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 사역

제목2019년 9월 15일 (셋째 주) 지역 셀 사역2024-04-23 17:02
작성자 Level 10


얼음 깨기 (WELCOME)
당신은 “이런 점은 남보다 내가 더 낫다”라고 때때로 생각하는 것이 있나요?  

 
경배와 찬양 (WORSHOP)
● 찬송가: 겸손히 주를 섬길 때 - 212장
● 주 임재 안에서
  

 
말씀읽기와 적용 (WORD)
● 제목 : 성령으로 행할지니
● 본문 : 갈라디아서 5:25-26
1) 우리의 삶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기 위해서는 성령으로 행해야 합니다.
⓵ 성령으로 행하는 것은 무엇입니까?(26절 전반절)
⓶ 성령으로 행하지 않은 결과는 무엇입니까?  

2) ‘헛된 영광을 구하지 않는 삶’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찾아봅시다.
⓵ 톰 라이트는 어떻게 표현하고 있습니까?
⓶ 유진 피터슨은 어떻게 표현하고 있습니까?
➂ ‘헛된 영광을 구하지 않는 삶’의 하나의 예(행 13:1)와 그 결과(행 13:2-3)을 설명해봅시다.  

3) 적용하기
⓵ 설교에서 전달하고자 하는 중심 메시지는 무엇인가?
⓶ 깨달은 것을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  

 
사역하기 (WORK)
주간 중보기도

1) 공 예배를 사수하는 세인 교회가 되도록 
2) 피선교지를 위하여 (특히 군산 반석교회의 원활한 교회 건축 사역을 위하여)
3) 환우들을 위해 중보 하되 암 투병 중에 있는 황홍일 집사님의 치유를 위하여
4) 재능 기부 사역 2번째 승리를 위해 (9월 28일)
5) 군에 있는 자녀와 대입을 준비하는 학생들을 위하여
  (이장규, 신요한, 김진현) (이한빛 신예찬 김혜원 정영민 정윤서 우혜민)
6) 담임목사의 사역을 위해 (대학원 강의, 세 번째 책을 통한 문서 선교를 위해)


셀 사역

1) 새벽예배에 리더들 자원함으로 드리기
2) 공 예배 준수하기
3) 셀 원들의 범사 파악하여 중보하기
4) 셀 예배 책임감을 갖고 진정성이 있게 드리기
5) 리더와 인턴을 위해 중보하기
6) 담임목사의 사역을 위해 기도하기  

 
설교요약 (SUMMARY)
설교 요약
본문 : 갈라디아서 5:25-26
제목 : 성령으로 행할지니 

  서론)
  지난 30년이라는 세월 동안 어떻게 목회를 할 수 있었을까? 아무리 제게 후한 점수를 스스로 많이 주면서 그 답을 찾아보려고 했지만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내 개인 중심적인 해답을 찾으려고 하지 않고 하나님의 입장에서 답을 찾으려고 했더니 의외로 쉬웠습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인도하셨으니까 여기까지 달려올 수 있었습니다. 생각이 여기까지 이르자 한 가지 첨부할 내용이 생각났습니다. 우리 모두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때를 따라 인도하셨던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성령의 인도하심이라는 은혜를 받았기에 이제부터 성령이 원하시는 삶을 살겠다고 결단해야 합니다. 오늘 갈라디아서 5장을 마감하는 본문이 이 결단을 하는 자들에게 성령이 인도하시는 그 방법을 소개합니다. 

  본론)
  우리는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 때문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의 여정은 철저하게 성령 하나님의 힘으로 행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 25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천명했습니다.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성령으로 사는 방법은 성령으로 행하면 된다고. 그렇다면 성령으로 행한다는 것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바울은 오늘 본문 26절 전반절에서 그 방법을 이렇게 제시했습니다. “헛된 영광을 구하여” 이 구절을 반면교사로 삼으면 오늘 교훈하고 있는 성령으로 행하는 삶이 무엇인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 헛된 영광을 구하지 않는 것입니다.   
  영어성경의 고전인 RSV는 헛된 영광이라는 단어를 아주 의미 있게 번역했습니다. “self-conceit” 즉 ‘자만’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이렇게 번역한 이유는 이 단어를 헬라어 원어성경에 ‘무언가를 헛되이 자랑한다.’는 의미로 쓰는 ‘케노독쏘스’라는 단어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스스로 누구보다 자기가 타인에 비해 더 우월한 존재라고 여기는 마음의 상태를 바울은 ‘헛된 영광을 구하는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아마도 바울이 이렇게 표현한 것은 다분히 할례의 우월성을 주장하며 유대인들이 갈라디아 지방에 살고 있었던 이방인들에 비해서 뛰어난 민족이며 다윗의 자손으로 먼저 택함을 받은 우수한 민족이라는 극단적인 종교적 교만함을 드러냈음이 분명했기에 그 저의에 대한 반격이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설상가상으로 자기들만 그렇게 잘난 체를 하는 정도가 아니라 갈라디아 교회의 이방인 출신의 성도들에게도 할례를 받으며 당신들도 그런 혈통적인 우월한 선민이 될 수 있다고 부화뇌동했을 것에 대한 분명한 제동이 26절에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5장을 마무리하면서 이 표현과 함께 더 세밀한 경고를 남깁니다. 어떤 내용이었습니까? 이렇게 갈라디아 교회 공동체를 무너뜨리는 치명적인 암적 바이러스를 유대 율법주의자들이 퍼트리게 되었는데 그 내용의 심각성이 이렇다고 적시한 것입니다. 1) 서로를 노엽게 하는 파괴입니다. 2) 서로 투기하게 만드는 죄악입니다.
  아마도 갈라디아 공동체는 할례 논쟁으로 인하여 할례를 받은 배교적인 그리스도인들과 절대로 십자가 외의 그 어떤 것도 인정하지 않겠다는 바울이 가르쳤던 복음을 사수하던 신앙적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치열하게 대립했을 것입니다. 해서 서로를 반목하는 분열을 가져 왔을 것입니다.
  ‘노엽게 하다.’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 ‘프로칼레오’는 신약성경에 바로 이곳에 딱 한 번 등장하는 단어입니다. 직역하면 자신의 우월함을 보여주기 위해 누구에겐가 싸움을 거는 행위를 뜻하는 단어입니다.
  ‘투기하다.’로 번역된 ‘프쎄네오’는 더 가까운 의미로 ‘질투하다’로 바꿀 수 있습니다. 아마도 갈라디아 교회 공동체는 반목과 갈등으로 인해 할례가 구원의 필수적인 요소라는 것을 강조하는 유대 율법주의자들과 그렇지 않다고 역설하는 바울주의자들이 서로 깊게 반목하며 질투하고 있었던 상태였습니다.
이렇게 치열하게 서로 싸우게 된 이유는 앞서 언급했듯이 헛된 영광을 구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거의 대부분 공동체에서 서로 반목하고 싸우는 일의 원인을 여러 가지 이유로 말할 수 있겠지만 그것을 종합하면 한 가지로 대변됩니다. 성령 하나님의 생각을 무시하거나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설교의 주제로 표현한다면 성령 하나님으로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헛된 영광을 구하는 삶에서 떠나는 것이 그래서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헛된 영광을 구하지 않는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설교를 준비하다가 톰 라이트 교수의 주석에 천착했습니다. 그는 25절을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성령을 따라 산다면 성령의 방향에 맞춥시다.”(톰 라이트, “갈라디아서 주석”, P,113.)  우리들이 성령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기 원한다면 서로를 노엽게 하거나, 투기하게 만드는 헛된 영광을 추구하려는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그러나 이런 삶은 내 힘으로, 내 의지로 되지 않습니다. 이렇게 살려면 대 전제가 필요합니다. 성령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우리의 보폭을 맞추어야 합니다.
  이것도 대단히 피상적인 표현으로 들립니다. 그래서 이해는 되는 표현이지만 실상 그 삶이 무엇이냐고 다시 질문하면 난처해집니다. 선명하게 확 들어오는 그 무언가의 의미가 약하기 때문입니다. 해서 이 난처함과 곤란함에서 벗어나기 위해 오늘 설교의 핵심적인 내용을 가장 구체적으로 적용해 보려고 합니다. 이 작업을 위해서는 반드시 유진 피터슨 목사의 ‘메시지’ 번역을 참고해야 합니다. ‘메시지’ 갈라디아서 5:25-26절을 소개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선택한 삶, 곧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삶이니, 그 삶을 그저 머릿속 사상이나 마음의 감정으로 여기지 말고, 그 삶에 담긴 뜻을 우리 삶 구석구석에 힘써 적용하십시오. 마치 우리 가운데 누구는 더 낫고 누구는 모자라기도 한 것처럼 비교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살면서 해야 할 훨씬 흥미로운 일들이 많습니다. 우리는 저마다 하나님의 독특한 작품입니다.”
  적어도 저와 여러분이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여기까지 은혜로 달려왔다면 이제는 성령이 원하시는 삶을 삶의 구석구석에서 나타내야하고 적용해 나아가야 합니다. 상당히 많은 그 일 중에 하나를 이렇게 정리하겠습니다.
  ⁜ 비교하는 삶을 살지 말자.
  성령 하나님의 인격적인 도우심은 철저한 포용력을 나타났습니다. 성령 하나님은 품으셨습니다. 성령 하나님은 수리아 안디옥 교회를 통하여 일체의 차별을 폐하셨습니다. 사도행전 13:1절입니다.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 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성령 하나님은 키프로스 출신의 레위 족속의 사람이었던 바나바를 세우셨습니다. 아프리카 출신의 흑인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개종한 열매인 니게르도 세우셨습니다. 구레네 사람 루기오도 세우셨는데 이 사람은 로마식의 이름을 갖고 있는 것을 볼 때 로마의 문화권에서 공부를 했거나 아니면 로마의 영향권에 있던 이방적인 색채가 또렷한 사람입니다. 마나엔은 최고의 권력을 갖고 있는 자의 동생이었습니다. 그는 세례요한을 죽인 헤롯과 함께 유모에게서 젖을 먹고 자란 사람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권력의 상층부에서 권력의 맛을 본 요주인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 하나님은 그도 포용했습니다. 사울이 누구입니까? 우리가 지금 보는 갈라디아서의 저자입니다. 사울은 유대인 중의 유대인이요 바리새파라는 당시의 지성인 출신입니다. 그는 율법의 달인이었고 잘 나가던 인텔리였습니다. 그도 수리아 안디옥 공동체에서 세워진 인물입니다. 만에 하나 수리아 안디옥 공동체가 이 사람들의 면면을 비교했다면 이방 선교의 전진기지였던 안디옥 교회는 존재할 수도, 존재하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비교하지 않고 포용한 수리아 안디옥 교회에 하나님이 주신 은혜가 무엇이었습니까? 사도행전 13:2-3절은 이렇게 보고합니다.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이르시되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오늘 우리들에게 복음과 십자가의  은혜가 들어오게 된 첫 번째 선교사 파송이라는 엄청난 사역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미국 노던 신학교의 신약학 교수인 스캇 맥나이트는 ‘배제의 시대, 포용의 은혜’라는 책에서 교회 공동체가 반드시 품어야 하는 세 가지를 소개합니다. (pp,196-203) Ⓐ 하나님께서 회복하시는 세상을 감싸 안아야 한다. Ⓑ 우리의 신앙공동체를 감싸 안아야 한다. Ⓒ 개인적으로 그리스도를 감싸 안아야 한다.
결론이 무엇입니까? 성령 하나님이 이끄시는 성도, 그리고 교회 공동체는 사탄적인 행태인 배제와 비교의식에서 벗어나 나와 관계되어 있는 개인과 공동체를 포용하고 감싸 안는 삶을 사는 것이야 말로 성령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내 삶의 구석구석에서 이루어내는 삶인 것을 명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론)
  사도행전 1:1절을 읽습니다.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께서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누가는 그가 먼저 쓴 글인 누가복음에서 예수께서 행하셨던 일과 가르치셨던 일을 소개했음을 분명히 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데오빌로 형제에게 말합니다. 나의 롤 모델이었던 바울의 주군이셨던 예수께서는 당신이 가르치셨던 일체의 일들을 먼저 행하셨다고. 사랑하는 세인 교회 교우 여러분! 이 시대에 가르침은 너무 많습니다. 그런데 가르친 것에 대한 행함은 보이지 않습니다. 주군이셨던 예수께서도 가르치시기 전, 먼저 행하셨다는 누가의 보고가 적어도 성령을 따라 사는 자들에게는 크게 공명되어야 합니다. 예수께서도 삶에 천착하셨다면 저와 여러분이 삶을 살아내야 함은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앞서 언급한 스캇 맥나이트는 이렇게 갈파했습니다. “은혜의 대적은 개인주의이다.” (앞의 책,p,162) 성령에 행하신 대로 사는 삶은 개인주의를 극복하고 주군이 감당하셨던 감싸 안으심의 은혜를 살아내는 것임을 명심하고 그렇게 치열하게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