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 사역

제목2019년 6월 16일 (셋째 주) 지역 셀 사역2024-04-23 17:00
작성자 Level 10


얼음 깨기 (WELCOME)
당신은 진정한 위로를 경험하였습니까?  

 
경배와 찬양 (WORSHOP)
● 찬송가: 552장 - 아침 해가 돋을 때  

 
말씀읽기와 적용 (WORD)
● 제목 : 위로하고 싶으십니까?
● 본문 : 욥기 21:1-16
1) 오늘 본문은 소발에 대한 욥의 반론입니다.
⓵ 욥은 친구들이 욥에게 행한 위로에 문제가 있다고 합니다. 무엇입니까?(1-2절, 3절)
⓶ 욥의 친구들은 욥에게 ‘인과응보’를 말합니다. 욥의 반론은 무엇입니까?  

2) 욥의 반론은 고통당하는 지체에게 위로하는 지혜를 줍니다.
⓵ 본문 2절을 통해 배웁시다( “Listen closely to what I am saying.”내가 말하는 것을 제발 가까이 경청해서 들어주기를 바란다)
⓶ 누가복음 5:12-13절을 통해 배웁시다.  

3) 적용하기
⓵ 설교에서 전달하고자 하는 중심 메시지는 무엇인가?
⓶ 깨달은 것을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  

 
사역하기 (WORK)
주간 중보기도
1) 10주년 기념 강좌를 위한 지속 중보
2) 6월 29일(토)에 실시될 미셔널 처치 부서 첫 번째 재능 기부 사역을 위해
3) 지역 셀이 섬기는 태신자 구원을 위하여 (7월 7일 맥추감사절 초청주일)
4) 피선교지를 위해
5) 군에 있는 자녀들을 위해 (이장규 신요한 김진현)
6) 대입을 치르는 학생들을 위하여(이한빛 신예찬 김혜원 정영민 정윤서 우혜민) 
7) 담임목사의 목양을 위해 


셀 사역

1) 맥추감사주일(7월 첫 주일)에 첫 번째로 태신자 교회 예배 초청하기
2) 새벽예배에 리더들 자원함으로 드리기
3) 공 예배 준수하기
5) 셀 원들의 범사 파악하여 중보하기  

 
설교요약 (SUMMARY)
설교요약
본문 : 욥기 21:1-16
제목 : 위로하고 싶으십니까? 

서론)
  아주 오래 전, 김훈 작가의 ‘남한산성’에서 정치적인 숙적 관계였던 김상헌과 최명길의 갈등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이 두 사람은 사리사욕으로 서로 반목한 것이 아니라 나라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정치적인 식견을 갖고 있었지만 이 한 가지의 목적 때문에 서로의 의견을 경청했다는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훗날, 영화로 제작된 남한산성을 보다가 최명길이 인조에게 읊조렸던 명대사를 잊을 수가 없습니다. “전하, 상헌의 말을 가볍게 듣지 마옵소서. 항상 그를 가까이 두소서. 그는 충신 중에 충신이옵니다.”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가장 위대한 지성이 무엇일까? 들어주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냥 듣는 것이 아니라 정확하게 들어주는 능력이 지성입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시대의 문제는 들어주기가 사라진 점입니다. 들어주기를 거부하는 데 어떻게 정확하게 들어주는 공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오늘 본문에서 "위로가 무엇일까?"를 제시하는 욥의 토로를 들으면서 다시 한 번 재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진정한 위로는 정확하게 들어주는 것입니다.

본론)
  오늘 본문은 소발이 퍼부었던 거의 인신공격과도 같은 독설에 대하여 욥이 신학적 변론을 하는 장면입니다. 본문 1-2절을 영어성경 NLT로 읽겠습니다. “Listen closely to what I am saying. That's one consolation you can give me.” (내가 말하는 것을 제발 가까이 경청해서 들어주기를 바란다. 그것이 바로 너희들이 나에게 줄 수 있는 위로 중에 하나다.) 욥은 지금 무엇을 친구들에게 선포하는 것입니까? 너희들이 지금 나를 위로한답시고 찾아와서 내게 이런저런 말을 많이 했는데 그 말들에는 치명적인 결함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결함입니까? 내가 했던 말을 경청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내 말을 잘 듣지 않았기에 나를 위로한답시고 내뱉은 말들이 더 나를 옥죄고 힘들게 만드는 공격의 무기로 변질되었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위로라고 던진 말이 나의 아픔에 소금을 뿌리는 것이 되었고, 조금 더 강한 표현을 말하자면 확인 사살하는 것과 같은 질 나쁜 무기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본문 3절을 읽겠습니다. “나를 용납하여 말하게 하라 내가 말한 후에 너희가 조롱할지니라” 무슨 말입니까? 너희들이 나를 공격한 담론들이 있는데 제발 말만 번지르르 하게 하지 말고 신중하게 내가 하는 말을 경청해달라는 요청입니다. 서툴게 듣지 말고 진중하게 내 말을 정확하게 듣고 난 뒤에 그 다음에 진짜로 내 말을 용납하지 못할 것 같으면 그때 가서 나를 조롱하라는 것입니다.
  7-15절 전체를 조금 길지만 다시 읽겠습니다. “어찌하여 악인이 생존하고 장수하며 세력이 강하냐 그들의 후손이 앞에서 그들과 함께 굳게 서고 자손이 그들의 목전에서 그러하구나 그들의 집이 평안하여 두려움이 없고 하나님의 매가 그들 위에 임하지 아니하며 그들의 수소는 새끼를 배고 그들의 암소는 낙태하는 일이 없이 새끼를 낳는구나 그들은 아이들을 양 떼 같이 내보내고 그들의 자녀들은 춤추는구나 그들은 소고와 수금으로 노래하고 피리 불어 즐기며 그들의 날을 행복하게 지내다가 잠깐 사이에 스올에 내려가느니라 그러할지라도 그들은 하나님께 말하기를 우리를 떠나소서 우리가 주의 도리 알기를 바라지 아니하나이다 전능자가 누구이기에 우리가 섬기며 우리가 그에게 기도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하는구나” 지금까지 욥을 공격한 친구들의 지론이 무엇이었습니까? 악인의 멸망입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인과응보의 벌을 악인에게 내리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욥 너도 이런 고난을 당하는 이유가 하나님께 범죄 하였기 때문이고, 또 하나 계속해서 네 죄를 회개하지 않으면 너에게 임한 이 모든 고난은 떠나지 않을 것이며, 결국 너는 망하게 될 것이라는 결과론적인 해석이 그들의 지칠 줄 모르는 공격의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 본문 7-15절에서 읽은 것처럼 욥이 갖고 있었던 드라마틱한 신학적 반전이 보이지 않습니까?
어떤 면입니까? 욥은 악인은 반드시 멸망할 것이라는 그런 보편적인 일에 대하여 자기도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는데 하나님은 그것조차도 허락하지 않으시기에 나도 힘들다는 반격이었습니다. 욥은 말합니다. 악인이 버젓이 생존한다고 말합니다. 동시에 그들은 죽는 것이 아니라 장수하며 세력이 강하기까지 하다고 열변을 토합니다.
그리고 최고의 절망처럼 느껴지는 대목이 있습니다. 다시 본문 14-15절을 읽어보겠습니다. “그러할지라도 그들은 하나님께 말하기를 우리를 떠나소서 우리가 주의 도리 알기를 바라지 아니하나이다 전능자가 누구이기에 우리가 섬기며 우리가 그에게 기도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하는구나” 무슨 뜻입니까? 악인들에 의해 보란 듯이 수치를 당하는 하나님을 묘사하고 있는 구절입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어떤 느낌을 가져야 합니까? 이래야 합니다. 도대체 이렇게 악인이 득세하고 떵떵거리게 만드는 하나님이 제 정신인가? 또 하나의 극단적인 평가는 하나님이라는 존재가 도대체 살아 있기나 한 것인가? 이련 결론을 경험한 욥이 하나님께 최후로 대항하는 한 방법이 슬며시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것이 본문 마지막 16절을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로 읽겠습니다. “그들은 틀렸고 크게 틀렸네. 그들은 신이 아니지 않나. 그들이 어떻게 그런 행태를 이어갈 수 있는지 나는 도무지 모르겠네.”
  본문을 다시 정리해 보겠습니다. 욥의 세 친구들은 욥이 단한 고난을 인과응보라고 정의했습니다. 해서 그들은 욥에게 회개를 촉구했고 악에서 돌아설 것을 종용했습니다. 이유는 악인의 길은 망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욥은 이렇게 반론한 것입니다. 만에 하나 친구들의 말대로 악인은 반드시 망하고 멸할 것이라는 직언이 정말로 그렇게라도 되었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해석 불가능하십니다. 왜요? 악인들의 형편을 보니 꼭 그리고 반드시 망하는 것이 아니라는 결론 때문입니다. 악인의 형편이 오히려 더 좋아지는 것을 보면서 나도 하나님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말을 우회적으로 전합니다. 지금, 우리가 있는 지성으로 하나님을 판단하는 것을 유보하자는 것입니다.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지식을 총 동원하여 하나님을 해석하고 이해하려고 하는 것은 좋으나 그것을 넘어가는 것에 대하여 시시비비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그것은 내 몫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에 대한 시비 종결은 하나님께 담겨 있습니다. 언제입니까? 하나님의 시간이 될 때입니다. 오히려 오늘 본문을 통해 주시는 영적 교훈은 이것이 적절합니다.
※ 공동체의 지체들이 당하는 고통을 해석하려고 하지 말고 이해하려고 해야 합니다.
  해석하려고 하지 말고 이해하려 하자는 교훈에 적절한 성서적 근거를 나누고 싶습니다. “Listen closely to what I am saying.” 가슴 뭉클하게 다가오는 욥의 요청이 마음을 움직입니다. 이 구절에서 놓치지 말고 붙들어야 하는 단어는 ‘가까이’입니다. 이 단어를 이렇게 바꾸면 어떻겠습니까? ‘해석하려고’ 하지 말고 ‘이해하려고 하는 마음으로 들어 주세요.’ 2주 전 목양터 이야기마당의 글을 기억하십니까? 느헤미야가 요청한 수문 앞 광장에서 연 에스라의 부흥성회의 예를 들면서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하나님의 율법 책을 낭독(reading)하고 그 뜻을 해석하여(interpreting) 백성에게 그 낭독하는 것을 다 깨닫게 하니(understanding)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listening) 다 우는지라(weeping)” 율법학사 에스라가 ‘타나카’를 낭독했습니다. 낭독한 뒤에 그것을 해석했습니다. 그랬더니 백성들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 구절을 보면 성령이 기름 부으신 지성은 세 가지의 단계가 있어야 함을 분명히 알게 됩니다. 그런데 낭독하고, 해석하고, 깨닫게 된 율법의 말씀은 에스라를 통해서였습니다. 그러나 그런 단계를 거쳐 도달함으로 인하여 온 백성이 울게 되는 감동의 시나리오는 들었기 때문이라는 놀라운 결론으로 모아집니다.
  듣는 것은 은혜입니다. 이 변하지 않는 은혜를 근간으로 한가지 만 욕심을 더 내십시다. 듣되 그냥 듣지 말고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들으십시다.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들을 때 해석이 아니라 공감이라는 이해의 자리로 우리를 하나님이 이끄십니다. 누군가의 아픔을 진정성을 갖고 나누려면 해석하려고 들면 안 됩니다. 그 아픔을 공감의 마음을 갖고 가장 가까이 들어줄 때 이해의 감동이 밀려오는 것입니다.
  성경 한 구절 소개하고 말씀을 맺겠습니다. 누가복음 5:12-13절을 소개합니다. “예수께서 한 동네에 계실 때에 온 몸에 나병 들린 사람이 있어 예수를 보고 엎드려 구하여 이르되 주여 원하시면 나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하니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나병이 곧 떠나니라” 아주 단순한 기사처럼 보이는 이 실례에서 저는 따뜻한 감동을 받습니다. 한센병자가 주님에게 행한 간절함이 어디에 담겨 있습니까? 헬라어 단어 ‘델로’에 담겨 있습니다. 이 단어는 강력한 의지가 담겨 있는 원함입니다.그래서 영어성경은 이렇게 이 부분을 기록했습니다. “I am willing” (기꺼이) 강력한 의지가 담겨 있는 간절한 애원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은혜가 있습니다. 주님이 그 환자에게 보이신 반응입니다. ‘내가 원하노니’ 주님은 환자와 전혀 다르지 않은 똑같은 의지로 그에게 반응했습니다. 무엇을 누가가 그리고 있는 것입니까? 공감입니다. 해석이 아니라 이해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진정한 위로는 해석이 아닙니다. 같은 길에 있다는 확신을 심어주는 것입니다. 신영복 선생의 글에서 이런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도운다는 것은 우산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는 것입니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p,325.)

결론)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물이 없어 갈함이 있는 세상을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양식이 없어 주리고 있는 세상을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진짜로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 없는 것은 인애입니다. 인애는 공감입니다. 인애는 들어줌입니다. 모쪼록 우리 교회는 위로의 공동체가 되기를 바랍니다. 어떤 위로? 가장 가까이 옆에서 들어주는 공감이라는 위로가 있는 공동체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