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 깨기 (WELCOME)경배와 찬양 (WORSHOP) ● 찬송가 620장 – 여기에 모인 우리 ● 복음성가: 우리 함께 걸어요. | 말씀읽기와 적용 (WORD)● 제목 : 끝까지 가야 가는 것입니다. ● 본문 : 갈라디아서 4:12-20 1) 1차 전도여행 때 갈라디아 교인들의 반응을 살펴보자 ⓵ 12-15절: ⓶ 종합해 본다면 갈라디아 교인들의 바울에 대한 태도는 어떠했나요? |
2) 2차 전도여행 때 갈라디아 교인들의 반응을 살펴보자. ⓵ 16-20절: ⓶ 갈라디아 교인들의 태도에 어떤 변화가 있는가? |
3) 적용하기 ⓵ 갈라디아 교인들을 통해 반면교사 삼아야 할 것은 무엇인가? ⓶ 깨달은 것을 구체적으로 적용해보자. | 사역하기 (WORK)주간 중보기도
1) 5월 사역을 위하여 (어버이주일, 교사주일, 관내 결손가정 돕기 등등) 2) 환우들을 위해 3) 지역 셀이 섬기는 태신자 구원을 위하여 4) 피선교지를 위해 5) 군에 있는 자녀들을 위해 (이장규, 신요한, 김진현) 6) 담임목사의 목양을 위해
셀 사역
1) 결손가정 돌보기 지원과 중보: 7월 마지막 주일 2) 맥추감사주일(7월 첫 주일)에 첫 번째로 태신자 교회 예배 초청하기 3) 새벽예배에 리더들 자원함으로 드리기 4) 공 예배 준수하기 5) 지역 셀 피 선교지 중보하기 | 설교요약 (SUMMARY)본문: 갈라디아서 4:12-20 제목: 끝까지 가야 가는 것입니다.
서론)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믿음으로 시작한 그 순간부터 끝까지의 시간까지 믿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거주하시는 시간은 “ANYTIME”이기 때문입니다. 사무엘상 17:36-37절 말씀입니다. “주의 종이 사자와 곰도 쳤은즉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 이 할례 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이리이까 그가 그 짐승의 하나와 같이 되리이다 또 다윗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내셨은즉 나를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가라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기를 원하노라” 이 본문에서 주목할 것은 하나님께서 목동 다윗을 위해 해주셨던 반응입니다. “건져내셨던 하나님”은 또 “건져 내실 하나님”이라는 다윗의 선포 속에 ‘ANYTIME’의 하나님을 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나에게 최대한의 유익을 주는 어느 장소에만 계시고, 어느 시간에만 계신다고 믿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어떤 어려운 상황이 닥쳐도 언제나 하심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인간이 그렇지 않다는 데에 있습니다. 인간의 속성은 언제나 자기중심적입니다. 해서 마르틴 루터는 타락한 인간의 자화상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homo incurvatus in se” 번역하면 이렇습니다. “자기 안으로 굽어 있는 사람” 그렇습니다. 그러기에 자기중심적이라는 말은 항상 자기 안으로 굽어 있는 상태로 사건을 해석하고 적용하려는 습성이 있습니다. 어떻게? 이해가 되면 수용하고, 유익이 되면 받아들이지만 이해가 되지 않거나 유해하면 언제나 등을 돌릴 수 있다는 것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 이런 종류의 대표적인 무리들이 등장합니다.
본론) 오늘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 바울이 갈라디아 지역에 방문하려 복음을 전했던 역사적 배경을 다시 한 번 복습 할 필요가 있습니다. 주후 48년에 진행된 예루살렘 공회의 총회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할례 논쟁은 이방교회였던 수리아 안디옥 교회의 승리로 결론이 났습니다. 이것을 전제로 접근한다면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말하고 있는 내용을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학자들마다 이견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갈라디아서가 기록되었다고 추론되는 시기를 대체적으로 주후 약 53-55년으로 산정합니다. 그렇다면 이 글을 쓸 때는 이미 할례논쟁이 이미 끝난 시기였다는 말입니다. 그런데도 갈라디아서 안에는 할례 논쟁에 대한 불씨가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이미 교회법으로는 일단락이 된 사건이지만 여전히 갈라디아 지역에 있던 일부 교회에서 배교라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아픈 상태를 목도하고 있는 바울이 제 1차 전도여행 시기였던 44-48년에 있었던 갈라디아 지역 전도 시기의 일들과 바울이 갈라디아라는 지역에 두 번째로 방문했을 때인 주후 50-53년경에 진행된 제 2차 전도여행 때의 그 싸늘했던 분위기를 본문에서 여지없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본문 12-14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은즉 너희도 나와 같이 되기를 구하노라 너희가 내게 해롭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 바울이 회고하고 있는 내용이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갈라디아 지역을 돌면서 복음을 증언했던 초창기 즉 1차 전도여행 시기에 본인의 건강 상태가 최악이었다는 보고였습니다. 바울이 뭐라고 표현했습니까? 13절에서 ‘육체의 약함’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사정이 이런데 갈라디아 교회의 지체들이 바울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를 본문이 제공해 줍니다. 다시 본문 12절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은즉 너희도 나와 같이 되기를 구하노라 너희가 내게 해롭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외모 상 도무지 같이 있기가 어려울 정도로 부담스러웠던 바울이 뭐라 천명합니까? 갈라디아교회 교우들은 그들이 배교를 하기 전에 바울에게 상당히 호의적이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정보입니다. 어디 이뿐입니까? 이어지는 본문 14-15절은 압권입니다.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 내가 너희에게 증언하노니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라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에게 주었으리라” 그런데 이제 말씀드린 또 다른 구절에서 우울한 문장이 등장합니다.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에 있느냐?” (15절 전반절) 이 구절을 유진 피터슨은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그런 사실을 까마득히 잊었습니까?’ 그렇다면 이 우울한 전망이 무엇이었습니까? 본문 16-20절을 마저 읽어보겠습니다.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참된 말을 하므로 원수가 되었느냐 그들이 너희에게 대하여 열심 내는 것은 좋은 뜻이 아니요 오직 너희를 이간시켜 너희로 그들에게 대하여 열심을 내게 하려 함이라 좋은 일에 대하여 열심으로 사모함을 받음은 내가 너희를 대하였을 때뿐 아니라 언제든지 좋으니라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내가 이제라도 너희와 함께 있어 내 언성을 높이려 함은 너희에 대하여 의혹이 있음이라” 이 본문의 배경은 제 2차 전도여행 시기였을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다시 말해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이 배교하던 최 극점의 시기 말입니다. 그토록 바울을 사랑했던 갈라디아 교회의 지체들이 배교 이후에 바울의 적대자로 돌변한 상태를 적나라하게 보여 줍니다. 원수로 여겼고, 바울이 언성을 높일 정도로 등 뒤에 칼을 꽂는 바울의 대적자로 돌아선 것입니다. 극과 극을 달리고 있는 갈라디아 교회 신자들의 자화상을 바울은 여지없이 고발하고 있습니다. 앞서서 설교를 시작하면서 이렇게 설교를 전개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과 달리 언제든지 자기중심적인 축면에서 바라볼 때 본인에게 해가 되거나 불이익이 되는 상황이 되면 자기편이었던 상대에게 미련 없이 등 돌리는 존재라고 했습니다. 그만큼 계산적인 존재이고 이해타산적인 존재라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만 해도 그것을 갈라디아 교회의 배교자들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상의 본문 해석을 통해 저와 여러분이 반면교사를 삼고 역발상의 은혜를 나누어야 할 교훈이 무엇이겠습니까? ※ 그리스도인이라면 끝까지 믿어주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이 교훈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별 대수롭지 않게 넘어갈 수 있는 성경 기사 하나를 소개하겠습니다. 열왕기상 18:42-46절을 읽겠습니다. “아합이 먹고 마시러 올라가니라 엘리야가 갈멜 산꼭대기로 올라가서 땅에 꿇어 엎드려 그의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 그의 사환에게 이르되 올라가 바다 쪽을 바라보라 그가 올라가 바라보고 말하되 아무것도 없나이다 이르되 일곱 번까지 다시 가라 일곱 번째 이르러서는 그가 말하되 바다에서 사람의 손 만한 작은 구름이 일어나나이다 이르되 올라가 아합에게 말하기를 비에 막히지 아니하도록 마차를 갖추고 내려가소서 하라 하니라 조금 후에 구름과 바람이 일어나서 하늘이 캄캄해지며 큰 비가 내리는지라 아합이 마차를 타고 이스르엘로 가니 여호와의 능력이 엘리야에게 임하매 그가 허리를 동이고 이스르엘로 들어가는 곳까지 아합 앞에서 달려갔더라” 엘리야는 갈멜 산으로 올라갑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땅에 무릎을 꿇고 자신의 얼굴을 그 무릎 사이에 넣고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7번까지 기도했다고. 역사가가의 증언에 의하면 같이 갈멜 산에 올라간 엘리야의 사환에게 엘리야는 한 번 기도가 끝날 때마다 비가 올 징조가 있는가를 알아보라고 바다가 보이는 쪽으로 가보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무엇이었습니까? 전혀 그런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성경적인 해석을 하나 나누겠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숫자는 다 그 의미가 있습니다. 3이라는 숫자는 하나님을 의미하는 숫자입니다. 6은 반대로 사탄적인 의미의 숫자입니다. 7은 우리에게는 행운의 숫자로 인식되지만 히브리 민족에게 7은 완전수입니다. 다시 말해 결론에 도달할 때 쓰는 숫자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해석이 가능합니다. 엘리야가 기도하여 비를 내리게 한 숫자는 일곱이라는 수가 아니라 비가 내릴 때까지의 숫자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해석할 때 우리는 대단히 감동적인 은혜를 나누게 됩니다. 엘리야도 중요하지만 엘리야의 몸종이자 사환이었던 무명의 인물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는 그의 주군이었던 엘리야를 끝까지 믿어 준 동역자였으며 믿음의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누구입니까? 끝까지 믿는 사람이며, 믿어주는 사람입니다.
결론) 이제 저는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랑하는 세인지체 여러분! 오늘 설교 제목을 이렇게 정했습니다. “끝까지 가야 가는 것이다.”오늘 함께 갔다고 기고만장하지 맙시다. 내일 함께 갈 것이라고 떠버리지 마십시다. 끝까지 가야 가는 것입니다. 그 전까지는 묵묵히 주의 일을 감당하십시다. 우리들이 걸어야 하는 길을 단거리가 아닙니다. 장거리 중에 장거리입니다. 책에서 이런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십리를 가는 자와 백 리를 가는 자는 신발 끈을 묶는 것부터가 다르다.” 기막힌 성찰이지 않습니까? 나는 우리 세인 교우들이 끝까지 함께 가기를 소망합니다. 끝까지 가야 함께 가는 것이기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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