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 깨기 (WELCOME)여러분은 어떤 경우에 끝까지 물러서지 않나요? | 경배와 찬양 (WORSHOP) ● 찬송가 352장 – 십자가 군병들아 ● 복음성가: 주께서 전진해온다 | 말씀읽기와 적용 (WORD)● 제목 : 물러서면 되겠습니까? ● 본문 : 갈라디아서 4:8-11 1) 지난 시간 우리는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는 특권을 가진 자’라는 선언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현재 갈라디아 교인들의 상태는 어떠합니까? ⓵ 천박한 초등학문은 무엇인가? ⓶ 날과 달과 절기를 지킨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⓷ 위의 두 가지를 종합하여 갈라디아 교인들의 상태를 설명해보자. |
2) 갈라디아 교인들이 후퇴하게 된 이유와 교훈을 찾아보자. ⓵ 갈라디아 교인들이 후퇴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⓶ 갈라디아 교인들의 후퇴를 통해 깨닫는 교훈은 무엇인가? |
3) 적용하기 ⓵ 여러분이 싸워야할 대상은 무엇인가? ⓶ 위의 대상과 싸우기 힘든 이유를 말해보자. ⓷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싸워서 이겨야 하는 이유를 분명히 하라. | 사역하기 (WORK)셀 사역
1) 결손가정 돌보기 지원과 중보: 7월 마지막 주일 2) 맥추감사주일(7월 첫 주일)에 첫 번째로 태신자 교회 예배 초청하기 3) 교회학교 교사들에게 격려 메시지 문자 보내기 4) 새벽예배에 리더들 자원함으로 드리기 5) 공 예배 준수하기 6) 지역 셀 피 선교지 중보하기
주간 중보기도
1) 5월 사역을 위하여 (어버이주일, 교사주일, 관내 결손가정 돕기 등등) 2) 환우들을 위해 3) 지역 셀이 섬기는 태신자 구원을 위하여 4) 피선교지를 위해 5) 군에 있는 자녀들을 위해 (이장규, 신요한, 김진현) 6) 담임목사의 목양을 위해 | 설교요약 (SUMMARY)본문: 갈라디아서 4:8-11 제목: 물러서면 되겠습니까?
서론)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성경이 요구하는 분명한 의지는 “믿음의 싸움에 있어서 후퇴하지 말고 앞으로 나아가라”라는 명령입니다. 뒤로 물러나는 것을 하나님은 기뻐하지 않으신다는 한 구절을 소개하겠습니다.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히 10:38) 어떤 일이 있어도 결코 물러서지 말라는 것입니다. 근래, 한 교단에서 이단성이 있는 몇 몇 기관과 단체들을 총회 차원에서 조사하라는 권고 명령이 하달되었는데 그 단체들의 면면은 이단으로 정죄를 받아야 할 단체들이 아니라 한국교회의 병폐들을 좌시하지 않고 쓴 소리를 해 주고 있는 해서 그나마 한국교회를 다시 살리기 위해 몸부림치는 작은 소수의 개혁적 목소리를 내는 단체들과 목회자들입니다. 왜 이런 무리수를 그 교단에 두고 있는가 하면 본인들이 행하고 있는 전혀 성서적이지 않은 불법에 대하여 쓴 소리를 던지는 그들이 눈에 가시 거리이기 때문입니다. 해서 큰 교단에 반기를 들지 말라는 엄포를 낸 것입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개인적인 소회는 지금 교회 개혁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몇 몇 역사의식이 있는 목회자들과 사역자들은 그 압박에 굴복하여 자기들의 생각을 철회하거나 포기할 사람들이 아닙니다. 해서 저 또한 그들을 응원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선하신 뜻, 그리고 성서가 증언하고 있는 분명한 신학적 정론을 전제할 때 물러서는 것은 하나님을 아프게 하는 일인데 그들은 결코 물러서지 않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본론) 바울은 지난 본문 텍스트에서 갈라디아 교회 신자들에게 이렇게 강력하게 선언했습니다. 우리는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의 구원의 실천과 성령 하나님께서 행하신 그 구원의 완성을 통해 종의 자리에서 상속자의 자리에 앉게 되었고, 그 은혜를 받은 자인 우리들은 자녀로 급상승하는 신분의 변화가 이루어짐으로 도저히 이전 같으면 꿈에도 상상할 수 없는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를 수 있는 특권을 받게 되었음을 적나라하게 선언했습니다. 이런 강력한 혁명적 선언을 한 바울은 이 은혜를 경험했는데도 불구하고 어처구니없이 다시 종의 자리로 전락되기를 원했던 한심했던 신자들을 질타하고 있는 것이 본문의 중심 내용입니다. 본문 8-10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그러나 너희가 그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노릇 하였더니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더욱이 하나님이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그들에게 종노릇 하려 하느냐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이 구절은 갈라디아 교회에 있었던 배교자들이 복음을 알기 전의 상태와 알고 난 이후의 상태를 분명히 구분하고 있는 구절입니다. 본문 8절에 기록된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이 누구입니까? 이방 종교의 신들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갈라디아 지역에서 살던 이방적인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알기 전에는 우상에게 종노릇하는 신세였지만, 이후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은 후에는 하나님을 아는 존재가 되었을 뿐 아니라 하나님도 관심을 갖는 귀중한 존재가 되었는데도 정말로 유감스러운 행동을 갈라디아 지역 교회의 신자들이 자행했음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었습니까? 본문 9절 하반절을 다시 한 번 음미하십시다.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그들에게 종노릇 하려 하느냐” 우리는 천박한 초등학문을 율법주의라고 이전 강해를 통해 배웠습니다. 이스라엘 종교만이 추구하는 율법적인 규례들을 지킬 때 구원을 받으며 아브라함의 후손이 될 수 있다는 편협한 종교 우월주의인 율법주의임을 공부했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율법주의로의 회귀를 본문 10절에서 구체적으로 이렇게 고발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이 구절은 약간의 설명이 필요한 대목입니다. 이스라엘 신앙공동체는 출애굽 이후 광야에서 아주 철저하게 하나님이 선포하신 절기를 지켰습니다. 유월절, 칠칠절(오순절), 수장절(초막절) 등등이 그러한 것들이었습니다. 주목할 것은 이 절기들은 철저하게 하나님께서 장차 올 메시아를 통해 이루실 구원의 예표로 지키던 것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유월절은 어린 양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보혈의 피를 흘리실 것을 예표하는 절기입니다. 오순절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주님이 다시 사신 이후 약속하신 성령의 임재를 이루시는 날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더불어 초막절은 광야에서의 삶을 사는 동안 척박하고 힘든 여정이었지만 끝내는 그들이 그 어려움을 이겨내고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에 대한 감사를 표하는 절기이기에 이 절기는 다시 오실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대하는 절기로 학자들은 해석합니다. 이렇듯 메시아이신 예수께서는 오셔서 구원을 성취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은 다시 오심을 약속하셨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갈라디아교회의 신자들이 유대인들이 지키는 절기 사수로 돌아선 것은 결코 예수의 사역을 인정하지 않고 애굽에서의 삶이나 아니면 광야에서의 율법적인 삶으로 후퇴하겠다는 선전포고와 다를 바 없었기에 바울은 탄식한 것입니다. 이 장탄식을 한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결론적으로 유감을 표한 내용이 무엇이었습니까? 마지막 11절을 읽습니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 그렇습니다. 바울의 장탄식은 정말로 가슴 아픈 소리였고 진정성이 있는 외침이었습니다. 왜 바울의 사역이 헛된 것으로 돌아갈 위기에 봉착했습니까? ※ 할례가 ‘내 몫’이라는 감각적인 행위에 대하여 만족시켜주었기 때문입니다. 이 교훈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 밝히겠습니다. 먼저 바울은 내가 구원을 받음에 있어서 내 몫은 필요 없음을 강력하게 시사했습니다. 다만 구원의 사건은 전적으로 주님의 몫임을 강조하였습니다. 헌데 바로 이 대목에서 저와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심리적인 헛함을 갈라디아 교회 신자들도 매일반으로 갖고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어떤 것입니까? “뭐가, 이렇게 쉽지!” 이런 감정적인 소회로 파급되는 것이 이것입니다. “혹시 가짜가 아닐까!” 구원의 조건이나 대가가 내 몫으로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너무 허접해 보인 것입니다. 이에 반해 유대에서 내려온 율법주의자들은 갈라디아 교회의 신자들이 허전해 하는 부분을 터치해 준 것입니다. 가려운 곳을 긁어 준 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만으로는 안 된다는 것을 전제하면서 내 몫을 요구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할례였습니다. 유대인들이야 그렇다손 치더라도 갈라디아지방에 살고 있었던 이방인들에게 있어서 할례는 대단히 부담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도리어 아이러니하게도 이방인들에게 ‘내 몫’의 부담으로 작용한 것입니다. 구원을 받았다는 엄청난 사실에 이 정도의 부담을 감당하는 것이 마땅하게 여겨졌고, 또 그래야 ‘내 몫’의 짊어짐이 된다는 자기만족을 충족시켜준 결정적인 요소가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오늘 교훈을 우리들에게 적용할 차례입니다. ※ 비성서적이고 비신학적인 일체의 것에 대하여 물러서지 않기를 바랍니다. 출애굽기 14장으로 여러 교우들을 초대합니다. 모세의 진두지휘 아래에 있었던 이스라엘 신앙공동체는 430년이라는 그 지긋지긋한 애굽의 노예 생활에서 해방되어 바알스본 맞은편 비하히롯 해변 가에 장막을 쳤습니다. 문제는 바로 그곳으로 바로의 군사들이 때늦은 후회를 하고 이스라엘을 다시 포로로 잡기위해 진격해 온다는 비보를 들은 것입니다. 이 무시무시한 상황을 접한 이스라엘 공동체가 애굽에서 일으키셨던 하나님의 그 놀라운 기적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곧바로 모세를 향하여 원망을 터뜨리는 아쉬운 장면이 나옵니다(출 14:11-12). 이런 불평을 터뜨린 이스라엘 공동체를 향하여 하나님이 제시하신 내용이 무엇이었습니까? 출애굽기 14:13-14절을 봅니다.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압도하는 구절이 보이십니까?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무슨 말입니까? 너희들의 몫은 없다. 내가 행할 몫만 있다는 말이 아닙니까? 결론이 무엇입니까? 조금 과격하게 표현하면 그러니까 애굽으로 물러가려는 한심한 불신앙에 대하여 입 닥치라는 것입니다.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 그곳에서 다시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은 비성서적인 일이었습니다. 비신학적인 일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비성서적이고, 비신학적인 일이라면 맞서 싸워야 합니다. 뒤로 물러서면 안 됩니다. 그 사안이 마치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무리한 것이며 버거운 일이며 도무지 승산이 없는 일이라도 물러서서는 안 됩니다. 마이클 호튼 교수는 다른 복음(갈 1:6-8)을 십자가의 자리를 꿰차고 앉은 심리학, 신비주의, 성공의 복음 등등으로 말했습니다. 이 세 가지가 왜 현대 교회의 화두가 되었을까요? 신자들에게 안락함을 주기 때문입니다. 신자들에게 평안함을 주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여기에 대단히 위험한 맹점이 있다는 점입니다. 안락함이 복음인가? 평안함이 복음인가? 에 대한 실제적인 답을 제시해야 하는데 교회가 이 점에 대하여 즉답을 회피합니다. 이럴 때 제가 인용하기 좋아하는 글은 데이빗 플랫 목사의 벼락입니다. “뒷짐을 지고 물러서서 그리스도와 가벼운 교제만을 나누며 기계적으로 교회를 드나드는 그리스도인들은 안전할 뿐 아니라 세상의 미움도 사지 않는다. 설령 그리스도인이라는 딱지를 달고 있다고 해도 세상에 사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을 함께 추구하면 사랑을 받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공 신화를 쫒는 기독교와 성도는 세상과 충돌할 일이 없다.”(데이빗 플랫, “래디컬”,p,223.)
결론) 이제 저는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주님이 아니라고 하면 아닌 것입니다. 주님이 그렇다고 하면 그런 것입니다. 주님이 예스하신 것이 올바른 신학입니다. 주님이 맞는다고 하신 것이 있으면 그것이 성서적인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해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물러서지 않는 것입니다. 내 만족을 신앙으로 착각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을 만족시키는 것이 신앙입니다. 세인 공동체는 이것을 위해 부름 받은 공동체입니다. 다시 권면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에 한 발자국도 뒤로 물러서지 않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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