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 사역

제목2019년 6월 23일 (넷째 주) 지역 셀 사역2024-04-23 17:00
작성자 Level 10

 

얼음 깨기 (WELCOME)
당신이 확신하는 것 중에는 무엇이 있나요, 하나님의 이름을 근거로 확신하는 것은 무엇이 있을까요?  

 
경배와 찬양 (WORSHOP)
● 찬송가: 546장 - 주님 약속하신 말씀 위에서
●  복음성가: 주님을 모르던 세월
  

 
말씀읽기와 적용 (WORD)
● 제목 : 이름을 팔지 마라
● 본문 : 욥기 21:17-34
1) 소발에 대한 욥의 반론이 이어집니다.
⓵ 소발의 주장은 무엇입니까?(21:10)
⓶ 욥의 반론은 무엇입니까?(21:19-21)
⓷ 이어지는 욥의 반론은 무엇입니까?(21:32-24, 26)
⓸ 욥의 반론을 통해 배울 것은 무엇입니까?  

2) 욥의 친구들은 여전히 인과응보의 원리를 욥에게 적용하는 데 물러서지 않습니다.
⓵ 욥의 반론은 무엇입니까?(21: 28-33)
⓶ 성경은 어디까지 알 수 있을까요?
⓷ 성경은 우리에게 충분한 지식을 줄까요?
  

3) 적용하기
⓵ 설교에서 전달하고자 하는 중심 메시지는 무엇인가?
⓶ 깨달은 것을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  

 
사역하기 (WORK)
주간 중보기도
1) 10주년 기념 강좌를 위한 지속 중보
2) 6월 29일(토)에 실시될 미셔널 처치 부서 첫 번째 재능 기부 사역을 위해
3) 지역 셀이 섬기는 태신자 구원을 위하여 (7월 7일 맥추감사절 초청주일)
4) 피선교지를 위해
5) 군에 있는 자녀들을 위해 (이장규 신요한 김진현)
6) 대입을 치르는 학생들을 위하여(이한빛 신예찬 김혜원 정영민 정윤서 우혜민) 
7) 담임목사의 목양을 위해 


셀 사역

1) 맥추감사주일(7월 첫 주일)에 첫 번째로 태신자 교회  예배 초청하기
2) 새벽예배에 리더들 자원함으로 드리기
3) 공 예배 준수하기
5) 셀 원들의 범사 파악하여 중보하기
  

 
설교요약 (SUMMARY)
설교 요약
본문 : 욥기 21:17-34
제목 : 이름을 팔지 말라 

서론)
  본문은 욥이 소발이 집요하게 공격했던 두 가지에 대하여 조금의 물러섬이 없이 그의 의견에 반론하는 장면입니다. 욥에 대하여 공격했던 두 가지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⓵ 죄를 지은 악인은 반드시 멸망하게 될 것이다. ⓶ 그들의 죄를 그들의 후손에게도 미치게 해서 후손들 역시 선조의 죄에 대한 대가를 받게 된다.
  이에 대한 욥의 반격은 이렇습니다. Ⓐ 죄를 지은 악인들이 반드시 멸망하는 것은 아니다. 왜? 악인들 중에 형통한 자들이 부지기수이기 때문이다. Ⓑ 자녀들에게 아비의 죄를 묻겠다는 발상도 잘못된 것이다. 자기의 죄에 대한 심판은 그 당사자가 받는 것이지 자녀들에 임하는 것이 아니다.
  ⓵Ⓐ에 대한 주장은 우리가 이미 지난 주간에 살펴보았던 21:1-16절에서 공부했습니다. ⓶Ⓑ에 대한 성경적 근거를 제시하고 있는 텍스트가 본문 19-21절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죄악을 그의 자손들을 위하여 쌓아 두시며 그에게 갚으실 것을 알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자기의 멸망을 자기의 눈으로 보게 하며 전능자의 진노를 마시게 할 것이니라 그의 달수가 다하면 자기 집에 대하여 무슨 관계가 있겠느냐” 이 구절을 공동번역 성경으로 읽어보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비에게 줄 벌을 남겨두셨다가 그 자식들에게 내리신다." 하지만 그게 어디 될 말인가? 본인이 받을 줄로 알아야지. 제 파멸은 제 눈으로 보아야 하고 전능하신 분께서 내리시는 사약은 본인이 마셔야지. 살 만큼 살고 죽은 뒤에 집안이 어찌 된들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소발의 이 발언은 대단히 위험한 발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욥은 이런 소발의 공격과 폭력적인 발언에 대하여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음을 저는 우리 교우들에게 지속적으로 강조했습니다.

본론)
  먼저 22-26절 본문을 읽어보십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높은 자들을 심판하시나니 누가 능히 하나님께 지식을 가르치겠느냐 어떤 사람은 죽도록 기운이 충실하여 안전하며 평안하고 그의 그릇에는 젖이 가득하며 그의 골수는 윤택하고 어떤 사람은 마음에 고통을 품고 죽으므로 행복을 맛보지 못하는도다 이 둘이 매 한 가지로 흙 속에 눕고 그들 위에 구더기가 덮이는구나” 이 구절은 악인들의 죄를 하나님께서 반드시 물으신다는 친구들 주장에 대한 욥의 반격입니다.
  악인에게 임한 결과물이 무엇이었습니까? 23-24절을 증언합니다. “죽도록 기운이 충실하여 안전하며 평안하고 그의 그릇에는 젖이 가득하며 그의 골수는 윤택하고” 아이러니하게도 너무 잘 먹고 잘 사는 것입니다. 반대로 25절의 어떤 사람(의인)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마음에 고통을 품고 죽으므로 행복을 맛보지 못하는도다” 또 아이러니하게도 너무 힘든 삶을 산다는 말입니다.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입니다. 악인들이 버젓이 잘 되고 전혀 문제없이 낙을 누리다가 때가 되면 흙으로 돌아가는 것과 의인은 반대로 그렇게 의롭게 살았는데도 마음에 고통을 품은 채로 행복한 삶과는 전혀 걸맞지 않는 삶을 살아가는 현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겠습니까?
  26절을 읽어보십시다. “이 둘이 매 한 가지로 흙 속에 눕고 그들 위에 구더기가 덮이는구나” 이 둘이 누구입니까? 평생 악인으로 버젓이 살았던 인간과 의인으로 살았던 인간을 의미합니다. 이 두 사람의 궁극의 결과는 동일합니다. 똑같이 흙으로 돌아가고 그 시체는 구더기가 덮는 결론입니다. 이 두 사람의 결말이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는 백성들입니다. 그것이 자의든 타의든 예수를 믿는다는 한 가지만으로 저와 여러분들은 매우 많은 세상의 것들을 포기하고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웬만한 세속적 쾌락과 부유함과 안전함과는 담을 쌓으면서 살아왔습니다. 그것이 마땅히 신자들이 택하여야 하는 의무이자 신앙적 결단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표면적인 신앙의 의무를 넘어선 그 무언가가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 무언가가 무엇입니까? 공교롭게도 그 답을 지난 주일 강좌에서 차준희 교수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이미 온 하나님의 나라와 아직 오지 않은 하나님의 나라가 겹치는 영역에서 우리들이 살고 있는데 이 영역에 걸쳐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그래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 은혜는 끝이 오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역설했습니다. 차 교수는 이 신앙의 여정에서 하나님께로부터 부여받는 성도의 복은 결국은 종말론적인 신앙 즉 부활과 생명 신앙이라고 답했습니다. 더불어 하나님은 이 신앙의 현재와 미래 속에 상존하고 계시는 하나님이심을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의 결론은 그래서 이것이었습니다. 이런 위대한 신앙을 견지하기에 우리는 지금 당하고 있는 여타 힘든 일들과 고난을 극복할 수 있는 에너지를 얻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차 교수가 말한 이것을 부인하는 사람이 어찌 신앙인일수 있겠습니까? 저도 동의합니다. 우리는 이 신앙에서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설교자인 저는 신학자가 보는 눈보다는 조금은 더 포괄적인 시야로 의인이 잘못 되고, 악인이 잘 되는 이유에 대한 해석에 있어서 앞에서 말한 내용이 조금은 궁색하다는 느낌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신학이 이야기를 해주어야 하는데 너무 교과서적인 이야기만 해주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질문해야 할 것 같습니다. 왜 의인은 잘 안 되고, 악인인 떵떵거리며 살까요? 이것에 대한 답을 이렇게 목회자는 제시합니다. 모릅니다. 왜 그런지 모릅니다. 그러면 끝입니까?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교훈을 받겠습니다.
  ※ 모르는 것은 모르는 것으로 그냥 남겨두자.
  부활과 생명 신앙이 의인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보답이라는 사실에 저와 우리 성도들은 격려와 위로와 그리고 은혜를 받는 것이 사실입니다. 신앙으로 이 화두를 받아들이는 것이 제일 안전합니다. 문제는 악인에 대한 과정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입니다. 이 공식으로 접근한다면 이렇게 해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악인은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살아도 끝내는 그들은 부활과 영생을 유업으로 얻지 못한다는 해석 말입니다. 전자를 믿는다면 후자의 해석도 믿어야 하고 또 마땅히 그렇게 신앙적 의구심에 대한 답으로 결론을 맺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제가 본문 해석을 통해 가지려는 도전은 이것입니다. 왜 욥의 세 친구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동원하여 악인이 가는 길은 반드시 멸망을 당하고 그 악인의 자녀들마저도 멸망을 당하게 될 것이라는 쐐기 박기에서 조금도 물러서지 않는가? 입니다. 욥은 이런 친구들의 고집스러운 주장에 대하여 본문 28-33절에서 보란 듯이 반론을 제기합니다. 이 메시지가 주는 결정적인 의미가 무엇입니까? 표준 새 번역을 다시 읽어봅니다. “너희의 말이 세도 부리던 자의 집이 어디에 있으며, 악한 자가 살던 집이 어디에 있느냐? 한다. 너희는 세상을 많이 돌아다닌 견문 넓은 사람들과 말을 해 본 일이 없느냐? 너희는 그 여행자들이 하는 말을 알지 못하느냐? 그들이 하는 말을 들어 보아라. 하나님이 진노하셔서 재앙을 내리셔도, 항상 살아남는 사람은 악한 자라고 한다. 그 악한 자를 꾸짖는 사람도 없고, 그가 저지른 대로 징벌하는 이도 없다고 한다. 그가 죽어 무덤으로 갈 때에는, 그 화려하게 가꾼 무덤으로 갈 때에는, 수도 없는 조객들이 장례 행렬을 따르고, 골짜기 흙마저 그의 시신을 부드럽게 덮어 준다고 한다.” 가만히 보면 악인들이 끄떡하지 않고 잘 먹고 잘 살고 있는 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입니다. 사정이 이런 대도 욥의 세 친구들은 악인은 이 땅에서 반드시 멸망을 당하게 되니 회개하라는 명령조의 언사들을 견지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악인이 이 땅에서 여전히 그리고 버젓이 잘 살고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 모릅니다.
  본문에서 욥 역시 악인의 형통함에 대한 이유를 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세 친구들 역시 악인들은 망하게 될 것이라고 집요하게 외치지만 막상 욥이 반론으로 제기한 악인의 형통에 대해 별 말이 없습니다. 대단히 궁색합니다.
  성경은 100% 알 수 있는 책이 아닙니다. 그러니 모르는 것은 모르는 것으로 남겨 두십시다. 말로 안 되는 비신학적이고, 반성서적인 고집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해 아는 체하지 마십시다. 왜 그래야 합니까? 내가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나님께 정직하게 인정하면 하나님이 내 신앙의 여정에서 하나님을 충분히 사랑할 수 있는 또 다른 지혜와 지식을 주셔서 나를 위로하시기 때문입니다. 제발 말도 안 되는 무지함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팔지 마십시다.
  성경은 구원의 책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주어진 성경으로도 구원의 지혜는 부족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요한으로 하여금 이렇게 전언하게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21:24-25절입니다. “이 일들을 증언하고 이 일들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된 줄 아노라 예수께서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 그리고 바울을 통하여 주신 이 한 말씀도 여기에서 채우십시다. 고린도전서 13:10-12절입니다.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결론)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내가 모르는 것은 모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이면서 결론을 맺으려는 무모함에서 떠나십시다. 모르는 것을 만났을 때, 하나님께 엎드립시다. 나는 우리 세인교회 성도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 한 사람도 없기를 바라며 모두가 모름을 겸손하게 인정하고, 더욱 하나님께 엎드리는 지혜로운 그리스도인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