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 사역

제목2023년 12월 3일 (첫째 주) 지역 셀 사역2024-04-23 18:05
작성자 Level 10


얼음 깨기 (WELCOME)
내 생애, 가장 따뜻했던 경험이 있으면 말해 보자.  

 
경배와 찬양 (WORSHIP)
● 찬송가 407장 – 구주와 함께 나 죽었으니
● 복음성가: 나의 안에 거하라  

 
말씀읽기와 적용 (WORD)
● 제목: 더더욱 소중한 것
● 본문: 창세기 39:1-6
1) 본문에 기록된 요셉과 보디발에게 임한 복을 열거해 보자.
⓵ 요셉에게 임한 복
⓶ 보디발에게 임한 복  

2) 시편 22:1절의 시인과 십자가상에서 주님이 절규하셨던 외침이 주는 역설적 은혜를 말해 보자.
⓵ 시편 22:1절 – 시인의 절규
⓶ 마태복음 27:46절 – 예수님의 절규  

3) 적용하기
⓵ 영적 무감각의 절망을 토로해 보자.
⓶ 가장 소중한 하나님의 은혜란?
⓷ 임마누엘의 은혜에서 탈락되지 않도록 기도하자.  

 
사역하기 (WORK)

셀 예배 순서

※ 찬양하기 : 찬송가 부르기
※ 얼음 깨기 나누기
※ 찬양하기 : 복음성가 부르기
※ 예배기도 : 맡은 이
※ 말씀 증거와 문제 내용 나누기
※ 적용하기
※ 기도제목 중보하기
※ 헌금 봉헌
※ 헌금 기도: 셀 리더
※ 피선교지 중보하기: 다 같이
※ 폐회 : 주기도문
※ 교제하기

사역 내용

1. 성탄 축하의 밤 행사 참여 및 종목 결정
2. 12월 사역에 최선을 다해 중보하고 참여하기
3. 우리 셀에 속해 있는 임직 대상자을 파악하고 중보하기
4. 새벽송 참여에 누락되는 가정 없도록 독려하기
5. 환우들을 위해 중보하기
6. 담임목사의 목양을 위해 중보하기
  

 
설교요약 (SUMMARY)
본론) 꿈 많던 소년 요셉의 인생이 하루아침이 침몰됐다고 볼 수 있는 애굽 행을 당했음을 창세기 저자가 표현한 것입니다. 하지만 일반적인 이해로 이제 요셉의 인생은 침몰 된 것으로 독자들이 이해할 수 있는 상황을 반전시키는 구절이 이어지는 1절 후반절에서 3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로의 신하 친위대장 애굽 사람 보디발이 그를 그리로 데려간 이스마엘 사람의 손에서 요셉을 사니라 여호와께 서 요셉과 함께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

저자는 요셉이 ‘야라드’ 되어 끌려간 애굽에서 그가 만난 사람이 애굽 정부의 핵심 요직을 맡고 있는 친위대장인 보디발임을 밝힙니다. 보디발의 직책인 ‘친위 대장’을 표준새번역 성경은 ‘경호 대장’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이유는 ‘친위 대장’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가 ‘싸르 핫타빠힘’인데 ‘타빠힘’이라는 단어는 ‘음식을 만들기 위해 짐승을 도살 하다’라는 뜻을 갖고 있는 단어입니다. 결국 왕을 위해 음식을 만드는 자가 바로 ‘타빠힘’입니다. 당시 애굽은 정적 들이 왕을 독살하는 일들이 버젓이 일어나는 살벌한 정국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왕의 음식을 관리하는 직책은 마땅히 왕이 최고로 신뢰하는 이에게 맡기는 중책이었습니다.
주목할 것은 요셉은 자기의 의도와는 전혀 상관없이 애굽이라는 당대 최고의 제국 권력의 상층부에 있는 자의 집 관리를 맡은 집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은 앞으로 요셉의 앞날에 대단히 중요한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암시를 주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이런 세속적 측면에서의 희망적인 여운보다 오늘 설교를 전하고 듣는 우리들이 더더욱 주목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1-2절에 연이어 기록된 바로 이 대목입니다.
“야훼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니라”

결국 요셉이 경험하고 있었던 임마누엘의 복에 우리는 오늘 더 집중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하시는 일로 인해 어떤 결과물이 주어졌습니까? 2절을 다시 음미합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그렇습니다. 요셉과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요셉은 형통한 자가 되었다고 진술합니다. 어디 이뿐입니까? 이어지는 3절을 묵상하겠습니다.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 하게 하심을 보았더라”
요셉을 관리 집사로 임명한 보디발은 야훼 하나님의 일하심을 이방인임에도 불구하고 직접 보게 되는 은혜를 경험하게 되었다고 창세기 저자는 밝히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심으로 인해 요셉이 받게 된 복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본문 4-5절을 읽겠습니다. “요셉이 그의 주인에게 은혜를 입어 섬기매 그가 요셉을 가정 총무로 삼고 자기의 소유를 다 그의 손에 위탁하니 그가 요셉에게 자기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주관하게 한 때부터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친지라”

요셉에게 임한 복은 보디발이 준 신뢰라는 복이었습니다. 보디발이 돈 주고 산 노예를 믿었다는 사실은 엄청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보디발은 자기 가정의 재산상의 일체 일들과 범사의 일까지 요셉에게 위임하는 파격을 단행합니다. 그러자 요셉을 통해 하나님이 일하신 축복의 클라이맥스를 이렇게 보고합니다. 요셉 때문에 보디발의 집과 밭에 하나님의 복이 임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재산상의 복이 임했음을 강력하게 시사한 것입니다. 보디발에게 임한 이런 복과 더불어 노예 신분이었던 요셉은 가히 노예의 직책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복을 받게 되었는데 본문 6절이 알려줍니다.
“주인이 그의 소유를 다 요셉의 손에 위탁하고 자기가 먹는 음식 외에는 간섭하지 아니하였더라 요셉은 용모가 빼어나고 아름다웠더라” 다시 강조하지만 요셉이 받은 복은 주인으로부터 전적인 신뢰라는 혁명적인 사랑을 받게 되었다는 복이었습니다. 우리들이 아주 가끔 드라마라는 매개를 통해서 접하게 되는 왕과 신하의 관계에서는 이런 신뢰의 관계가 형성되는 것을 보곤 하기 때문에 그렇게 생소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관계가 주종관계라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성경이 이렇게 말하지 않았습니까?

에베소서 6:5-9절을 인용해 보겠습니다.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기쁜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는 각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든지 종이나 자유인이나 주께로부터 그대로 받을 줄을 앎이라 상전들아 너희도 그들에게 이와 같이 하고 위협을 그치라 이는 그들과 너희의 상전이 하늘에 계시고 그에게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일이 없는 줄 너희가 앎이라”

에베소 교회에 편지한 바울은 대단히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전합니다. 종들은 눈에 보이는 데에서만 주인에게 충성하지 말고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고 말합니다. 주인들에게는 또 이렇게 말합니다. 종들을 위협하지 말라고 말입니다. 결국 주후 1세기 로마의 속주로 있었던 일체 지역에 팽배했던 분위기는 주종관계가 살벌했다는 점입니다. 그러니 빌레몬의 몸종이었던 오네시모는 주인의 물건을 도적질하고 도망한 신세로 바울은 만난 것이 아니겠습니까? 고대 문화에서 주종관계는 결코 화합될 수 없는 조합이었다는 것을 감안할 때 보디발이 요셉에게 모든 가정사를 전적으로 맡겼다는 창세기 본문의 스토리는 가히 혁명적인 일이 아닐 수 없음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상식적으로, 세속적인 관점에서 이런 말도 안 되는 현상이 벌어진 것은 과연 어디에서 그 이유는 찾을 수 있을까요? 본문을 종합할 때 얻을 수 있는 답이 있습니다.

※ 요셉에게 임했던 임마누엘의 복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1-6절에 두 번, 그러나 창세기 39장 전체에는 무려 4번이나 연속해서 반복적으로 창세기 저자가 기록한 문장은 야훼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하셨다는 표현입니다. (2,3,21,23) 야훼께서 요셉과 함께하신다는 표현을 풀면 이렇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요셉이 걸을 때 같이 걸으셨고,요셉이 일할 때 같이 일하셨고,요셉이 앉아 있을 때는 같이 앉으셨 고, 요셉이 힘들 때 같이 힘들어하셨고, 요셉이 잠잘 때는 같이 옆에 누우셨습니다.”

 하나님의 동행을 알게 됩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소중하며 더더욱 중요한 일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나와 동행하시며 같이 걷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일전에 본인의 책에서 유시민씨가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나는 유전자가 만든 몸에 깃들어 있지만 유전자의 노예는 아니다. 본능을 직시하고 통제하면서 내가 의미 있다고 여기는 행위로 삶의 시간을 채운다. 생각과 감정을 나눌 수 있는 사람들과 교류하면서 가치 있다고 여기는 목표를 추구한다. 살아 있는 마지막 순간까지 삶의 방식을 선택할 권한을 내가 행사하겠다. 유전자, 타인, 사회, 국가, 종교, 신, 그리고 누구 무엇에도 의존하지 않겠다. 창틀을 붙들고 선 채 죽은 그리스인 조르바처럼” (유시민, 『문과 남자의 과학공부』, 128쪽)
무신론자 지식인이 표출한 대단히 매력적이고 멋있어 보이는 삶의 태도이자 양심선언과도 같은 명문입니다.

다른 글 하나 소개하겠습니다.
“예언자는 자청하여 사명을 떠맡지 않는다. 그는 강요당한다. 꼼짝 하지 못하고 그 일을 떠맡는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던 지식의 멍에를 쓰고 그는 다시 그것을 선포하지 않을 수 없음을 깨닫는다.” (아브라함 죠수아 헤셀, 『예언자들』, 삼인, 634쪽)
헤셀의 갈파는 예레미야 20:9절에서 그 절정을 만납니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무신론자 지식인이 도무지 알 수 없는, 하늘이 두 쪽이 나도 느낄 수 없는 압도하는 야훼의 임재 앞에서 속수무 책으로 항복할 수밖에 없게 하는 전율하게 하시는 임마누엘의 현존을 나는 매일 느낍니다. 오늘 새벽 예배를 인도하고 기도하는 시간, 절절하게 기도하는 제목의 끝에 현존하시는 야훼께서 내게 이렇게 조명하시며 말씀해 주셨습니다. “아들아, 네게 주어진 일을 네가 감당할 수 있도록 내가 함께한다.”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소중하며, 더더욱 소중한 것은 하나님이 함께 해주신다는 믿음입니다. 예수께서 이렇게 십자가에서 외치셨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타니” 어떤 교회사학자는 이 외침을 가리켜 이렇게 지적했습니다. “교회 역사상 닥친 두 번째의 위기였다.” 왜 아니 그러겠습니까? 십자가 지심이라는 엄청난 부담에 대해 토로한 솔직한 주님의 고백이었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반대로 주님의 이 외침에서 나는 역설적인 감동을 느낍니다. 엄청난 부담을 느끼신 주님, 할 수만 있다면 이 잔을 내게서 옮겨달라고 소원하셨던 주님이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이 잔을 마셨고, 짊어지셨습니다.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주님은 아버지가 결단한 순간적인 버림에 아파하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나와 함께 하실 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엄연한 사실은 저와 여러분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감동이자 은혜입니다. 요셉과 함께 하셨던 하나님은 오늘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제 2 이사야는 이스라엘 공동체를 향하여 하나님의 신탁을 이렇게 외쳤습니다.

이사야 43:1-2절을 읽습니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 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메시지’ 번역으로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의 메시지를 들어라. 애초에 너, 야곱을 만드신 하나님, 너, 이스라엘을 시작하신 분의 말씀이다. 두려워하지 마라.내가 너를 속량했다.내가 네 이름을 불렀다.너는 내 것이다.네가 길을 잃고 갈팡질팡할 때,내가 함께할 것이다. 네가 물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 가라앉게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사면초가에 처해도, 그것이 네게 막다른 골목이 되지 않으리라. 나는 하나님, 곧 너의 하나님,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 너의 구원자이기 때문이다.”

손택수 시인은 자기의 시에서 아버지에 대한 추억을 이렇게 회상했습니다.
“아버지의 스무 살은 흑백사진, 구겨진 흑백사진 속의 구겨진 느티나무, 둥치에 기대어 있다. 무슨 노랜가를 부르고 있는지 기타를 품고,사진 밖의 어느 먼 곳을 바라보고 있는지 젖은 눈으로,어느 누군가가 언제라도 말없이 기대어 올 것처럼 한쪽으로 비스듬히 누운 느티와 함께 있다.나무는 지친 한 사람을 온전히 받아주기 위하여 그렇게 기울어 간 것이나 아닌지,쓰러질 듯 기울어 가면서도 기울어 가는 둥치를 끌어당기느라 뿌리를 잔뜩 긴장하고 서 있는 것이나 아닌지 그 사람들 등의 굴곡에 가장 알맞은 모습으로 기울어 가기 위하여 한평생을 고단하게 쓰러져 갔을 나무,풍성한 머릿결을 바람에 비다듬고 내가 알 수 없는 노래에 수만의 귀를 쫑긋거리고 있다 구겨지고 구겨진 흑백 속에서도 그 노래 빳빳하게 살아 있다. 언젠가 구겨진 선처럼 내 몸에도 깊은 주름이 패이면, 돌아갈 수 있을까 저 생생한 한 그루 아래로, 돌아가서 당신을 쏙 빼닮았다는 등허리를 아름드리 둥치에 지그시 기대어 볼 수가 있을까 처음 나무는 낯선 나를 의아해하겠지만, 한 줌의 뼈를 품고 지쳐서 돌아온 나를 알아보지 못해 어리둥절해하겠지만, 구겨진 생의 실핏줄마다 새순 같은 초록물이 번지고 몸의 박동음과 물관을 타고 오르는 은지느러미 미끄러운 물소리가 다시 눈 부시게 만나는 한때 나무는 이내 알게 될 것이다, 약간 굽은 내 등의 굴곡을 통해, 무너져 가는 가계를 떠맡은 채 일찌감치 그의 곁을 떠나간 청년 하나를, 그가 꾸다 만 꿈과 슬픔까지를 어쩌면 흑백의 저 푸른 느티나무 아래서 부를 노래하나를 장만하기 위하여 나의 남은 생은 온전히 바쳐져도 좋을는지 모른다. 사진 안에 미쳐 들어오지 못한 어느 먼 곳을 향하여 아버지의 스무살처럼 속절없이 나는 또 그 어느 먼곳을 글썽하게 바라보아야 하겠지만 한줌의 뼈를 뿌려주기 위해,좀 더 멀리 보내주기 위해,제 몸에 돋은 이파리를 쳐서 바람을 불러일으켜 주는 한 그루,바람을 몰고 잠든 가지들을 깨우며 생살 돋듯 살아나는 노래의 그늘 아래서” (손택수, 『호랑이 발자국-아버지와 느티나무』, 창비, 32-34쪽)

결론) 저는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주님은 저와 여러분의 아버지이십니다. 육신의 아버지가 나와 함께 했던 추억들이 아름답고 귀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아버지 하나님의 은혜와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임재는 순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과거, 현재, 미래까지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은혜는 영원합니다. 그러기에 성도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것은 임마누엘의 은혜입니다. 성도가 가장 소중히 여기고 또 여겨야 할 은혜는 임마누엘의 은혜입니다. 성탄의 계절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의 기자는 이렇게 기록했 습니다. 마태복음 1:23절입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 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잊지 마십시오. 더더욱 소중한 것은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복임을. 찬양하고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