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 사역

제목2019년 6월 9일 (둘째 주) 지역 셀 사역2024-04-23 17:00
작성자 Level 10


얼음 깨기 (WELCOME)
당신이 민감하게 반응하는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은 무엇인가?  

 
경배와 찬양 (WORSHOP)

● 찬송가 200장: 달고 오묘한 그 말씀
●  복음성가: 주님 나를 부르셨으니
  

 
말씀읽기와 적용 (WORD)
● 제목 : 입을 벌리니 
● 본문 : 에스겔 3;1-3   
1) 에스겔의 말씀에 대한 반응을 살펴보자.
⓵ 에스겔이 두루마리를 먹지 못하고 머뭇거린 이유는 무엇입니까?
⓶ 에스겔이 두루마리를 먹었을 때 어떤 반응이 있었습니까?  

2) 요한의 말씀에 대한 반응과 에스겔의 반응을 비교해보자.
⓵ 요한이 두루마리를 먹었을 때 어떤 반응이 있었습니까?
⓶ 에스겔의 반응과 공통점은 무엇입니까?
⓷ 에스겔의 반응과 차이점은 무엇입니까(기록된 내용과 유추 가능한 점)?  

3) 적용하기
⓵ 말씀을 온전히 받기 위해 필요한 태도는 무엇입니까?
⓶ 여러분이 느끼는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은 말씀을 받는데 어떤 역할을 해야 할까요?  

 
사역하기 (WORK)
주간 중보기도

1) 6월 사역을 위하여(창립 10주년 기념 강좌, 밀알 장애우 선교단 섬김, 제천 시민을 위한 재능 기부 사역)
2) 환우들을 위해
3) 지역 셀이 섬기는 태신자 구원을 위하여
4) 피선교지를 위해
5) 군에 있는 자녀들을 위해
  (이장규, 신요한, 김진현)
6) 대입을 치르는 학생들을 위하여(이한빛, 신예찬, 김혜원, 정영민)
7) 교회학교 여름성경학교와 수련회를 위해
8) 담임목사의 목양을 위해   

셀 사역

1) 맥추감사주일(7월 첫 주일)에 첫 번째로 태신자 교회    예배 초청하기
2) 새벽예배에 리더들 자원함으로 드리기
3) 공 예배 준수하기
5) 셀 원들의 범사 파악하여 중보하기  

 
설교요약 (SUMMARY)
설교요약
제목: 입을 벌리니
본문: 에스겔 3;1-3   

서론)
  개는 청각에 아주 예민합니다. 하나님께서 개를 창조하실 때 개가 개다울 수 있도록 허락하신 선물입니다. 그러기에 개는 아주 작은 소리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본성에 충실한 것이며 또 다른 한 시각에서 조명하자면 건강한 것입니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이런 느낌이 들었습니다. 미물인 개도 자기의 본성에 그렇게 민감한데 그렇다면 만물의 영장이고 지으실 때 가장 보기에 좋았다고 탄성을 지르셨던 그리스도인들은 도대체 어디에 민감해야 하는 것일까?

본론)
  오늘 본문으로 택한 3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앞서 기록된 1-2장의 내용을 아울러 선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에스겔 2장에서 현현하신 이유를 밝히십니다. 에스겔에게 당신의 백성인 유다 신앙공동체의 패역함을 고발합니다. 2:1-5절에서 당신의 백성들이 저지른 패역무도한 공동체적인 범죄를 상기시킵니다. 문제는 이런 패역한 당신의 백성들에게 가서 하나님의 신탁의 말씀을 전하라고 압박하십니다. 문제는 말씀을 전할 때 상당히 많은 어려움이 있을 것을 예고하셨다는 점입니다. 에스겔 2:4-7절을 읽어보십시다. “이 자손은 얼굴이 뻔뻔하고 마음이 굳은 자니라 내가 너를 그들에게 보내노니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이 이러하시다 하라 그들은 패역한 족속이라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그들 가운데에 선지자가 있음을 알지니라 인자야 너는 비록 가시와 찔레와 함께 있으며 전갈 가운데에 거주할지라도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그들의 말을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그들은 패역한 족속이라도 그 말을 두려워하지 말며 그 얼굴을 무서워하지 말지어다 그들은 심히 패역한 자라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너는 내 말로 고할지어다” 병 주고 약주는 듯한 인상이 있습니다. 말씀을 전하라고 하셨는데 잘 안 들을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어느 정도로 어려움이 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까? “인자야 너는 비록 가시와 찔레와 함께 있으며 전갈 가운데에 거주할지라도” (겔 2:6절 전반절) 마치 형극의 길이지 않습니까? 그렇지만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약속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라고 6절에서 무려 4번에 걸쳐 격려하십니다. 이 격려와 함께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더불어 명령하신 내용이 2:8-10절에 있습니다. 대단히 중요한 메시지입니다. “너 인자야 내가 네게 이르는 말을 듣고 그 패역한 족속 같이 패역하지 말고 네 입을 벌리고 내가 네게 주는 것을 먹으라 하시기로 내가 보니 보라 한 손이 나를 향하여 펴지고 보라 그 안에 두루마리 책이 있더라 그가 그것을 내 앞에 펴시니 그 안팎에 글이 있는데 그 위에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이 기록되었더라” 무슨 말이었습니까? 앞에 두루마리가 있는데 그 두루마리에 적혀 있는 글을 읽은 뒤에 그 두루마리를 입을 벌려 먹으라는 명령이었습니다. 문제는 그 두루마리에 적혀 있는 글씨들입니다.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들 천지였습니다.
  이렇게 명령하신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재차 거듭해서 재촉하시는 내용이 오늘 읽은 본문 3:1-3절입니다.
다시 한 번 이상의 전 이해를 토대로 본문을 복기하겠습니다. “또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발견한 것을 먹으라 너는 이 두루마리를 먹고 가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말하라 하시기로 내가 입을 벌리니 그가 그 두루마리를 내게 먹이시며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네게 주는 이 두루마리를 네 배에 넣으며 네 창자에 채우라 하시기에 내가 먹으니 그것이 내 입에서 달기가 꿀 같더라” 본문의 적절한 해석을 위해 다시 한 번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유다의 패역한 죄로 인해 앞으로 당하게 될 재앙과 슬픈 노래 부름과 통곡의 메시지가 적혀 있는 두루마리를 읽은 뒤에 그 두루마리를 입에 넣어 먹으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적혀 있는 메시지의 우울함으로 인해 머뭇거리고 있는 에스겔에게 재차 독촉하십니다. 발견한 것을 먹으라고. 그러자 에스겔이 입을 벌렸다고 했습니다. 입을 벌린 에스겔에게 하나님은 친히 그 두루마리를 먹여 주시기까지 합니다. 먹여주시는 하나님은 친절하게도 에스겔에게 이런 당부를 아끼지 않습니다. “네 배에 넣고, 네 창자에 채우라.” 그렇게 두루마리를 먹여 주시는 하나님의 그 먹이심이 끝나자 에스겔이 마지막으로 본인의 소회를 밝힙니다. “내가 먹으니 그것이 내 입에서 달기가 꿀 같더라”
  이제 저는 바로 이 지점에서 아주 예민한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본문 구절과 아주 비슷한 요절이 요한계시록에도 실려 있습니다. 소개합니다. 요한계시록 10:9-10절입니다. “내가 천사에게 나아가 작은 두루마리를 달라 한즉 천사가 이르되 갖다 먹어 버리라 네 배에는 쓰나 네 입에는 꿀 같이 달리라 하거늘 내가 천사의 손에서 작은 두루마리를 갖다 먹어 버리니 내 입에는 꿀 같이 다나 먹은 후에 내 배에서는 쓰게 되더라” 사도 요한이 밧모 섬에서 유배 생활을 하는 어간, 그 역시 에스겔처럼 환상을 보게 됩니다. 에스겔의 환상과 요한계시록의 환상에 나타난 공통분모를 찾으셨습니까? 그렇습니다. 두루마리와 책을 먹었던 에스겔과 요한의 느낌 중에 그것을 먹을 때 꿀처럼 달았다는 느낌입니다.
  그런데 주목해야 할 내용이 보입니다. 요한은 배에서 쓰다고 표현했습니다. 에스겔 본문인 3:1-3절까지의 내용에는 그런 문구가 보이지 않지만 이어지는 3장 전반에 걸친 내용과 설명 드린 것처럼 2:6절에 기록된 두루마리 안팎에 기록된 내용이 애가와 애곡과 재앙이라는 문구에 여실히 드러나는 것처럼 역시 에스겔이 먹은 뒤에 느낌은 배에서 쓰디쓴 상황이었음을 충분히 예측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설교를 행하는 설교자의 의도를 우리 교우들과 나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는 이번 구약 특별 강좌의 주제 절을 지금 소개한 에스겔 3:3절로 정했습니다. 다시 읽겠습니다.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네게 주는 이 두루마리를 네 배에 넣으며 네 창자에 채우라 하시기에 내가 먹으니 그것이 내 입에서 달기가 꿀 같더라” 자칫 잘못하다가 3절의 메시지 이해를 이렇게 곡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먹으니 입에서 달기가 꿀 같았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을 때 우리에게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은혜가 꿀같이 임한다.”고. 시편 119:103절입니다.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 다니이다” 저는 시인이 노래한 시편 119:103절을 100% 동의하고 확신하는 목사입니다.
  그러나 시인이 말한 시편 119편과 오늘 본문과 사도요한 밧모 섬에서 본 입에 달다는 소회와는 구별되어야 합니다. 시인이 하나님의 말씀을 ‘하가’(묵상)할 때 주어지는 은혜로 표현한 달다는 고백은 조금도 이견의 여백이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에스겔과 사도요한이 경험했던 두루마리를 먹고, 책을 먹을 때 느꼈던 쓰디쓴 감회에 더 주목하고 싶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쓴 느낌은 단 느낌에 비해 깊이가 있는 묵상이기 때문입니다. 단 것은 입과 혀를 자극해 줍니다. 그러나 쓴 느낌은 입과 혀를 통과할 때부터 시작하여 이후에 몸을 통해 나타나는 전체적인 체감의 소회입니다. 저는 오늘 우리 세인 지체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공부할 때마다 단 것을 뛰어 넘어 쓴 것까지 느끼는 성령이 기름 부으시는 말씀의 지성적 능력을 공유하실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말씀을 읽을 때 그리고 들을 때 단 것에 집착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쓴 것을 해석할 수 있는 거룩한 욕심과 열정이 있기를 소망합니다. 그러려면 반드시 한 과정을 겪어야 합니다.
※ 나에게 유리한 것만 취사선택하겠다는 편식의 태도를 버려야 합니다.   
  오늘 본문 2절을 주목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입을 벌리니 그가 그 두루마리를 내게 먹이시며” 입을 벌렸다는 에스겔의 고백에 민감해야 합니다. 이런 추측이 가능합니다. 전술했듯이 에스겔이 두루마리에 적힌 글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그 두루마리에는 애가와 애곡과 재앙이 적혀 있다고 했습니다. 더불어 하나님은 이미 에스겔의 옷매무새를 단단히 할 것을 종용하셨습니다. 이 슬픈 통곡과 애곡과 재앙의 메시지를 가지고 가서 바벨론에 끌려와 있는 동족에게 전하라고 하셨는데 그 길은 가시와 찔레와 함께 있으며 전갈 가운데에 거주하는 형극의 길이라고까지 예고해 주셨습니다. 잘 생각해 보십시다. 이런 길을 가는 것, 이것을 감당하겠다는 것이 입을 벌렸다는 것은 어디 이게 쉬운 일입니까? 그런데 에스겔이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입을 벌렸다고 본문은 전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감당하겠다는 고백이지 않습니까? 단 것만 취하지 않고 쓴 것도 취하겠다는 신앙적 결단이 아닙니까? 취사선택이 아니라 마땅히 순종하겠다는 결단이자 신앙고백이 아닙니까? 나에게 유리하고 달고 좋은 것은 먹고, 그렇지 않은 쓴 것을 뱉어내겠다는 현대적인 이기적 그리스도인의 습성을 보기 좋게 박살내는 선언이 에스겔의 고백을 통해 선포되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
  나에게 유익이 되는 것만 아멘을 하고 조금이라도 손해가 되는 말씀에는 등 돌리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먹으라는 주님의 권고에 입을 벌릴 리 없습니다. “잠깐만요. 메뉴를 골라 본 뒤에 결정할게요.” 참담한 형식주의 그리스도인입니다. 명목적 그리스도인입니다. 다시 한 번 경종하며 성도들에게 권고합니다. 말씀을 취사선택하지 마십시다. 어떤 말씀이든 입을 벌리십시다. 그것이 쓰면 쓴 대로 삼키고, 달면 단 대로 삼키십시다. 그리고 삶의 현장에서 말씀대로의 삶을 되새김질함으로 나타내십시다. 그것이 입을 벌린 그리스도인입니다. 오늘부터 진행되는 구약 특별 강좌 집회가 우리 세인 교회 교우들이 입을 벌려 내 배에 채우고 창자에 메우는 강력한 소화의 시간이 되기를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