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 사역

제목2023년 4월 9일 (둘째 주) 지역 셀 사역2024-04-23 17:52
작성자 Level 10

 

얼음 깨기 (WELCOME)
봄비가 올 때 내가 경험했던 아름다운 이야기 나누기  

 
경배와 찬양 (WORSHIP)
● 찬송가: 내 주님 지신 십자가 (찬송가 339장)
●  복음성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씀읽기와 적용 (WORD)
● 제목 : 헌신에는 조건이 없습니다.
● 본문 : 창세기 28:20-22
1) 야곱이 하나님께 걸었던 조건은 무엇이었나?


  

2) 조건대로 이루어주면 행하겠다고 말한 야곱의 서원은?


  

3) 적용하기
⓵ 나는 하나님을 조건으로 믿고 있는 것은 아닌가?
⓶ 조건부 신앙이 위험한 이유는 심도 있게 토론해 보자.
⓷ 고난 주간 승리한 지체의 간증이 있으면 나누어 보자.
  

 
사역하기 (WORK)
1. 찬양: 셀 리더 교육 시간에 정해진 찬양 (복음성가,  찬송가 공히 한 곡 씩)
2. 아이스 브레이크 (얼음 깨기)
3. 기도: 인턴부터 시작하여 주마다 셀 원들이 순서 맡음 (철저하게 기도문을 준비할 것)
4. 나눔: 한 주간의 삶에 대한 나눔을 실시–미리 준비한 지체가 진행, 3-5분을 넘지 않게 한다.
5. 간증: 사역자가 있으면 실시 (없으면 하지 않아도 됨) 
6. 말씀 증거: 수요일 저녁 예배 설교 피드백
7. 적용: 말씀에 비추어 한 주간 살아야 할 내용을 간단하게 제시. 셀 리더 교육 시간에 정해진 지침 진행
8. 중보기도 
⓵ 태신자 섬김에 최선을 다하고 그들에게 성령의 감동이 임하도록
⓶ 셀 원들의 기도 제목을 위한 중보
⓷ 세인 공동체를 위한 중보기도
⓸ 한국교회와 대한민국을 위한 중보기도 
⓹ 맡겨준 태신자를 위하여
9. 치유기도 : 합심치유기도 - 대상자 앞으로 초청
10. 헌금 및 헌금 기도 : 셀 리더
11. 축복기도 : 셀 리더

사역 내용

1. 부활주일(4/9), 가족 모두가 예배에 참석하도록 독려하기 
2. 대 심방 기도로 준비하기
3. 23일 교회 사역을 위해 협조하기
4. 환우들을 위해 중보하기
5. 공 예배드리기 최선을 다할 것
6. 담임목사 목회 승리를 위해 중보하기  

 
설교요약 (SUMMARY)
본론) 야곱은 도망자 신세가 되어 쫓기듯 집에서 나와 직선거리로 약 800KM 정도나 떨어진 목적지를 향해 가던 중, 약 90KM 지점에 위치해 있었던 루스에 도착해서 하루 묵기로 하고 돌베개를 하고 잠이 들었습니다. 바로 그곳으로 야훼 하나님께서 찾아오셔서 할아버지와 아버지에게 약속하신 언약을 확인해 주시며 도망자 야곱에게 적지 않은 격려를 하셨습니다. 창세기 28:15절입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야곱은 감지덕지 그렇게 하나님을 만난 장소에서 자기가 베개를 삼았던 돌을 가져다가 세운 뒤에 기름을 붓고 그곳 이름을 벧엘 즉 하나님의 집이라고 불렀음을 창세기 기자의 서술을 통해 나누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루스를 신성화시킨 뒤에 야곱이 하나님께 드린 서원 약속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본문 21-22절을 읽겠습니다.
“내가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
  이 구절 안을 들여다보면 적어도 세 가지의 서원이 담겨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①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입니다.
② 이 벧엘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입니다.
③ 돌아와 예배할 때 십일조를 드리겠습니다.
  하나씩 추적해 보십시다. 야곱에게 있어서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었다는 고백은 이후 야곱의 행적으로 볼 때 긍정적입니다. 이때부터 그의 인생이 하나님을 더 강력하게 붙드는 인생이 되었으니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 벧엘이 하나님의 집이 되게 할 것이라는 고백은 창세기 35장을 살피면 답이 나옵니다. 야곱이 극적으로 에서와 화해를 하고 숙곳으로 돌아간 뒤에 다시 세겜 성읍에 정착하였다고 창세기 33:17-18절이 증언을 합니다. 문제는 그 세겜 땅에서 히위 족속의 족장이었던 하몰의 아들에게 야곱의 딸 디나가 강간을 당하는 비극을 경험한 것입니다.

  이 사건 이후에 가문의 치욕을 경험했다고 생각했던 야곱의 아들들이 세겜 땅에 살고 있었던 히위 족속들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치밀한 계획을 세웠고, 그 모사는 성공하여 디나의 오빠들인 시므온과 레위가 하몰의 가족들은 물론 그 성읍에 살고 있었던 일체의 남자들을 대량 학살하는 만행을 저지릅니다. 이 일을 경험한 야곱은 망연자실합니다. 그리고 이 사건으로 인해 본인의 가족에게 닥칠 재앙에 대해 염려합니다. 바로 그때 야훼 하나님이 다시 야곱에게 오셔서 이렇게 하명하십니다. 창세기 35:1절입니다.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주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제단을 쌓으라 하신지라”

  이 명령을 받은 야곱은 자신의 무감각을 회개하며 곧바로 하나님 명령에 순종하는 장면이 이어지는 창세기 35:6-7절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야곱과 그와 함께 한 모든 사람이 가나안 땅 루스 곧 벧엘에 이르고 그가 거기서 제단을 쌓고 그 곳을 엘 벧엘이라 불렀으니 이는 그의 형의 낯을 피할 때에 하나님이 거기서 그에게 나타나셨음이더라”
  이렇게 증언 된 35장의 증거를 갖고 학자들은 치열하게 논쟁합니다. 야곱이 하나님께 약속했던 서원의 내용  두 번째를 실천하지 않았다와 실천했다는 의견으로 팽팽히 나뉘어져 논쟁합니다.
  이동원 목사를 비롯한 복음주의권에 있는 보수적인 목회자들은 야곱이 하나님께 드린 두 번째 서원을 실천했다고 해석하지만 저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등 떠밀려 내려간 벧엘에서의 제단 쌓기를 야곱의 능동적인 서원 약속 지키기라고 정의하는 것은 무리가 있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야곱이 두 번째 서원을 잊은 이유에 대해서 설교를 마무리하면서 개진해 보겠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약속의 세 번째 즉 벧엘로 올라가면 십일조를 드리겠다는 서원의 실천은 창세기 35장에 다시 벧엘로 올라간 기사는 물론 성경 어디에도 증언하고 있지 않습니다. 
  결국 세 번째 서원은 지키지 않은 것이 됩니다. 그렇다면 이런 결론을 도출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야곱이 루스에서 드린 세 가지 서원은 큰 그림으로 보면 실패작이었다는 결론입니다. 왜 야곱은 본인을 찾아와 위기에서 극복하게 해 주신 하나님께 드린 서원을 지키지 못한 실패자가 되었을까? 그 결정적인 패착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 그는 조건부 신앙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본문 20-21절 전반절을 살피겠습니다. “야곱이 서원하여 이르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셔서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떡과 입을 옷을 주시어 내가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야곱의 패착은 하나님께 조건을 걸었다는 것입니다. 야곱은 하나님께 세 가지의 요구 조건을 걸었습니다.
① 밧단아람으로 가는 노정을 지켜주시면
② 먹을 떡과 입을 옷을 주시면
③ 후에 평안히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해 주시면
  야곱의 요구 조건을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대단히 도발적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요구가 아니라 압박이었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내용은 신앙의 객체가 신앙의 주체에게 말을 걸어서 압박하는 시소게임이 아닙니다. 신앙은 이해가 되지 않고, 유익이 되지 않는 상황에서도 나에게 신앙의 주체가 행하실 것이 하나님이 나를 위한 프로젝트임을  믿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런데 어찌 이런 신앙의 틀을 신앙의 객체가 바꿀 수 있단 말입니까? 신앙의 객체가 조건을 내건다는 것은 신앙의 주체가 내건 내용을 전면적으로 거부한다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건 신앙이 아닌 흥정이기 때문입니다.

  송병현 교수가 야곱의 서원에 대해 섭섭한 마음을 주석에서 표현했습니다.
“야곱은 하나님께서 약속한 것을 먼저 지킬 때 본인이 서원한 것을 비로소 지키겠다고 한 것이다. 하나님이 먼저 이루지 않으면 야곱의 약속은 무의미 한 것이 된다는 뜻이다.” (엑스포지멘터리 주석-창세기, p,515.)
  다시 강조하지만 신실한 신앙은 하나님과 시소게임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실한 신앙이란 하나님이 일하시는 내용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순종하는 행위입니다. 조건은 믿음의 객체가 믿음의 주체에게 압박하며 요구하는 행위입니다.
  사사 기드온이 왜 실패한 자가 되었습니까? 기드온은 사사로 부름 받을 때 끊임없이 하나님께 조건을 내세웠습니다.
예물을 가지고 올 때까지 기다려 주시면 (삿 6;18) 양털 뭉치에만 이슬을 내려주시면, 양털만 마르게 해주시면 (삿 6:37-40) 입다가 왜 자충수를 둔 미련한 사사가 되었습니까? 하나님께 조건을 걸었기 때문입니다.

  사사기 11:30-31절을 읽겠습니다.
“그가 여호와께 서원하여 이르되 주께서 과연 암몬 자손을 내 손에 넘겨주시면 내가 암몬 자손에게서 평안히 돌아올 때에 누구든지 내 집 문에서 나와서 나를 영접하는 그는 여호와께 돌릴 것이니 내가 그를 번제물로 드리겠나이다 하니라”
  인신제물도 악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는데 거기에다 조건까지 건 입다를 보면서 유구무언일 수밖에 없습니다.  반면 누가복음 15장에 등장하는 둘째 아들을 맞이한 아버지를 살펴보십시다. 누가복음 15:20-24절을 만나보겠습니다.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하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어느 한 구절도 아버지가 아들을 맞이한 이유 중에 조건은 보이지 않습니다. 아버지는 조건을 걸지 않습니다.  조건은 거는 쪽은 도리어 아들 쪽입니다. 저는 오늘 설교 제목을 ‘헌신에는 조건이 없습니다.’라고 정했습니다.  이렇게 다시금 다잡이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조건을 거는 순간, 신앙의 내용과는 등을 돌리는 것이다.

결론) 저는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인간은 그의 삶을 위한 기구와 기술, 생활필수품을 생산하는 방법과  소유를 위한 분배 방법을 바꿀 때 그의 ’신‘까지도 바꾼다.”(하비 콕스, “세속도시”, 문예출판사, 36.)
  20세기의 걸출한 신학자인 하비 콕스의 지적입니다. 나는 오늘 신앙인들의 면면에 드리운 짙은 그림자를 봅니다.
자꾸만 하나님과 세속의 유익들을 비교하며 하나님과 시소게임 하듯 위험하게 진행하는 거래가 엿보인다는 점입니다.
몇 주 전에 부산에 사시는 권사님께서 부산 어묵을 보내셔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인사 전화를 드렸습니다. 보내주신 어묵 너무 감사합니다.  인사를 드렸더니 얼마 전, 구순을 맞이하신 권사님께서 제게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목사님, 보내주신 ‘신 사사시대에 읽는 사사기’를 다 읽었습니다. 읽고 난 뒤에 그 감동이 너무 커서 무언가 인사라도 해야 할 것 같아, 부산에서 나름 유명한 부산 어묵이 생각나서 보내드렸습니다. 목사님, 책의 후반부에 쓰신 ‘흥정해서야 되겠습니까?’(pp,328-332.)를 읽다가 눈물이 났습니다. 정말로 가슴에 새길 수 있는 귀한 말씀 주셔서 너무 감사했습니다.”
  금년 구십을 맞으신 권사님의 전화에서 들려오는 목이 매인 이 소리를 듣고 저자인 저는 그냥 감사 외에 다른 언어가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한정순 권사님께서 읽고 울컥하며 우셨던 제 졸저 pp,328-332에 기록된 내용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앞에서 잠시 언급했던 입다가 서원이라는 명목으로 내 건 가장 비 신앙적인 시소게임 본문입니다.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하나님과 흥정해서야 되겠습니까? 트리니티 복음주의 신학교 교수인 데이빗 라센은 일찍이 이렇게 갈파했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직면한 가장 큰 위기는 교회가 세상 속에 있다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 세상이 있다는 것이다.”(데이빗 라센, “탐욕의 복음을 버려라”, 새물결플러스, 160.p)

  저는 이 챕터에서 라센의 글을 소개한 뒤에 이렇게 글을 썼습니다.
“신 사사시대는 교회 안에 세상에 있으니 교회가 세상의 것들을 탐닉하게 적용하는 것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시대다. 마치 입다처럼 말이다. 오늘날 성도라고 부르는 자들의 가장 큰 위기는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으로 세상의 논리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논리에 지배당한다는 것이다. 우리들이 믿는 하나님과 흥정하려는 자들은  세상의 논리를 가지고 하나님을 다루려는 무서운 범죄자들이다.” (이강덕, “신 사사시대에 읽어야 하는 사사기, 동연, 332-333p) 야곱처럼 하나님께 조건을 걸면 안 됩니다. 이건 헌신이 아니라 흥정이기 때문입니다.

찬양하고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