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당에 세팅해 놓은 원적외선 튜브 난로 하나가 고장이 나서 지난 주간에 A/S 수리를 받았습니다. 도착한 기사 왈, 노즐을 갈아야 한다고 말하고는 교체했습니다. 몇 개 나사를 빼고 노즐을 교체하고 다시 세팅하는 데 소요된 시간은 불과 5분 남짓 걸렸습니다. “비용은 100,000원입니다.” 영수증을 받아보니 ‘노즐 교체 비용’이라고 적시되어 있었습니다. 조금 부아가 났습니다. 아주 작은 부품(내 생각에는 단가가 1,000원도 안 되어 보임) 하나 교체했고, 노동시간도 채 5분이 걸리지 않는 아주 짧은 시간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수리 비용이 100,000원이라고 청구해서 꼼짝없이 비용을 지불한 뒤, 든 감정입니다. “조금, 심하지 않나!”, “칼만 안 들었지, 완전 도둑이네!” 등등 속상한 마음이 스멀댄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다가, 문득 이런 느낌이 들어 자위하기로 했습니다. “억울하면 기술력을 가져.” 표현은 기술력이라고 했지만, 다른 단어로 바꾸면 아마도 “전문성”이라는 어휘로 바꿀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왜 공부하지? 전문성을 취득하기 위함입니다. 다른 이와 차별적인 전문성을 갖기 위해 공부하고, 기술을 습득하는 게 사실입니다. 누구도 범접할 수 없고, 누구도 토를 달 수 없는 전문성이야말로 내 삶을 영위할 수 있는 무기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영적으로 적용하니 이 또한 은혜로 다가왔습니다. 세상이 교회를 걱정하는 시대이다 보니, 교회가 세상과 같다면 도대체 왜 교회를 나가야 한단 말인가? 질문하며 도전하는 시대가 오늘입니다. 그 질문은 무의미한 질문이 아니라, 오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답해야 하는 엄중한 물음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정직한 답은 세상이 절대로 줄 수 없고 비교도 할 수 없는 고도의 전문성을 교회와 성도가 장착하고 있을 때만 답할 수 있습니다. “교체 비용은 100,000원입니다.” 난로 자체 비용이 약 100만 원 정도인데, 수리 비용이 100,000원이라니 기가 막혔지만 토를 달 수 없었습니다. 마음은 영 개운치 않고, 찝찝했지만 반론할 수 없었습니다. 내가 할 수 없는 고도의 전문성을 기초로 고장난 난로를 고쳐놨으니 말입니다. 교회가 교회의 사명을 오롯이 감당하고, 세상은 하늘이 두 쪽이 나도 결코 줄 수 없고, 따라잡을 수 없는 것을 교회가 갖고 있을 때 세상도 토를 달지 못하고 인정하지 않겠습니까? 더불어 이것 때문에 교회와 성도가 노래할 수 있으며, 말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세상이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교회만이 갖고 있는 전문성이란 과연 무엇일까? 상식적 영성입니다. 한동안 비정상을 정상으로 돌려놓아야 한다는 신드롬이 한국 사회를 강타했습니다. 하지만, 겪어본 결과, 그렇게 말한 이들이 도리어 지극히 정상적인 것을 비정상으로 호도하여 비정상을 정상으로 둔갑시키는 어처구니없는 망령된 일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해서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이 무질서가 판을 치는 랜덤의 난장판이 되고 말았습니다. 대단히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랜덤이 된 세상도 참담한데 최후의 보루가 되어야 하는 교회마저도 이런 틀에 갇혀 버리면 정말 희망을 노래할 수 있는 여백이 단 한 군데도 존재하지 않는 절망의 세상이 됩니다. 오늘, 주군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인교회는 물론 그대와 나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상식적 영성입니다. 교회 주차장에 플래카드(PLACARD)로 걸어놓은 문구를 날마다 곱씹는 12월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 땅에 전쟁이 아닌, 평화(샬롬)가 임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교회는 이런 세상을 만들어내야 하고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삶을 살아내야 합니다. 이게 교회와 그리스도인이 지녀야 할 ‘전문성’ 즉 ‘상식적 영성’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