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 깨기 (WELCOME)절제하기 어려운 것과 상대적으로 절제하기 쉬운 것을 나누어봅시다. | 경배와 찬양 (WORSHOP) ● 찬송가: 어둔 밤 쉬되리니 - 330장 ● 하나님의 은혜 | 말씀읽기와 적용 (WORD)● 제목 : 금하지 못합니다(4). ● 본문 : 갈라디아서 5:22-24 1) 절제를 실천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자기 관리에 철저하다는 것입니다. ⓵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책잡기 위해 논쟁하는 장면에서 발견되는 예수님의 철저한 자기 관리를 설명해 봅시다(참고: 누가복음 20:20-21). |
2) 절제는 영적 집중력을 상실하지 않는 것입니다. ⓵ 바디메오가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준비하는 과정과 예수님을 만났을 때의 반응을 추적해 봅시다. ⓶ 위의 내용을 통해 바디메오의 영적 집중력을 설명해봅시다. |
3) 적용하기 ⓵ 설교에서 전달하고자 하는 중심 메시지는 무엇인가? ⓶ 깨달은 것을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 | 사역하기 (WORK)주간 중보기도
1) 공 예배를 사수하는 세인 교회가 되도록 2) 피선교지를 위하여 (특히 군산 반석교회의 원활한 교회 건축 사역을 위하여) 3) 환우들을 위해 중보 하되 암 투병 중에 있는 황홍일 집사님의 치유를 위하여 4) 재능 기부 사역 2번째 승리를 위해 (9월 28일) 5) 군에 있는 자녀와 대입을 준비하는 학생들을 위하여(이장규, 신요한, 김진현) (이한빛 신예찬 김혜원 정영민 정윤서 우혜민) 6) 담임목사의 사역을 위해 (대학원 강의, 세 번째 책을 통한 문서 선교를 위해)
셀 사역
1) 새벽예배에 리더들 자원함으로 드리기 2) 공 예배 준수하기 3) 셀 원들의 범사 파악하여 중보하기 4) 셀 예배 책임감을 갖고 진정성이 있게 드리기 5) 리더와 인턴을 위해 중보하기 6) 담임목사의 사역을 위해 기도하기 | 설교요약 (SUMMARY)설교 요약 본문 : 갈라디아서 5:22-24 제목 : 금하지 못합니다.(4)
서론) 유진 피터슨은 ‘메시지’에서 성령의 9가지 열매를 정말로 아름다운 언어로 표현했습니다. 사랑: 다른 사람들에 대한 호의, 희락: 풍성한 삶, 화평: 고요함 같은 것들, 인내: 끝까지 견디는 마음, 자비: 긍휼히 여기는 마음, 양선: 사람과 사람 사이에 거룩함이 스며들어 있다는 확신, 충성: 충성스럽게 헌신하는 마음, 온유: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을 강요하지 않는 것. 사람들은 유진 피터슨의 역작인 ‘메시지’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일상으로 쓰여진 성경 옆의 성경” 충분히 공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일상의 언어로 해석한 성경 메시지는 다가오는 감동이 훨씬 더 강한 게 사실입니다. 그래서 ‘메시지’ 번역은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시사 하는 관점이 대단히 고무적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마지막으로 살피게 될 성령의 9번째 열매인 절제를 무엇이라고 일상의 언어로 표현했을까 궁금해집니다.
본론) 유진 피터슨은 절제를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9) 절제: 우리의 에너지를 슬기롭게 모으고 관리할 수 있는 능력 이 단어는 헬라어 단어 ‘엥크레테이아’의 번역입니다. 가장 많이 번역된 우리 성경의 단어는 ‘자기 절제’입니다. 자기 절제라는 것을 실천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자기관리에 철저하다는 것입니다. 성도에게 있어서 자기 관리라는 것이 무엇일까요? 매일 샤워하여 자기 몸을 청결하게 하는 내 몸이 관리일까요? 몸 관리는 그러면 어느 정도는 커버할 수 있겠지만 오늘 본문이 말하는 ‘엥크레테이아’의 관리에는 턱없이 부족한 관리입니다. 또는 식탐을 절제해서 다이어트에 성공하면 자기 관리에 성공하는 것입니까? 물론입니다. 건강을 유지하는 데에 있어서 어느 정도의 자기 관리에 승리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도 ‘엥크레테이아’를 충분히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엥크레테이아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이 설명을 위하여 성경적인 내증을 하나 소개하겠습니다. 누가복음 20장을 보면 맨 처음 바리새파가 주를 이루고 있었던 제사장, 서기관들이 예수의 권위에 시비를 걸고 싸움을 겁니다. 예수님은 이들의 시비를 요한의 세례가 누구로부터 왔는지에 대한 담론으로 방어하심으로 그들을 넉 다운 시키셨습니다. 1:0의 참패를 당한 바리새인들은 뒤로 물러서지 않고 세금 논쟁으로 다시금 예수님을 공격합니다. 이 논쟁에 앞서 그 당시의 분위기를 누가는 이렇게 아주 세밀하게 보고합니다. 누가복음 20:20-21절입니다. “이에 그들이 엿보다가 예수를 총독의 다스림과 권세 아래에 넘기려 하여 정탐들을 보내어 그들로 스스로 의인인 체하며 예수의 말을 책잡게 하니 그들이 물어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바로 말씀하시고 가르치시며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진리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나이다” 결국 종교지도자들의 음모는 하나였음을 누가는 고발합니다. “예수의 책잡기” 예수께서 그들의 책잡기를 분연히 물리치실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예수께서 공생애 3년을 보내시면서 어떤 외압에도 책을 잡히시지 않았던 강력한 이유는 외모에 관심을 두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에 집중하셨기 때문임을 누가는 보고합니다. 성령의 9번째 열매인 절제는 바로 이것입니다. # 영적 집중력을 상실하지 않는 것. 주님은 당신의 공생애 기간 동안 오직 진리였던 하나님의 도 즉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하였기에 그토록 견고한 아성인 산헤드린의 무자비한 공격에서 책잡힐 일을 만드시지 않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이 이 땅에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삶을 살아내시면서 온전하게 집중했던 것은 아버지의 뜻이자, 아버지의 말씀이셨습니다. 다른 어떤 것에 고개를 돌리신 적이 없습니다. 온전히 아버지의 말씀과 뜻에 집중하셨습니다. 그 삶은 철저히 하나님의 아들로서 가야할 길, 지켜야 할 일에 집중하기 위한 자기절제의 힘으로 고스란히 전달되었고, 그 결과 주님은 승리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잘 생각해 보십시다. 주님도 자기절제라는 삶을 살아내시기 위해 집중하셨다면 하물며 우리가 나를 절제하는 삶에서 실패하면 되겠습니까? 절제는 주님을 향하여 집중할 수 없게 하는 일체의 것들과 맞서 싸우는 것이며, 그것들을 내 안에서 제거해 가는 작업입니다. 그래서 절제는 집중력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절제와 관련하여 교우들과 메시지를 나눌 때 항상 제일 먼저 성경의 대표적인 인물로 설명한 사람은 언제나 바디매오입니다. 먼저 본문 마가복음 10:46절에 주목해 주십시오. “그들이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인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길 가에 앉았다가” 주목할 단어가 있습니다. ‘길가에 앉았다가’입니다. 바디매오는 예수께서 여리고를 나갈 때 반드시 길이 하나이기 때문에 유일한 그 길을 통과할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그는 주님이 반드시 통과할 길가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는 말이 됩니다. 여기에서 일이 끝난 것이 아닙니다. 바디매오에게 있어서 또 하나 난관은 주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앞이 보이지 않는 그가 주님을 만난다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했습니다. 그러기에 그가 사전적으로 미리 계획한 것은 청각에 의한 소리 지름이었습니다. 그는 이런 나름의 주님 만나기 프로젝트를 세웠고 드디어 D-day 그 시간에 청각에 집중했습니다. 주님과 함께 벌 떼처럼 몰려다니는 군중들의 아우성과 소리에 최대한 집중했습니다. 가장 소리가 바디매오 본인이 자리를 잡고 있던 그 장소에 가까이 들리기를 기대하던 바디매오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소리를 지른 것입니다. 마가복음 10:47절입니다.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잘 아시는 것처럼 첫 번째의 절규가 제자들의 방해로 무산될 수 있는 최대의 위기를 맛본 바디매오는 집중력을 잃지 않고 다시 소리를 쳤습니다. 그 내용이 마가복음 10:48절입니다.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여러분! 보이십니까? 바디매오가 얼마나 주님께 집중하고 있는지를. 주님이 자기를 부르신다는 전갈을 받은 바디매오의 반응을 나눕시다. 마가복음 10:50절입니다. “맹인이 겉옷을 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오거늘” 구약성경을 보면 거지들이 입고 있었던 겉옷은 그의 전 재산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아무리 채권자라고 해도 거지의 겉옷은 빼앗을 수 없도록 율법에 규정해 놓았습니다(출 22:26절; 신 24:12-13). 왜 마가 기자는 이 대목을 이토록 집중하여 보고했을까? 마가복음 10:50절에 기록된 ‘내버렸다.’라고 번역된 헬라어 ‘아포발로’는 더욱 강한 의미로 해석한다면 ‘완전히 포기하는 것’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왜 바디매오는 이런 과감한 결단을 했습니까? 적어도 이 정도로 집중해야 그는 주님께서 자신의 소원을 이루어주실 것을 믿은 것이며, 동시에 그는 자신의 세속적인 집착에서 해방될 수 있었음을 고백한 것입니다. 마지막 이 기사의 압권을 살핍시다. 주님을 만난 바디매오는 아마도 대단히 감정적으로 뜨거웠을 것입니다. 그리고 거의 흥분 상태였을 것입니다. 바로 그 때, 주님이 그에게 물으셨습니다. 마가복음 10:51절 상반절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이제 그는 절호의 기회가 왔습니다. 그가 그토록 지긋지긋한 걸인의 삶에서 해방될 일생일대 최고의 기회가 왔습니다.그가 무엇을 말하든 주님이 이루어주실 요량입니다. 바디매오에게는 정말로 굿 찬스였습니다. 그런데 바디매오의 영적 집중력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 51절 하반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맹인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이 구절을 해석한 글 중에서 제가 가장 감동적으로 본 해석은 이것이었습니다. “나는 당신을 보기 원합니다.” (I want to see You.) 주님 보기를 원한 바디매오는 자기 절제의 대명사입니다. 그는 성령의 아홉 번째 열매인 ‘엥크레테이아’의 주인공입니다.
결론) 저는 이제 성령의 9가지 열매 해석을 마치려고 합니다. 지난 주간에 안경을 새로 바꾸었습니다. 다 초점 안경을 착용하시고 있는 교우들은 이미 잘 알고 계시겠습니다만 생전 처음 다 초점 안경을 끼고 보니 첫 날 얼마나 당황스러웠는지 모릅니다. 정면에서 조금만 상하가 흔들려도 물체가 다르게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좌우를 볼 때도 직각으로 돌려야지 물체가 잘 보입니다. 책을 볼 때도 각도에 따라 전혀 다른 시력이 나오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안경사 왈, 목사님, 며칠 고생을 하면 익숙해집니다.” 지금 4일이 지났는데 아직도 조금은 불편합니다.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다 초점 안경에 포한되어 있는 렌즈의 성격이 다르기에 거기에 걸 맞는 반응을 내 스스로 보이지 않으면 시력에 난처함을 당하는 것을 사소한 일이지만 경험했습니다. 명심할 것이 있습니다. 주님을 향한 영적 집중력에 소홀하면 저와 여러분의 영적인 시력도 무력해질 것이 분명합니다. 절제라는 성령의 열매는 반드시 내가 하나님께 집중할 때 주어지는 성령의 선물임을 명심하고 집중력에서 탈락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런 측면에서 오늘 본문 마지막 절은 정답 중의 정답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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