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지은이 | 라이너 쿤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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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출판사 | 봄날의 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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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작성일 | 2020-02-13 14:35: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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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너 쿤체의 “나와 마주하는 시간”(봄날의 책 간,2019년) 을 읽고 라이너 쿤체의 시집을 들었다. ‘나와 마주하는 시간’을. 일본이 낳은 문학계의 거장 엔도 슈사쿠의 기념 문학관이 있는 나가사키 기념관 돌비에 이렇게 문구가 새겨져 있다고 한다.
“인간은 이렇게 슬픈데, 주여!, 바다가 너무나도 파랗습니다.”
냉전 시대, 동독에서 추방되어 어쩔 수 없어 서독으로 넘어와 작품 활동을 하며 시대가 품고 있는 아픔을 고스란히 글로, 시로 표출했던 쿤체의 시를 읽었다. 이윽고 책을 덮으면서 생각했다.
“파랗고 파랗다 못해 시리도록 시퍼렇다.”
그 ‘시디고 시린 시림’이 내 폐부로 다가왔다.
언젠가 책에서 이런 글을 읽은 적이 있다. ‘The sky is blue.’를 번역할 때 ‘하늘이 푸르다.’고 해석하는 이유는 ‘blue’ 만이 갖고 있는 우울함 때문이라고. 쿤체를 시를 읽다가 행복했지만 하늘이 우울해 보였다고 표현하면 잘못된 평일까! 철새 떼가, 남쪽에서/날아오며/도나우강을 건널 때면, 나는 기다린다/뒤처진 새를/ 그게 어떤 건지, 내가 안다/남들과 발맞출 수 없다는 것/어릴 적부터 내가 안다/ 뒤처진 새가 머리 위로 날아 떠나면/나는 그에게 내 힘을 보낸다.(뒤처진 새 전문,p,17.)
언제나 나와 너의 세상에서 항상 관심의 대상이 되는 부류는 앞서는 자들이다. 반면 배제되는 부류는 뒤처진 아류들이다. 뒤처짐의 대상자들이 무능하다고 평가되었던 것은 조지 오웰이 예견했던 ‘1984’의 통제시대에는 당연한 일이었다. 빅브라더와 그의 추종자들은 정상이 아닌 괴물들이었으니까. 그러나 오늘은 어떤가? 뒤처진 자들의 뒤처짐은 이유가 있다고 사려해 주어야 하는 시대다. 에피소드 하나,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는 지금 생각해보면 아연실색할만한 만행을 저질렀던 아픈 추억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전교 500명 학생들의 매학기 시험 성적을 1등부터 500등까지의 순위로 매겨 수학과 영어 순위 리스트를 교무실에 옆 게시판에 붙이는 폭거를 자행했다. 군사독재정권 시절에나 가능했던 인권유린이자 폭력 중의 폭력이었다. 평자는 영어를 좋아하다보니 성적 리스트의 윗자리에 이름이 적혀 있던 반면, 수학은 중간 바닥을 헤매는 수준 이하의 수치감에 항상 고개를 숙여야 했다. 웃픈 이야기, 어쩌다 교무실에 불려 갈 일이 있으면 수학선생님이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난 그 점수를 받으면 한강에 투신한다.”고 말하면서 머리를 쥐어박았다. 그러면 공교롭게 바로 옆자리에 위치해 있었던 영어선생님이 머리를 감싸주셨다. “선생님, 왜 공부 잘하는 강덕이를 타박합니까?”라고. 이과적인 머리와 문과적인 머리가 같이 우수하면 얼마나 좋겠냐마는 난 그렇지 못했다. 시쳇말로 수학적인 머리가 나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고등학교 시절 타의로 당했던 웃픈 추억을 간직하고 있다. 사람이 뒤처지고 싶어 뒤처진 사람이 얼마나 되랴! 뒤처진 사람의 이유는 다 있다. 그걸 무시하는 행위는 무서운 폭력이다. 며칠 전에 읽은 김기석 목사가 최근 출간한 글에서 이렇게 말한 것에 밑줄 쳤다.
“타자를 판단하는 자리에 서려는 태도를 일러 근본주의라 한다. 모든 근본주의는 기본적으로 폭력적이다.”(김기석, “하나님의 숨을 기다리며”, 꽃자리, 2020년,p,387)
근본주의적인 평가와 판단이 사람을 죽인다. 그래서 근본주의는 경계대상 1호다. 그래서 그랬나, 쿤체는 이렇게 노래했다.
“내가 안다/남들과 발맞출 수 없다는 것/어릴 적부터 내가 안다”
아브라함 요수아 헤셀의 말은 내가 무뎌져 있을 때, 나를 도발해주는 비수로 다가온다.
“하나님을 닮은 모습으로 창조된 사람이 그분을 바로 인식할 수 없음은 얼마나 당황스러운 일인가!”(아브라함 죠수아 헤셀, “누가 사람이냐”, 한국기독교연구소, 2008년,p,144)
이런 절망을 시인은 분명히 알았다.해서 쿤체는 ‘늙어(ALT)’에서 이렇게 하가했다.
땅이 네 얼굴에다 검버섯들을 찍어 주었다/잊지 말라고/네가 그의 것임을/(p,89)
이 시어를 읽다가 앞에 언급한 아브라함 죠수아 헤셀이 다른 책에서 말한 또 다른 기막힌 성찰이 떠올랐다.
“사고의 본질은 발명하는 것이 아니라 발견하는 것이다.” (아브라함 요수아 헤셀, “사람은 혼자가 아니다”, 2019년,p,45)
다시 곱씹자.
“잊지 말라고/네가 그의 것임을”
엄청난 성찰이다. 시인이 이 성찰을 누가 감히 마음대로 할 수 있으랴 싶어 시인에게 고개를 숙였다. 한 편만 더 보자.
멀어버린 내 귓속, 그 안 세상/아득한 곳에서 작은 교회의 종을 쳐준다/시간을 지킬 줄 모르는 교회/그래서, 나도 도무지 모르겠다/늦었나, 이른가?/작은 교회 종, 제 맘대로 울리니/그래도 나는 알지, 종(종) 줄이 누구 손에 쥐여졌는지(“와해” 전문,p,95)
이 시를 읽다가 목사로서 아주 묘한 감정이 양가감정이 스멀댔다.
엉망진창인 교회의 종소리 때문에 나도 도무지 모르겠다는 시 작가의 토설이 왜 이리도 시리고 시리게 다가오는지 가슴 아팠기 때문이다. 오늘 페북을 열었다. 선배가 올린 글을 읽다가 많은 생각이 들었다. 이름만 대면 누군지를 다 아는 대구 출신의 모 유명한 목사께서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의 창궐지가 중국인 이유는 너무 마땅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역설하자 발끈한 글을 올렸다. 선배의 표현은 달랐지만 요는 이것이었다. 그런 해석이 얼마나 천박한 해석인지, 그런 이해가 얼마나 위험한 폭력인지. 선배의 글을 읽은 동년배 지인 목사가 선배의 글에 발끈해서 씨진핑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부정하는 선배를 에둘러 공격했다. 맞는 말이라고. 뒤로 물러서지 않은 그 지인 목사에 대한 선배의 반론이 댓글에 고스란히 담겼다. 선배의 그 댓글이 평자에게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그런 흑백논리식의 심판론 제기에 맞서 선배는 이렇게 지인 목사에게 갈무리했다. 그 갈무리에 나 또한 전적으로 동의했다. “당신과 나도 예외가 아닙니다.” 나는 내 사랑하는 교회가 심판의 주체가 되려고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난 교회가 비상식적인 길에서 돌이켜 정상적인 종을 쳐주는 종지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쿤체의 노래이자 고백처럼 교회가 종을 잘 치지 못해(시간을 잘 지키지 못해) 그 종소리를 바른 삶의 바로미터로 삼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길을 잃어버리는 공범자가 되지 않도록 했으면 좋겠다. 교회가 문을 닫으면 되겠는가! 객설 하나, 종을 누가 쥐고 있을까! 그냥 내 주관으로 해석하기로 했다. 천박한 그리스도인이 아닌 상식적인 그리스도인들이었으면 좋겠다고. 그래야 시인이 감추고 있는 메타포인 시간 맞추어 종을 칠 수 있으니 말이다. 역학자(epidemiologist) 김승섭이 쓴 ‘아픔이 길이 되려면’에서 글을 마무리하면서 던진 외마디가 언제는 나에게 공명되어 남긴다.
“상처를 준 사람은 자신이 한 행동에 대해서 성찰하지 않아요. 하지만 상처 받은 사람은 자신의 경험을 자꾸 되새김질을 하고 그 이유에 대하여 질문해야 해요. 그래서 희망은 언제나 상처받은 사람에게 있어요. 진짜에요.”(김승섭, “아픔이 길이 되려면”, 동아시아, 2018년,pp,304-305)
그래, 아파도 상처받는 쪽에 그냥 서련다. 왜? 희망은 거기서부터 싹트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