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 깨기 (WELCOME)여러분에게 “열심”이라는 단어의 이미지는 어떤가요? | 경배와 찬양 (WORSHOP)찬송가 338장: 내 주를 가가이 하게 함은 복음성가: 우리 오늘 눈물로 | 말씀읽기와 적용 (WORD)● 제목 : 그릇된 열심 ● 본문 : 갈라디아서 4:17-18 1) ‘열심’인가, 열심의 ‘내용’인가? 1) ‘열심’인가, 열심의 ‘내용’인가? ⓵ 본문 17절에 나타난 ‘열심’이라는 단어의 뜻을 설명해보라. ⓶ ‘열심’이라는 단어와 대척이 되는 말은 무엇입니까? ⓷ 위의 두 경우를 종합하여 ‘열심’이 힘을 발휘하는 이유를 생각해보자. |
2) ‘열심’이 참된 ‘열심’이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이 있다. ⓵ 사도행전 22:3-5에서 바울의 ‘열심’은 무엇인가? ⓶ 누가복음 10:39에서 마르다의 ‘열심’은 무엇인가? ⓷ 위의 두 경우에 공통적인 문제는 무엇인가? |
3) 적용하기 ⓵ 그릇된 열심을 신앙으로 착각하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⓶ 깨달은 것을 구체적으로 적용해보자. | 사역하기 (WORK)주간 중보기도
1) 6월 사역을 위하여(창립 10주년 기념 강좌, 밀알 장애우 선교단 섬김, 제천 시민을 위한 재능 기부 사역) 2) 환우들을 위해 3) 지역 셀이 섬기는 태신자 구원을 위하여 4) 피선교지를 위해 5) 군에 있는 자녀들을 위해 (이장규, 신요한, 김진현) 6) 대입을 치르는 학생들을 위하여(이한빛, 신예찬, 김혜원) 7) 교회학교 여름성경학교와 수련회를 위해 8) 담임목사의 목양을 위해
셀 사역
1) 맥추감사주일(7월 첫 주일)에 첫 번째로 태신자 교회 예배 초청하기 2) 새벽예배에 리더들 자원함으로 드리기 3) 공 예배 준수하기 | 설교요약 (SUMMARY)본문: 갈라디아서 4:17-18 제목: 그릇된 열심
서론) 저는 오늘 신앙이라는 이름을 도용하여 성도가 저지를 수 있는 중대한 착각을 지적하는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그것 중에 단연 상위에 랭크되어 있는 내용이 ‘그릇된 열심’입니다. 예수회 사제이자 영성 학자였던 헨리 나우웬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리스도를 향한 봉사만큼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과 충돌하는 것은 없다.” 이 글을 접한 달라스 윌라드는 그의 걸작인 “잊혀진 제자도”에서 이렇게 맞장구를 치고 있습니다. “얼마나 이상한 말인가! 어쩌면 과장일 수도 있다. 하지만 하나님을 위한 선의의 봉사가 하나님을 보는 비전을 방해하는 성향이 아주 강한 것이 사실이다.”(p,139) 본론) 본문 17-18절을 읽겠습니다. “그들이 너희에게 대하여 열심 내는 것은 좋은 뜻이 아니요 오직 너희를 이간시켜 너희로 그들에게 대하여 열심을 내게 하려 함이라 좋은 일에 대하여 열심으로 사모함을 받음은 내가 너희를 대하였을 때뿐 아니라 언제든지 좋으니라” 유대에서 내려온 유대 율법주의자들이 갈라디아 교회 공동체에 침투하여 제일 먼저 행한 것이 열심이었는데 그 열심은 선한 뜻을 갖고 있었던 열심이 아니라 그릇된 열심이었다고 바울은 회고합니다. ‘열심’이라는 이 단어가 주는 맹점을 지금부터 나누어야 하겠습니다. 유대 율법주의자들이 갈라디아교회의 신자들의 마음을 사기 위해 열심을 다했다고 전언합니다. 어떤 열심이었을까? 클레몬트 신학대학의 신약학 교수인 한스 베츠 교수는 여기에 등장하는 단어 ‘열심’을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젤로오(열심)는 사랑하는 자가 자신을 사랑하는 자를 제어하기 위해 계략을 묘사하는 성적인 어휘이다.”(국제성서주석, “갈라디아서”, P,470) 무슨 말입니까? 달콤한 말, 유혹하는 말이었을 것을 가늠하게 하는 해석입니다. 그렇다면 달콤할 정도로 갈라디아 교회 신자들로 하여금 맥을 못 추게 한 그 진상이 무엇이었을까 궁금해집니다. 존 스토트 목사의 말로 답해보겠습니다. ‘사람에게 비위를 맞추기 위해 아첨하는 일’(존 스토트, 갈라디아서 강해,p,146.) 왜 그렇습니까? 그는 이 ‘열심’이라는 단어를 바울이 전한 16절의 선언과 대척점에 있는 단어로 해석했기 때문입니다.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참된 말을 하므로 원수가 되었느냐” ‘참된 말’의 대척이 되는 말이 무엇이었을까? 사람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아첨하는 거짓의 말입니다. 유대 율법의 거짓 교사들이 갈라디아 교회의 신자들의 마음을 도적질하기 위하여 행한 일이 무엇이었습니까? 환심을 사기위한 아첨하기였습니다. 바울은 이 사람의 비위에 맞는 아첨하기를 그릇된 열심이라고 명한 것입니다. 본문 17절을 다시 읽습니다. “그들이 너희에게 대하여 열심 내는 것은 좋은 뜻이 아니요 오직 너희를 이간시켜 너희로 그들에게 대하여 열심을 내게 하려 함이라” 이에 반한 바울의 사역은 어떠했습니까? 참 많이 강조했던 메시지인 갈라디아서 1:10절을 다시 선포하겠습니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특별히 신앙인들이라면 매우 조심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들이 주일 아침에 가지고 가야 하는 교훈이기도 합니다. ※ 그릇된 열심이 신앙이라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도 그릇된 열심을 갖고 살았던 자였음을 간증합니다. 사도행전 22:3-5절입니다.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이 있는 자라 내가 이 도를 박해하여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고 남녀를 결박하여 옥에 넘겼노니 이에 대제사장과 모든 장로들이 내 증인이라 또 내가 그들에게서 다메섹 형제들에게 가는 공문을 받아 가지고 거기 있는 자들도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끌어다가 형벌 받게 하려고 가더니” 여기에 기록되어 있는 ‘열심’이라는 단어가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유대 율법주의자들을 향하여 명명한 헬라어 단어와 동일한 어근을 갖고 있는 단어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본인도 이 열심이 올바른 신앙을 가진 것이라고 착각하며 살았다는 고백을 한 것입니다. 그것은 신앙이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자기 신념이었고, 자기만족이었고, 자기 성취에 불과한 것이었지 신앙이 아니었음을 토로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르다의 열심은 그녀가 할 수 있었던 열심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녀의 열심을 신앙이라고 인정하지 않으셨다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왜 마르다의 열심을 신앙으로 인정하지 않으셨습니까? 그것보다 더 소중한 것을 잃었기 때문이라고 진단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소중한 것은 일이 아니라 주님과 가장 가까운 지근거리에 있음이라는 본질이었습니다. 누가복음 10:39절과 42절을 읽습니다. 39절입니다. “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치에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 42절입니다.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유진 피터슨은 ‘발치’라는 헬라어 단어 ‘푸스’를 ‘바로 앞에서’라고 번역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다는 것이 본질입니다. 주일 예배를 받지 못하고 주방의 일을 하는 것, 말씀의 사모함이 없는 교회의 일을 도맡아 하는 것, 말씀의 능력이 배제된 교회 직분을 갖고 열심만 내는 것이 신앙이 있는 것이라고 착각하는 오류에 우리 교우들은 빠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장로, 권사, 안수집사, 집사 등등의 자리에 서는 것이 우선순위인 사람이 혹시 우리 교회에 있습니까? 상당히 위험한 생각을 갖고 있는 자들입니다. 그 열심이 도리어 교회를 어지럽게 하거나 망하게 합니다. 불의 사자였던 레오나르 레이븐힐이 이렇게 사자후를 선포했습니다. “어떤 직무를 수행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것처럼 불행한 일은 없다.”(하나님의 방법으로 부흥하라,p,70) 누가 하나님의 교회의 일을 하기에 합당한 자격이 있는 자입니까? 우선순위로 말씀의 사람이 되기를 간절히 사모하는 자입니다. 교회 일을 열정을 다해 해야 합니다. 교회 봉사를 최선을 다해 해야 합니다. 교회의 후미진 곳에서 최선을 다하는 사역의 열정도 있어야 합니다. 이것을 무시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러나 명심할 것이 있습니다. 말씀의 사모함이 배제된 열심과 열정은 그릇된 길로 가게 된다는 것을 명심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오늘 본문에 기록된 대로 거짓 복음을 전하는 거짓 교사가 되든지 아니면 그 거짓 복음에 넘어가 구원의 반열에서 이탈되는 불행한 자가 되든지 하나가 될 것이기에 경성해야 합니다. 열심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좋은 열심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본문 18절에서 이렇게 당부하는 것을 잊지 않은 것입니다. “좋은 일에 대하여 열심으로 사모함을 받음은 내가 너희를 대하였을 때뿐 아니라 언제든지 좋으니라”
결론)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이사야 9:7) “이는 남은 자가 예루살렘에서 나오며 피하는 자가 시온 산에서 나올 것임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이다”(이사야 37:32) 내 열심을 신앙으로 착각하는 자는 본질을 꿰뚫지 못합니다. 본질 근처에 가지 못합니다. 유대 율법주의자들이 그랬습니다. 거기에 현혹된 갈라디아 교회 신자들이 그랬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결국 십자가의 흔적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그 외 다른 것을 추구하는 자들은 결국 할례를 선택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오늘 주일에 심비에 새기고 가야할 교훈을 전합니다. 내 열심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열심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룬다는 것을 기억합시다.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는 도구로 사용되려면 그래서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열심을 알기 위해 말씀의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바라기는 제천 세인교회에서 선포되는 말씀을 주님이 가장 가까이 두시기를 바라는 영적 자존감으로 무장하여 여러분 모두가 말씀을 받고 사모하는 바른 열심이 강력하게 임하는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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