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 사역

제목2023년 12월 10일 (둘째 주) 지역 셀 사역2024-04-23 18:05
작성자 Level 10


얼음 깨기 (WELCOME)
내가 최애(最愛)하는 찬송가 혹은 복음성가와 그 이유는?  

 
경배와 찬양 (WORSHIP)
● 찬송가 384장 – 나의 갈 길 다가도록 
● 복음성가: 나 지치고 내 영혼 연약할 때  

 
말씀읽기와 적용 (WORD)
● 제목: 무슨 일을 만나든지
● 본문: 창세기 39:7-23
1) 보디발이 자기가 먹은 음식을 요셉에게 위임하지 않았다는 해석에 대한 두 가지 해석과 설교자의 해석은?
⓵ 첫째 해석
⓶ 둘째 해석
⓷ 설교자의 해석과 근거  

2) 요셉이 보디발 아내의 유혹을 이긴 근원적인 선택과 베드로가 택한 기회주의적인 선택을 비교하라.
⓵ 요셉의 선택
⓶ 베드로의 선택  

3) 적용하기
⓵ 요셉의 선택을 레마화하여 설명해 보자.
⓶ 오늘 설교 제목이 주는 진정한 복의 교훈은?
⓷ 레마를 위해 합심하여 기도하자.  

 
사역하기 (WORK)

셀 예배 순서

※ 찬양하기 : 찬송가 부르기
※ 얼음 깨기 나누기
※ 찬양하기 : 복음성가 부르기
※ 예배기도 : 맡은 이
※ 말씀 증거와 문제 내용 나누기
※ 적용하기
※ 기도제목 중보하기
※ 헌금 봉헌
※ 헌금 기도: 셀 리더
※ 피선교지 중보하기: 다 같이
※ 폐회 : 주기도문
※ 교제하기

사역 내용

1. 성탄 축하의 밤 행사 준비
2. 12월 사역에 최선을 다해 중보하고 참여하기
3. 제16회 사무총회가 은혜롭도록 
4. 송구영신예배에 은혜가 임하도록
5. 환우들을 위해 중보하기
6. 담임목사의 목양을 위해 중보하기
  

 
설교요약 (SUMMARY)
본론) 본문 10절을 읽겠습니다. “여인이 날마다 요셉에게 청하였으나 요셉이 듣지 아니하여 동침하지 아니할뿐더러 함께 있지도 아니하니라” 두 가지 구절에 주목해야 합니다. ‘날마다’라는 시간 부사를 먼저 다루겠습니다. ‘날’이라고 번역한 히브리어 ‘욤’은 우리 인간에게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크로노스’에 해당하는 물리적 시간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창세기 39:10절을 히브리어 원어 성경을 통해 접해 보면 ‘날마다’라는 의미를 ‘욤 욤’이라고 반복해서 기록함으로 크로노스의 시간이 이어지고
있음을 알립니다. 다시 말해 시간의 연속을 말하는 것입니다. 시간의 중단이 없는 상태를 알려줍니다.

  보디발 아내가 요셉에게 요청한 육체적 관계의 집요함은 시간의 중단이 없이 진행되었음을 창세기 저자가 보고한 셈입니다. 신학에서 인간론을 말할 때, 빼놓지 않고 대두되는 내용이 인간이 타락함으로 주어진 죄값으로 파생된 연약성입니다. 인간은 연약한 존재입니다. 예외가 없습니다. 이 말은 누구나 죄에 대해 노출되어 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요셉도 매일반입니다. 요셉의 용모는 준수했습니다. 빼어나게 아름다웠다는 말입니다. (6절) 그의 나이는 그가 형들에게 미움을 받아 메소포타미아 상인들에게 팔릴 때의 나이가 17세였다는 것을 감안할 때 보디발의 집에서 종살이하던 요셉의 나이는 추측건대 대단히 젊은 약관의 나이였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젊은 나이에 있는 사람들 에게 얼마든지 나타날 수 있는 육체적 정욕이 요셉에게도 극에 달해 있는 절정기였기에 날마다 유혹하는 보디발 아내의 성적 유혹에 얼마든지 넘어갈 수 있는 정황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어떻게 이런 절체절명의 위기를 극복 할 수 있었을까요? 10절 하반절 본문이 그 답을 제시해 줍니다.
“동침하지 아니할 뿐더러 함께 있지도 아니하니라” 영어 성경 NLT는 이 대목을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he kept out of her way as much as possible.” “요셉은 할 수 있는 한 그녀의 길에서 멀리 벗어났습니다.”
  대단히 의미심장한 메시지입니다. 보디발 아내의 유혹을 그렇게 이긴 요셉이었지만 현실적인 상황은 녹록하지 않았습니다.  11-15절을 읽어보면 전형적인 뒤집어씌우기의 모습이 그려집니다.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번역으로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요셉이 일을 보러 집으로 들어갔는데, 그날따라 집안에 종들이 아무도 없었다. 그녀가 그의 겉 옷을 붙잡고 말했다. 나와 함께 침실로 가자! 요셉은 그녀의 손에 겉옷을 버려두고 집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녀는 그가 겉옷을 자기 손에 버려두고 뛰쳐나간 것을 알고는,종들을 불러 말했다.이것 좀 봐라,저 히브리 놈이 본색 을 드러내서, 너희 모르게 나를 유혹하려 하는구나. 저놈이 나를 욕보이려 해서 내가 크게 소리를 질렀더니, 내 고함과 비명 소리를 듣고는 이렇게 겉옷을 내 손에 버려두고 밖으로 도망쳤다.”

누명 씌우기의 전형을 보여 주는 대목입니다. 보디발의 아내는 성적 욕구에 대한 해소 대상으로 요셉을 노렸 지만 요셉에게 번번이 거절당한 수모를 악으로 되갚습니다. 일단은 집안사람들이 듣도록 자신이 욕보임을 당할 뻔했음을 외칩니다. 이윽고 자기 남편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가 자신의 행한 행위를 요셉이 행한 것처럼 거짓말을 합니다. 16-18절이 이를 고발합니다. 이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구절 앞에 있습니다. 본문 19-21절을 마저 읽겠 습니다. “그의 주인이 자기 아내가 자기에게 이르기를 당신의 종이 내게 이같이 행하였다 하는 말을 듣고 심히 노한지라 이에 요셉의 주인이 그를 잡아 옥에 가두니 그 옥은 왕의 죄수를 가두는 곳이었더라 요셉이 옥에 갇혔 으나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 간수장에게 은혜를 받게 하시매” 보디발이 아내에게 일어난 일을 거짓으로 보고받은 뒤의 반응이 자못 흥미롭습니다. 보디발의 반응은 두 가지였습니다. ⓵심히 노했다. ⓶요셉을 옥에 가두는 조치를 취했다.

왜 우리 독자들이 보디발의 반응에 주목해야 하는지 설명합니다. 문맥의 흐름을 따라 해석하다 보면 보디발이 분노한 대상은 요셉처럼 느껴집니다. 하지만 20절을 감안하다 보면 대단히 어색해 보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여주인 즉 주인의 아내를 강간하려다 미수에 그친 자에게 내린 처벌이 어색하기 때문입니다. 보디발은 당대 최고의 왕정 제국주의 시대에 막강한 권력을 누리던 인물입니다. 그런 그가 자기 아내를 범하려 했던 파렴치범을 옥에 갇히는 정도로 수습한 것은 대단히 어색한 결정입니다. 이와 같은 강간 범죄자에게 내려진 당시 애굽의 법률로 정해진 형벌은 이렇습니다. “사형, 추방, 코와 귀의 절단, 1,000대의 태장 등등” 무시무시한 징벌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형법적인 법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요셉을 단순히 감옥에 수감 하는 정도로 보디발이 마무리한 것은 이면에 또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추측을 가능하게 합니다.

또 하나의 해석은 문장에 관련된 해석입니다. 히브리어 원문에 따르면 ‘분노했다’라는 히브리어 동사 ‘아프’의 주어가 불분명하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분노했다는 동사의 주어가 확실하지 않다는 점입니다. 이런 정황들을 전제할 때 본문 19-20절에 대한 해석은 이렇게 적용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구약학자의 주석을 하나 소개하겠습니다. “보디발의 격노는 요셉을 향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자기 아내에 대한 반응이었다고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요셉에 대한 보디발의 변함없는 신뢰로 읽을 수 있다. 그래서 구약학자 베스터만은 39장에서 요셉의 침묵을 ‘가장 큰 울림이 있는 장면’이라고 평가했다.”(하경택, “정경적 관점에서 본 창세기 2”, 365-366쪽) 얽힌 실타래가 풀리는 느낌을 주는 해석입니다. 보디발은 자기 아내가 저지른 범죄적 정황을 인지했기에 요셉을 그렇게 끝까지 보호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마무리가 됩니다. 옥에 갇힌 요셉의 정황을 그림으로써 앞으로 요셉의 인생에 펼쳐질 하나님이 계획하신 시나리오를 나름 짐작하게 해줍니다. 22-23절 본문을 마지막으로 읽겠습니다.
“간수장이 옥중 죄수를 다 요셉의 손에 맡기므로 그 제반 사무를 요셉이 처리하고 간수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살펴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

다른 말이나 언어유희가 필요하지 않은 기가 막힌 묘사가 오늘 본문 마지막 절을 통해 보고됩니다. 요셉은 보디발의 집에서 그랬던 것처럼 옥에서 간수장의 신뢰를 받고 그곳에서 일어나는 제반적인 일체 사무적 내용을 관할하는 자리에 서게 되었다고 보고합니다.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떻게 요셉에게 이런 복이 임할 수 있었을까요? 지난주 수요일 설교에 이어 또다시 복기해야 하는 답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하셨기 때문입니다. 요셉이 무슨 일을 만나든지 그 상황에 개의치 않으시고 그와 함께하셨기에 요셉은 승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요셉이 무슨 일을 당하든지 상관없이 승리할 수 있었던 제일의 원인은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하셨기 때문이라는 또 한 번의 확신을 갖게 해주는 본문입니다. 여기까지는 지난주 수요일 설교와 동일합니다. 같은 은혜입니다. 하지만 오늘 수요일 설교는 한 발을 더 내딛겠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하실 수 없게끔 한 요셉의 신앙적 반응입니다. 요셉이 하나님이 감동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 신앙적 반응이 무엇일까요? 저는 그 답을 오늘 새벽예배 시간에 보았던 골로새서 큐티의 문장으로 제시하겠습니다.

※ 땅에 속한 것들과의 결별이었습니다.

골로새서 3:1-2절이 오늘 새벽 큐티의 절정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이 구절에 대한 본문 해설로 ‘생명의 삶 12월호 편집부’에서 이렇게 해제했습니다. “인류 구속을 이루시고 하늘 보좌 우편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삶을 추구해야 하는데 그 삶의 시작은 땅에 속한 것들과의 결별입니다.” (생명의 삶 2023년 12호, 52쪽) 이어 편집부는 한 절 묵상 파트에서 이렇게 게재해 놓았습니다.
“성도가 항상 추구해야 할 것은‘위의 것’입니다.이는 하늘에 계신 분 곧‘예수 그리스도’께 속한 것들을 가리킵 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면 새 생명을 얻고 예수님과 함께하는 삶이 시작됩니다. 이 땅의 것들에 시선을 빼앗기지 않고 열정적으로 예수님만 찾을 때 우리는 예수님을 닮은 사람이 됩니다. 일상에서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예수님 처럼 말하고,예수님처럼 살고,예수님처럼 죽는 일을 열정적으로 추구하는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위의 책 53쪽)

본문으로 돌아갑니다. 다시 10절을 복기하겠습니다. “여인이 날마다 요셉에게 청하였으나 요셉이 듣지 아니하여 동침하지 아니할 뿐더러 함께 있지도 아니하니라” 앞에서 저는 후반절을 영어 성경의 버전으로 읽어드렸습니다. “요셉은 가능한 한 그녀의 길을 멀리 벗어났습니다.” 그녀가 요구했던 길이 무엇이었습니까? ‘땅의 것’이었습니다. 요셉이 행한 일은 무엇입니까? 땅의 것에서 멀리 벗어나는 일이었습니다. 오늘 설교 레마로 정리하면 적절합니다. ‘땅의 것’들과의 결별이었습니다.

설교 준비를 하다가 내게 의미를 주었던 구절이 오버랩이 되어서 떠올랐습니다. 마가복음 14:54절을 읽겠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를 멀찍이 따라 대제사장의 집 뜰 안까지 들어가서 아랫사람들과 함께 앉아 불을 쬐더라” 마가복음 14:27절에서 주님이 행하신 예언이 이러했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이는 기록된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 하였음이니라”
제자들이 예수님을 버린다는 예언이었습니다. 다 흩어지게 될 것이라는 예언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읽은 마가복음 14:54절을 보니 베드로는 주님이 체포되자 다른 제자들이 주님을 버리고 다 버리고 도망갔지만 그가 공언한 것처럼 나는 죽기를 각오하고 주님을 따르겠다고 한 것처럼 가야바의 집으로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따라간 것까지는 참 좋았는데 유감스럽게 슬픈 부사가 하나 14:54절에 첨부되어 있음이 아쉽습니다. ‘멀찍이’ 이 단어는 영적인 시사점을 강하게 주는 단어입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따랐던 것은 분명합니다. 마가복음 14장을 읽다 보면 베드로는 대제사장 가야바의 집 뜰 안까지 따라 들어간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들어가서 어디에 거했고 무엇을 했습니까? 그는 가야바의 집 뜰에 머물렀습니다. 그곳은 가야바의 하속들과 추위를 피해 불을 쬐고 있었던 장소였습니다. 베드로가 목숨을 걸고 지키겠다고 장담한 주님은 가야바의 집 뜰이 아닌 집 내전에 있었습니다.

반면 베드로는 그곳에서 떨어져 있는 집 뜰에서 예수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자로 위장하여 그곳의 상황을 살피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살피고 있었던 장소를 부사로 알려줍니다. 주님이 심문받던 장소와는 따라갈 때처럼 멀리 떨어진 장소였습니다. 따라갈 때도 멀리서, 도착해서 멀리서 방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유진 피터슨은 ‘메시지’ 번역에서 ‘멀리’라는 단어를 기가 막힌 필채로 기록했습니다. “베드로는 안전한 거리를 두고 뒤따라갔다.” 무슨 거리라고요? ‘안전한 거리’입니다. 주님과 안전한 거리를 두고 뒤따라간 베드로가 누구였습니까?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다고 장담했던 주님의 수석 제자였습니다. 요셉은 ‘땅의 것’과의 거리를 멀리했습니다.

반면 베드로는 ‘위의 것’이라고 할 수 있는 주님과의 거리를 멀리했습니다. 기막힌 대조를 통해 우리가 오늘 얻어야 하는 영적 교훈이 있어야 합니다. 위의 것을 추구한 요셉은 하나님이 함께했지만, 땅의 것을 추구한 베드 로는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게 되었습니다. 땅의 것들을 놓지 못하는 삶은 신앙생활의 여정에서 하나님이 주 시는 은혜와 복을 전적으로 받아들이려는 삶이 아니라 적당하게 거리를 두려는 계산하는 종교 생활의 척도일 뿐 입니다. 그런 이들에게 하나님이 함께할 리 만무입니다.

결론) 저는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나의 갈길 다가도록 예수 인도하시니 내 주 안에 있는 긍휼 어찌 의심하리요 믿음으로 사는 자는 하늘 위로 받겠네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 하리라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 하리라”
한국 크리스천들이 너무 애창하는 384장 찬송입니다. 작사가는 화니 크로스바 여사입니다. 화니 제인 크로스비 여사는 태어났을 때 앞을 보지 못하는 시각 장애를 갖고 태어났습니다. 하지만 본인의 고난을 신앙의 힘으로 이기고 엄청난 찬송시를 쓰고 작사했습니다. 우리는 그녀가 쓴 384장의 후렴 부분을 받아들일 때 무당들이 하는 푸닥거리의 일환으로 변질시킬 때가 있습니다. 대단히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화니 크로스비가 작사한 찬송가 384장의 후렴 부분은 무당들의 푸닥거리 주문이 결코 아닙니다. 화니는 후렴 부분을 이렇게 썼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에게 무슨 일이 닥칠지 잘 알고 계시기 때문에 내가 모든 일을 감당할 수 있도록 잘 돕고 행하고 계시는 분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것을 믿기에 나는 그분의 일하심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는 고백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시는 것을 믿고 있는 성도입니까? 그렇다면 영적인 반응이 뒤따라야 하는 증거를 보여야 합니다. 주님과 안전거리를 두지 마십시오. 땅의 것들과 줄타기하지 마십시오.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한다는 것은 무당들이 말로 지껄이는 푸닥거리의 주문이 아닙니다.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하는 복은 땅의 것과 결별하고 위의 것을 추구하는 자들과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복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찬양하고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