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 사역

제목2023년 4월 16일 (째 주) 지역 셀 사역2024-04-23 17:52
작성자 Level 10

 

얼음 깨기 (WELCOME)
여행 중에 경험했던 황당했던 에피소드 나누기  

 
경배와 찬양 (WORSHIP)
● 찬송가: 어디든지 예수 나를  (찬송가 440장)
●  복음성가: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말씀읽기와 적용 (WORD)
● 제목 : 낯선 여행
● 본문 : 창세기 29:1-20
1) 낯선 땅에 도착한 야곱을 위하여 하나님이 미리 예비해 놓으신 것은? (1-9)


  

2) 외삼촌 라반과 조카 야곱이 맺은 노동 계약서의 내용은?
① 노동의 내용
② 품삯의 내용
  

3) 적용하기
⓵ 척박한 땅인 지금 내가 발 딛고 있는 곳에서 경험한 주님의 일하심을 말해보자.
⓶ 소돔과 헤브론의 차이점이 무엇이었는지 말해 보자.
③ 낯선 여행을 하면서 내가 시행해야 하는 삶을 베드로의 말로 갈음해 보자.   

 
사역하기 (WORK)

1. 찬양: 셀 리더 교육 시간에 정해진 찬양 (복음성가,  찬송가 공히 한 곡 씩)
2. 아이스 브레이크 (얼음 깨기)
3. 기도: 인턴부터 시작하여 주마다 셀 원들이 순서 맡음 (철저하게 기도문을 준비할 것)
4. 나눔: 한 주간의 삶에 대한 나눔을 실시–미리 준비한 지체가 진행, 3-5분을 넘지 않게 한다.
5. 간증: 사역자가 있으면 실시 (없으면 하지 않아도 됨) 
6. 말씀 증거: 수요일 저녁 예배 설교 피드백
7. 적용: 말씀에 비추어 한 주간 살아야 할 내용을 간단하게 제시. 셀 리더 교육 시간에 정해진 지침 진행
8. 중보기도 
⓵ 태신자 섬김에 최선을 다하고 그들에게 성령의 감동이 임하도록
⓶ 셀 원들의 기도 제목을 위한 중보
⓷ 세인 공동체를 위한 중보기도
⓸ 한국교회와 대한민국을 위한 중보기도 
⓹ 맡겨준 태신자를 위하여
9. 치유기도 : 합심치유기도 - 대상자 앞으로 초청
10. 헌금 및 헌금 기도 : 셀 리더
11. 축복기도 : 셀 리더

사역 내용

1. 대 심방 기도로 준비하기
2. 23일 교회 사역을 위해 협조하기
3. 환우들을 위해 중보하기
4. 공 예배드리기 최선을 다할 것
5. 담임목사 목회 승리를 위해 중보하기

  

 
설교요약 (SUMMARY)
본문 1절입니다. “야곱이 길을 떠나 동방 사람의 땅에 이르러” 동방이라는 표현은 요단의 동편 지역이었던 시리아, 북 아라비아 등 가나안의 동쪽 전 지역을 통칭하는 일반적인 표현이라 하란도 그 지역에 속해 있기에 창세기 저자는 ‘동방’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던 것입니다. 야곱이 하란 땅에 들어가서 제일 먼저 이른 곳은 우물가였습니다. 2절에 기록된 우물이라는 단어가 생소하지 않은 것은 야곱이 도착한 지금의 시간으로부터 약 100년 전에 이 우물은 할아버지 아브라함이 자신의 며느리를 구하기 위해 엘리에셀로 추측되는 늙은 종을 하란으로 보냈고, 그 늙은 종이 리브가를 만났던 장소가 바로 이 우물이기에 독자인 우리에게는 낯설지 않은 장소입니다. 다시 말하면 야곱은 지금 하란에 첫 발을 딛고서 100년 전에 어머니 리브가가 가축들에게 물을 먹이기 위해 왔던 바로 그 장소에 도착한 셈입니다.
 
  야곱이 도착했던 우물가에 갔더니 목자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본인들이 기르는 양떼에게 물을 먹이기 위해서  모인 것입니다. 야곱이 그들에게로 가서 그들이 어디서 왔는지를 묻자 하란에서 왔음을 알리자 기다렸다는 듯이 하란에 살고 있는 라반에 대해 묻습니다. 안부를 묻는 야곱에게 목자들은 라반이 잘 있다고 말한 뒤에 마침 라반의 딸이 양을 몰고 오고 있음을 알려줍니다. 바로 100년 전에 엘리에셀이 우연과도 같은 필연으로 리브가를 만났던 것처럼 야곱도 그의 아내가 될 라헬을 그곳에서 만나게 된 것입니다. 지금 야곱, 하란의 목자, 그리고 라헬이 한꺼번에 모인 장소인 우물은 아귀를 돌로 막아 놓았습니다. 

  두 가지 이유에서 돌로 우물의 입구를 막아 놓는데 하나는, 예기치 못한 사고 방지를 위함입니다. 혹시나 사람이나, 들짐승들이 우물에 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공동체 소유인 이 우물에 독극물과 같은 공동체에 해를 끼치는 불순한 자들의 행위를 막기 위함이었습니다. 라헬이 양떼들에게 물을 먹이기 위해 하란의 우물가에 도착했을 때, 아직 우물 아귀의 돌을 옮겨놓지 않은 상태임을 창세기 기자가 보고합니다. 이유는 다음의 행위를 더 극대화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본문 10절을 봅니다. “야곱이 그의 외삼촌 라반의 딸 라헬과 그의 외삼촌의 양을 보고 나아가 우물 아귀에서 돌을 옮기고 외삼촌 라반의 양 떼에게 물을 먹이고”
 
  갑자기 야곱은 도저히 혼자서는 옮길 수 없는 우물을 덮고 있는 돌을 치우고, 라헬의 양들에게 물을 먹였습니다.
그리고는 라헬에게 야곱은 자기가 라헬의 아버지인 라반의 생질이자, 라헬의 고모인 리브가의 아들임을 밝힌 것입니다.
자신의 정체를 밝힌 뒤에 야곱은 동방의 인사법대로 그녀에게 입을 맞추고 소리 내 울었다고 했습니다. 이런 엄청난 일을 당한 라헬은 자기 집으로 달려가 아버지에게 고종사촌인 야곱을 만났다고 알리자 라반이 달려와 야곱을 안고 입 맞추고 자기 집으로 인도하기에 이릅니다. 극적인 만남을 이룬 야곱은 외삼촌에게 자기가 이곳까지 오게 된 자초지종을 말하고 한 달을 머물게 되었음을 본문 1-14절까지 내용이 알려줍니다. 14절까지의 보고에서 우리 독자들은 별  긴장감이 없이 야곱과 라반과 라헬의 만남을 읽게 됩니다.
 
  하지만 여기까지 잠시의 여유가 보이지만, 15-20절까지는 미묘한 긴장감이 보입니다. 15-20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라반이 야곱에게 이르되 네가 비록 내 생질이나 어찌 그저 내 일을 하겠느냐 네 품삯을 어떻게 할지 내게 말하라 라반에게 두 딸이 있으니 언니의 이름은 레아요 아우의 이름은 라헬이라 레아는 시력이 약하고 라헬은 곱고 아리따우니 야곱이 라헬을 더 사랑하므로 대답하되 내가 외삼촌의 작은 딸 라헬을 위하여 외삼촌에게 칠 년을 섬기리이다 라반이 이르되 그를 네게 주는 것이 타인에게 주는 것보다 나으니 나와 함께 있으라 야곱이 라헬을 위하여 칠 년 동안 라반을 섬겼으나 그를 사랑하는 까닭에 칠 년을 며칠 같이 여겼더라“
  우리는 라반의 성품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100년 전에 그가 엘리에셀이 하란에 왔을 때 어떻게 그를 맞이했는지를 이전 강
해를 통해 알고 있습니다. 창세기 24:28-31절을 복기해 볼까요. “소녀가 달려가서 이 일을 어머니 집에 알렸더니 리브가에게 오라버니가 있어 그의 이름은 라반이라 그가 우물로 달려가 그 사람에게 이르러 그의 누이의 코걸이와 그 손의 손목 고리를 보고 또 그의 누이 리브가가 그 사람이 자기에게 이같이 말하더라 함을 듣고 그 사람에게로 나아감이라 그 때에 그가 우물가 낙타 곁에 서 있더라 라반이 이르되 여호와께 복을 받은 자여 들어오소서 어찌 밖에 서 있나이까 내가 방과 낙타의 처소를 준비하였나이다”
    라반이 본 것은 엘리에셀이 아니라 여동생 리브가에게 건넨 코걸이와 손목 고리를 보았습니다. 히브리어 ‘라아’는 탐욕적인
보기를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이런 경력이 있었던 라반은 대단히 물질적인 인물이었기에 100년 후 즈음 자신을 찾아온 야곱에게서도 분명히 이런 기대감을 갖고 있었기에 조카를 받아들였는데, 그에게서 아무 것도 얻지 못했기에 라반의 그의 노동력이라도 차지하겠다는 일념으로 노동 계약을 맺는 장면이 15절입니다. 다시 15절을 봅니다.
“라반이 야곱에게 이르되 네가 비록 내 생질이나 어찌 그저 내 일을 하겠느냐 네 품삯을 어떻게 할지 내게 말하라”
개역개정판 번역은 대단히 긍정적으로 번역되었습니다. “네가 아무리 내 조카지만 공짜로 일을 시키겠느냐?” 하지만 브루스 월키와 같은 신학자는 이 구절을 그 반대로 해석합니다. “네가 내 혈육이라도 되느냐? 공짜로 일하게” (송병현, “엑스포지멘터리 창세기 주석”, p,524) 월키 박사의 해석을 무시할 수 없는 이유는 앞에서 설명한 라반의 탐욕성에 근거합니다. 분명한 것은 야곱이 한 달을 머문 뒤에 고용 계약을 맺었다는 점입니다. 계약서는 이렇게 도식화 할 수 있습니다. 고용인 라반: 품삯을 어떻게 할까? 피고용인 야곱: 7년의 삯으로 라헬을 주십시오. 물론 이 계약은 라반의 계산과 탐욕에 의해 깨지기는 하지만 일단의 계약 조건과 내용이었습니다. 야곱이 라헬을 아내로 달라는 것이 품삯이었습니다. 라반은 속셈이 있었지만 일단은 조카의 말을 수용하기로 합니다. 이제 우리는 창세기 기자를 통해 야곱이 7년이라는 세월 동안 라헬을 아내로 얻기 위한 노동의 내용을 만나게 됩니다. 본문 20절입니다. “야곱이 라헬을 위하여 칠 년 동안 라반을 섬겼으나 그를 사랑하는 까닭에 칠 년을 며칠 같이 여겼더라”
 
  우리는 야곱이 경험한 과정을 통해 중요한 은혜를 공유해 보려고 합니다. 야곱이 밧단아람 즉 하란으로 향하여 길을 떠난 것은 여행이라고 말해도 괜찮습니다. 낯선 곳을 간다는 것에서 그렇습니다. 하지만 앞에 단서를 붙여야 합니다. 행복한 여행이 아니라 낯선 여행이었습니다. 소설가 김영하가 이런 소회를 밝힌 것을 책에서 들은 적이 있습니다. “여행은 영감을 얻기 위해 떠나는 것이 아니라. 익숙한 모든 것에서 멀어지기 위해 떠나는 것이다.”(김소영, “무뎌진 감정이 말을 걸어올 때”, 테라코타”, p111.)
 
  김영하의 말을 적용하다면 야곱은 성공한 여행자이겠지만, 아무리 보아도 야곱은 익숙한 것에서 멀어지기 위한 여행을 떠난 것이 아니라, 자기가 저지른 죄로 인하여 파급된 목숨의 위협을 피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찾아간 하란이었기에 그곳은 낯설고 낯선 곳이 분명합니다. 동시에 외삼촌이라고는 하나 60년이라는 세월을 전혀 다른 공간과 다른 시간에서 살던 사람이었기에 그와의 만남도 낯설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이런 낯선 여행 끝에 도착한  장소와 사람의 만남을 통해 이루어가고 있는 야곱의 전기를 보면서 중요한 교훈들을 만나게 됩니다.

1) 낯선 여행은 삶을 척박하게 합니다.
 
  외삼촌의 집이라고는 하나 철저하게 더부살이를 해야 하는 신세였습니다. 조금 전에 피력했듯이 브루스 월키  교수의 해석대로라면 야곱은 종살이를 해야 하는 신세에 놓이게 된 것입니다. 야곱에게는 다른 피할 출구가 보이지 않습니다. 낯선 여행을 한 야곱의 신세는 말 그대로 척박한 땅에서 해야만 하는 질곡이 그를 기다리고 있는 셈입니다. 그런데 어찌 이런 일이 야곱에게만 있는 일입니까? 우리에게도 매일반인 삶입니다. 쟈크 엘륄이 이렇게 갈파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세상 속에 있어야 하지만, 그렇다고 세상에 매여서는 안 된다.” (쟈크 엘륄,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대장간,p,13.)
 
  그런데 세상은 우리들을 세상에 매여 있게 합니다. 그냥 놔둘 리 없습니다. 이렇게 세상의 논리와 공식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옥좨다보니 우리는 당연히 세상과 타협하며 그 세상의 소리에 무릎을 꿇곤 합니다. 세상과 충돌  하려다 보면 우리는 적지 않은 곤혹을 치러야 하는 각오를 해야 하기에 그렇습니다. 이런 차원에서 세상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당연히 척박한 장소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운명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척박함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척박함 때문에 기가 죽지 말아야 합니다. 척박함에 빌붙지 말아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2) 그 척박함의 한 가운데에 있는 우리들을 위해 하나님이 일하십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다. 야곱이 하란의 우물가에 도착한 것이 우연이었을까요? 그 우물가에 먼저 와 있었던 목자들이 하란 출신이라는 것이 우연이었을까요? 그들이 라반과 이미 알고 있었던 목자들이었다는 것이 우연이었을까요? 마침 그 하란의 우물가로 라헬이 가축에게 물을 먹이려고 그곳에 온 것이 우연이었을까요? 그럴 리가 있습니까? 이 모든 것이 야곱에게 약속하셨던 네가 어디로 가든지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며, 너를 보호할 것이라고 약속하신 하나님이 그 약속을 지키시기 위해 일하신 그 일하심이 바로 이런 일을 가능하게 한 것입니다.
 
  창세기 13:14절을 다시 복기하십시다.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롯이 물이 풍부하고 산천이 우거진 땅인 소돔을 선택하자 아브라함은 척박한 땅인 소돔의 반대 방향으로 길을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반대에 있었던 척박함의 대명사인 헤브론으로 발걸음을 옮기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찾아오셨습니다. 명심할 것이 있습니다. 풍요로운 땅, 소돔에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명심하십시다.
 
  하나님은 척박한 땅, 헤브론으로 아브라함을 찾아오셨다는 것을. 야곱은 오늘 본문 15절 이후, 노동 계약을 마무리하고 나서 불행이 시작됩니다. 삼촌에게 톡톡히 사기를 당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20년을 종살이 아닌 종살이를 합니다. 하지만 야곱은 한 가지의 신념으로 이 고난의 질곡을 이깁니다. 20절입니다. “야곱이 라헬을 위하여 칠 년 동안 라반을 섬겼으나 그를 사랑하는 까닭에 칠 년을 며칠 같이 여겼더라” 척박한 세상에서 우리가 살고 있지만 두려워하거나 힘들어하지 않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 척박한 땅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을 떠나지 않고 일하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야곱이 라헬을 사랑함으로 7년을 며칠로 여겼다는 메시지는 메타포(은유)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야곱이 라헬을 사랑하는 마음과 같을 때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낯선 여행을 하고 있는 중입니다. 빌립보서 3:20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바울은 우리들의 시민권이 하늘에 있다고 했습니다. 왜 우리들의 시민권이 하늘에 있습니까? 바울이 말한 말에 대한 확답을 공교롭게 베드로가 합니다.
베드로전서 2:11절을 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베드로는 주후 60년대 로마 근교에 살고 있던 그리스도인들을 향하여 그들의 정체성을 두 가지로 정의했습니다.
  ‘거류민과 나그네’입니다. ‘거류민과 나그네’라면 우리들은 이곳이 고향인 사람들이 아닙니다. 동양선교교회를 담임했던 박광철 목사의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본향을 향하여 나아가는 나그네들은 세상 사람들과 4가지가 달라야 합니다.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기에 국적이 다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성도이고 구별된 백성이기에 언어도 다릅니다. 삶의 방식도 달라야 합니다. 외모도 다릅니다. 그러기에 제어할 것을 제어하는 살을 살아야 하며, 삼갈 것이 있으면 적극적으로 절제해야 합니다.”(박광철, “광야에서도 노래할 수 있습니다.” 생명의 말씀사, pp,145-152.)
 
  이렇게 살아가는 당신의 백성들을 위해 하나님은 척박한 지금 이곳에서 일하십니다. 우리는 지금 낯선 여행을 떠나 여러 가지 위험과 난관에 봉착했던 야곱처럼,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가 낯선 여행 중에 있는 자들입니다. 그게 성도이기에 말입니다. 하지만 오늘 말씀처럼 하란에서 야곱과 함께 하셨던 하나님을 기억하며 우리도 그 하나님을 의지하고 척박한 내 삶의 영역에서 굴하지 않고 승리하는 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찬송하고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