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 사역

제목2023년 4월 23일 (넷째 주) 지역 셀 사역2024-04-23 17:52
작성자 Level 10


얼음 깨기 (WELCOME)
내가 누군가를 사랑했던 일화 소개하기  

 
경배와 찬양 (WORSHIP)
● 찬송가: 293장 - 주의 사랑 비칠 때에
●  복음성가: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말씀읽기와 적용 (WORD)
● 제목 :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
● 본문 : 창세기 29:20-30
1) 야곱과 라반이 맺은 노동계약이 파기된 이유와 또 다른 계약의 내용에 대해 설명해 보자.
① 파기된 이유
② 또 다른 계약의 내용  

2) 야곱이 분노하는 마음이 있었지만 이길 수 있었던 이유는?
① 첫 7년
② 후 7년
③ 종합하면 무엇이었나?  

3) 적용하기
⓵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는 감동에 대해 내가 반응해야 할 것은?
⓶ 둘째 아들에게 새 신발을 신겨준 것과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은혜를 접목해 보자.
③ 부활주일 이후 세 번째 주간, 구체적으로 사랑 나누기를 실천해 보자.  

 
사역하기 (WORK)

1. 찬양: 셀 리더 교육 시간에 정해진 찬양 (복음성가, 찬송가 공히 한 곡 씩)
2. 아이스 브레이크 (얼음 깨기)
3. 기도: 인턴부터 시작하여 주마다 셀 원들이 순서 맡음 (철저하게 기도문을 준비할 것)
4. 나눔: 한 주간의 삶에 대한 나눔을 실시–미리 준비한 지체가 진행, 3-5분을 넘지 않게 한다.
5. 간증: 사역자가 있으면 실시 (없으면 하지 않아도 됨) 
6. 말씀 증거: 수요일 저녁 예배 설교 피드백
7. 적용: 말씀에 비추어 한 주간 살아야 할 내용을 간단하게 제시. 셀 리더 교육 시간에 정해진 지침 진행
8. 중보기도 
⓵ 선포된 태신자 섬김을 매뉴얼에 맞추어 신실하게 실천하기 (5주 사역)
⓶ 5월 28일 성령강림주일에 내 셀에서 구원 받는 자들이 나오도록
⓷ 세인 공동체가 2023년 구체적으로 부흥하도록
④ 오늘 음식 바자회 적극적 참여 독려
9. 치유기도 : 합심치유기도 - 대상자 앞으로 초청
10. 헌금 및 헌금 기도 : 셀 리더
11. 축복기도 : 셀 리더

사역 내용

1. 다음 주일(5주) 셀 교제에 대하여 상의하기
2. 셀 궐석신자 심방하고 만나 교제하기
3. 공 예배드리기 최선을 다할 것
4. 담임목사 목회 승리를 위해 중보하기

  

 
설교요약 (SUMMARY)
본론) 우리는 지난 수요일에 야곱이 우여곡절 끝에 외삼촌 라반과 만났음을 확인했습니다. 한 달 여 외삼촌과 동거하며 하란에서 20년 간 지내게 될 야곱의 서막을 나누었습니다. 그렇게 허니문 한 달이 지나자 대단히 계산적인 라반이 야곱에게 노동에 대한 계약을 맺자고 제안했음도 살폈습니다. 29:15절은 해석에 따라 의미가 달라짐을 말씀드렸습니다.
“라반이 야곱에게 이르되 네가 비록 내 생질이나 어찌 그저 내 일을 하겠느냐 네 품삯을 어떻게 할지 내게 말하라”

  개역개정 번역으로 접근하면 라반이 조카 롯에게 대단히 호의를 베푼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조카지만 공짜로 노동을 시킬 수 없기에 상응하는 대가를 지불하겠다는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브루스 월키 교수가 해석한 것처럼 이 구절을 이렇게도 번역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네가 내 혈육이라도 되느냐? 공짜로 일하게” (송병현, “엑스포지멘터리  창세기 주석”, p,524.) 이렇게 접근하면 공짜로 숙식을 제공하지 않겠다는 고용주와 피고용인의 관계로 해석하는 방법이라고 했습니다. 후자를 선택하여 접근할 때, 야곱은 사지로 몰린 것처럼 보입니다. 자기 고향도 아닌 낯설고 낯선 땅에서 누구도 보호막이 되어주지 않는 외로운 처지에 몰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라반 버금가는 계산력에 뛰어난 야곱은 조금도 주눅 들지 않고 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외삼촌의 질문에 답을 합니다. “노동에 대한 월급은 필요 없습니다. 다만 내가 7년 계약을 맺어 종처럼 일할 테니 둘째 딸 라헬을 아내로 주십시오.”(16-18절) 라반의 야곱의 제안을 받고 흔쾌히 수용함으로서 7년이라는 노동계약을 완료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은 야곱이 이제는 라반의 일에 고용된 피고용인 신분으로 어떻게 일했는지를 주저하지 않고 보고해 줍니다.
본문이 시작되는 20절부터 나눕니다. “야곱이 라헬을 위하여 칠 년 동안 라반을 섬겼으나 그를 사랑하는 까닭에 칠 년을  며칠 같이 여겼더라” 이 구절을 묵상하다보면 사랑의 위대함을 발견하게 됩니다. 7년이라는 시간을 며칠로 여길 수 있는 힘은 사랑의 힘이었습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다른 가치를 동원해도 7년을 며칠로 대치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오직 사랑만이 이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야곱은 이런 일념 하나 때문에 7년을 며칠로 여기며 열심히 일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야곱에게 이렇게 일한 보람은 물거품이 되고 맙니다. 열심히 일한 뒤에 야곱은 외삼촌에게 라헬을 요구했습니다. 라반은 결혼식을 열어 줍니다. 잔치를 벌인 것입니다. 그렇게 잔치가 끝나고 밤이 되자 라반은 약속대로 라헬을 데리고 야곱의 처소로 간 것이 아니라 그의 언니인 레아를 데리고 가서 처소에 넣어 줍니다. 야곱을 속인 것입니다. 술에 취해 있는 야곱은 그렇게 레아와 첫날밤을 보냅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그토록 원했던 라헬이 아니라 레아였습니다. 분노한 야곱은 라반에게 약속을 어겼다고 항의를 합니다.

  하지만 돌아온 반응은 싸늘했습니다. 우리 지방에서는 언니보다 아우를 먼저 시집보내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이 법이라고  변명합니다. 그리고 다시 라반이 야곱에게 라헬을 얻기 위한 계약 조건을 겁니다. 본문 27-30절입니다.
“이를 위하여 칠 일을 채우라 우리가 그도 네게 주리니 네가 또 나를 칠 년 동안 섬길지니라 야곱이 그대로 하여 그 칠 일을 채우매 라반이 딸 라헬도 그에게 아내로 주고 라반이 또 그의 여종 빌하를 그의 딸 라헬에게 주어 시녀가 되게 하매 야곱이 또한 라헬에게로 들어갔고 그가 레아보다 라헬을 더 사랑하여 다시 칠 년 동안 라반을 섬겼더라”

  속은 것입니다.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던 야곱은 다시 라헬을 얻기 위해 레아와 결혼식을 치르고 7일 후에 다시 라헬과 결혼식을 치르게 되었음을 보고합니다. 물론 라헬을 아내로 받는 조건은 7년을 다시 노동하는 일이었습니다. 마지막 구절인 30절을 다시 음미하겠습니다. “야곱이 또한 라헬에게로 들어갔고 그가 레아보다 라헬을 더 사랑하여 다시 칠 년 동안 라반을 섬겼더라” 이 구절에서 특히 주목할 단어는 첨가 부사 히브리어 ‘감’입니다.

  우리 성경으로 ‘더’라고 번역한 이 단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야곱이 라헬을 향하여 얼마나 큰 사랑의 마음을 갖고  있는지를 알려줍니다. 종합한다면 야곱은 라헬이라는 사랑하는 여인을 아내로 마지기 위해 총 14년을 노예로 산 것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처음 7년이 며칠 같았던 것처럼 나중 7년 역시 힘이야 들었겠지만 야곱에게 있었던 마음은 한 가지 면에서 동일했을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이상의 본문을 통해 수요예배에 주시는 영적인 은혜를 나누어 보겠습니다.

※ 나는 주님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습니까?

  오늘 설교를 통해 제가 묻고 싶은 것은 여러분이 갖고 있는 주님을 향한 사랑의 강도가 어떤지를 묻고 싶습니다.  주초에 읽은 ‘목사가 목사에게’라는 책에서 이 문장을 보았습니다. “목양실에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 무엇일까요? 나는 티슈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고민을 안고 목회자를 찾아옵니다. 어디서도 울 곳 없는 사람들이 목회자 앞에서 울 수 있다면 그는 소임을 잘 감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박영호, “목사가 목사에게”, IVP, p,141.)

  지난 월요일 성서일과 묵상을 한 내용을 그대로 교우들에게 읽어드리겠습니다. 홈페이지 사랑방에도 링크 되어 있는 글입니다. 제목: 순종하시는 하나님, 이 말도 안 되는 은혜!, 읽은 성서: 사사기 6:40절“그 밤에 하나님이 그대로 행하시니 곧 양털만 마르고 그 주변 땅에는 다 이슬이 있었더라”
 
  묵상 내용
  네 번째 졸저를 내놓았을 때, 독자들 중 한 분이 내게 물었다. 사사기 텍스트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다면 어떤 것이냐고. 주저 없이 말했다. 기드온이 요구한 말도 안 되는 요구에 묵묵히 순종해 주시는 하나님의 모습이었다고. 즉 오늘 성서일과였다. 정말로 충격이자 감동의 극치였다. 기드온을 사사로 부르신 주님의 그 이해할 수 없는 부분도 나에게 적용하면 백골난망의 은혜다. 이것도 엄청난 은혜인데 기드온의 집요한 요구에 하나님은 묵묵히(나는 이 단어가 참 적절하다고 확신한다.) 순종하셨다. “그 밤에 하나님이 그대로 행하시니” 이 문구가 엄청난 감동으로 다가왔다. “순종하시는 하나님” 그래서 이렇게 묵상 제목을 설정했다. “순종하시는 하나님, 이 말도 안 되는 은혜!” 말도 안 되는 이 문장의 행함이 기드온에게 나타났다. 이 은혜를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나는 나를 엄격하게 판단해 볼 때, 정말로 목사의 자격이 1도 없는 자다. 겸손을 가장 교만의 멘트가 아니다. 더 엄격히 말한다면 나를 목사로 부르셔서 목사직을 수행하게 하신 하나님은 정말 많이 손해 보셨을 것이기에 그렇다. 더불어 나 같은 존재를 목사로 사용하시기 위해 얼마나 인내하셨을까 생각하면 유구무언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기드온의 명령(?)에 순종하시는 하나님은 나에게도 하셨다. 그러니 난 주님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 염치없지만 난  이런 하나님이 너무 좋다. 그리고 사랑한다. 

  지난 월요일, 이 묵상을 마치고 기도하면서 많이 울었습니다. 그날 아침, 목양실에 밀려 온 하나님의 은혜는 이론으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만큼 나는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같은 책에서 읽은 김영봉 목사가 목사 아들에게 준 편지의 내용 중 하나, 이런 문장이 있었습니다.
“아들아, 종교 사상가인 아브라함 요수아 헤셀이 ‘당연하게 여기는 것이 영적으로 가장 큰 위험이다.’라고 간파한 적이 있는데, 꼭 기억해야 할 말이라고 생각한다.” (김영봉. “목사가 목사에게”, IVP,p,78)

  적용해 보십시다. 우리들이 줄기차게 듣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시다.”
이 문장에 대해 뭐 당연하지, 하나님은 사랑이시니까! 라고 치부하는 자는 정말 절망적인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 하신다는 이 감격의 메시지를 가슴에 담은 자는 마땅히 민감하게 반응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나도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일전에 다른 설교를 통해 한 번 보았던 그림 하나를 다시 소개합니다. 램브란트가 그린 ‘탕자의 귀환’이라는 명작입니다. 

  주목해 보아야 할 화가의 메시지 중에 둘째 아들의 발을 보십시오. 왼쪽은 벗겨져 있습니다. 또 한쪽은 거의 닳아 반 즈음 벗겨져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둘째 아들의 신발은 전혀 신발의 역할을 하지 못하는 걸레 정도의 신발이었음을 보여줍니다.
헨리 나우웬은 이렇게 이 장면을 해석했습니다.
“샌들 바닥만 보아도 탕자의 여정이 얼마나 길고 수치스러웠는지 단박에 알 수 있습니다. 닳아빠진 신발마저도 벗겨진 왼발에는 상처가 있습니다. 구멍 뚫린 샌들 반만 꿰고 있는 오른발 역시 고통스럽고 비참한 현실을 웅변합니다.” (헨리 나우웬, “탕자의 귀환”, 포이에마,p,78.)

  이런 몰골로 찾아온 둘째 아들에게 아버지는 신발을 새 것을 신기라고 하인들에게 명령합니다. 누가복음 15:22절을 읽겠습니다.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이 구절에서 가장 감동으로 다가오는 하명은 “신을 신기라”는 것이었습니다. 신고 있던 신을 벗기고 새 신을 신긴다는 것은 신분의 변화가 새로워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걸인이 된 탕자의 신분을 아들의 신분으로 격상시키는 것을 누가 했습니까?
아버지가 했습니다. 왜 했습니까? 돌아온 아들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당연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아버지가 돌아온 아들을 사랑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이 둘째 아들에게 임한 메시지가 주는 누가복음 15장의 은혜가 무엇입니까? 아버지의 그 사랑이 오늘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사랑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버지의 사랑이 이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오늘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고 있습니까? 아내가 거의 달 반을 목감기로 심하게 고생하고  있습니다. 화요일 새벽에 일어나 있지 못해 밤새 고생했겠구나 싶어 조용히 옷을 차려 입고 조용히 교회로 나왔습니다. 거의 예배가 시작될 즈음에 아내가 예배당에 들어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예배를 마치고 들어가서 자초지종을 물었습니다.
“정말, 몸이 너무 아파 오늘은 새벽예배를 드리지 못할 것 같아 누워있었는데 갑자기 교회 여 집사는 항암주사를 맞고 있는데 누워 있으면 되겠니? 기도해야 되지 않겠니?”

  이 조명을 받고 정신이 번쩍 들어 아픈 몸을 이끌고 나왔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사랑은 타인의 아픔을 나누는 것입니다.
적어도 내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한 것을 인정하고 체휼한다면 나 또한 아픈 자들을 위해 그 아픔을 나누어 갖는 것이    사랑입니다. 야곱이 삼촌에게 사기를 당한 것을 알았을 때, 얼마나 화가 났겠습니까? 7년의 노동계약을 다시 요구할 때 엄청난 분노를 느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야곱이 다시 7년이라는 세월을 삼촌의 집에서 노동한 이유는 간단합니다. 첫 번째 7년은  라헬을  사랑한 까닭으로, 두 번째 칠년은 레아보다 라헬을 더 사랑한 까닭이었습니다.

  결국 야곱의 인내는 라헬을 사랑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아버지가 재산을 탕진하고 돌아온 아들에게 신분의 변화를 다시 격상시킨 이유는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아내가 아픈 몸을 이끌고 새벽예배에 나와 엎드린 것은 섬기는 교회의 자매를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위대한 용기이며, 무기입니다. 사정이 이러니 우리는 오늘 설교 제목에 아멘 해야 할 것입니다.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
 
결론) 저는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요한일서에 기록된 말씀을 보면서 오늘 야곱이 라헬을 사랑한 진의가 매치되어 교우들에게 소개하고 설교를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요한일서 4:10-11절을 보겠습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사랑한 주체는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라고 요한일서 기자는 천명했습니다. 사랑은 하나님이 먼저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당연히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아픔을 당한 자들의 아픔을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야곱이 라헬을 위해 14년이라는 장구한 세월을 며칠로 생각하며 열심히 일했던 것처럼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마음을 갖고 있는 성도는 역시 기쁨으로 아픔을 당한 자들과 함께 그 아픔을 나누는 백성입니다. 나는 우리 교회에서 사랑이 죽음보다 강하다는 것을 믿고 더 깊이 사랑하는 백성들이 많이 배출되기를 소망합니다.

찬양하고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