구걸하는 사람으로 만듭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프로그램에 투자하면, 그들을 수혜자로 만듭니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들에게 우리의 삶을 투자하면, 그들이 삶을 수확할 것입니다.”(p,97)
헨리 나우웬도 이런 공동체를 참 된 기독교 공동체라고 말하면서 이렇게 피력했다.
“참 된 기독교 공동체가 형성될 때마다 이 세상에는 긍휼이 일어난다.”(pp,101-102)
저자는 단순함을 혁명이라고 표현했다.(p,118) 왜?
“단순함은 우리가 무엇을 쥐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쥐느냐의 문제로 이해되기 때문이다.”(p,121)
이 말을 다시 표현하면 이 말이 된다.
“예수님께 가까이 가면 세상으로부터 멀어지고 단순한 생활을 하게 한다. 이것은 그저 단순함을 위한 단순함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와 우리 서로의 관계를 위한 단순함이다.”(pp,130-131)
그렇다. 내가 가지고 있는 힘을 빼는 작업이 그러므로 곧 단순함이다. 그리고 이 힘을 빼야 비로소 주님께로 가까이 가는 것이다. 그런데 슬픈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교회가 빼야 할 힘을 더욱 강하게 추구한다는 데에 있다.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더욱 견고한 성을 구축하는 것이 외형이요, 크기요, 물질적인 세(勢)요, 교권의 물리력이다. 이렇게 될 때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눈을 감는다. 대 사회적으로. 함께 보듬고 가야할 다른 이들에 대하여. 
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눈을 뜨고 기도해야 하는가?
눈을 떠야 이타적인 영성을 추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눈감고 있음으로 인해 주님이 명하신 삶과는 유리된 피상적 영성에 함몰되어 있다. 중요하게 새기자. 그 껍데기 영성을  벗어 던질 때 우리는 비로소 진정성이 있는 영성을 추구하는 자가 되는 것을 물론, 그 영성으로 인해 진정한 눈 뜬 자의 영성을 갖게 될 것이다. 저자는 이것을 깨어짐(brokenness)이라고 정의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기 위해 내 옥합이 깨져야 함을, 프로스트의 말처럼 많은 사람이 가지 않은 길을 가려면 내 것의 떼어줌이 있어야 함을 저자는 역설한다. 날마다 내 안에서 성찬식이 이루어져 내가 가지고 있는 내 것을 떼어주는 깨짐이 있을 때 나는 온전한 주님의 것이 됨을 휴어츠는 도발한다.
서평을 마치면서 저자가 일갈한 뜨거운 감동의 메아리를 소개해 본다.
“교만이 나를 낮추었다. 겸손은 그리스도께서 내 눈에 뱉으신 침이었다. 그것은 그 분의 마음으로 가는 길을 내게 보여 주시려는 제안이자 시도다.”(pp,197-198)

불편했으면 다행이다. 그렇지 않았으면 유감이다. 지난 주일에 교우들에게 설교를 통해 이렇게 말했다.
“신앙생활이란 편안함이 불편함으로 바꾸어지는 혁명이다. 그 혁명을 살아내기로 한 자들이 크리스티아노스들이다.” 

이렇게 까칠한 목사를 사용하시는 하나님도 참 대단하시다. 그리고 세인 교회 성도들은 더 대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