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덜겅’ 길을 걸었지만 ‘너덜겅’은 ‘돌이 많이 깔린 비탈길’을 의미하는 순수 우리말입니다. 반면 ‘너설’이라는 단어도 있습니다. ‘너설’은 험한 바위나 돌 따위가 삐죽삐죽 나와 있는 곳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요즘 우리말 공부에 흠뻑 빠져 있습니다. 저는 글을 쓰는 목사이다 보니 좋은 문장을 만들어야 한다는 왠지 모를 부담을 상시 가지고 있습니다. 좋은 말, 예쁜 말은 우리말 된 한자 단어가 아닌, 순수 우리말에 닿아 있음을 알고 우리말 공부에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2024년을 보내야 하는 막바지에 있습니다. 이맘때가 되면 흔히 쓰는 단어는 ‘다사다난’(多事多難)이라는 사자성어입니다. 전적으로 개인적인 사견입니다만 2024년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이 단어에서 비껴갈 수 있는 국민은 없다고 단언할 만큼 올해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오늘 주일이 2024년 51주 차 주일이다 보니, 지난 한 해의 회한이 밀려오는 게 사실입니다. 그러다가 문득, 하나님께 이런 감사가 스쳐 올라왔습니다. ‘너덜겅’ 길을 걸었지만, ‘너설’에 부딪쳐 다치지 않게 하셔서 감사하다는 소회 말입니다. 지역에 존재하는 하나의 개교회를 섬기는 목사는 12월이 되면 많은 회한에 잠기는 것이 사실입니다. “조금 더 잘할 수 있었는데!, 참 잘했네!, 왜 그랬지?, 그래, 그래도 이 정도면 선방한 거야” 등등 온갖 감정들이 봇물 터지며 탄성과 탄식에 빠지곤 합니다. 이게 목사의 삶이야! 라고 자위하곤 하지만, 언제나 힘든 건 떠나보내야 했던 지체들을 반추할 때입니다. 지역을 떠나 이사한 이들, 모험으로 먼 타지에 있는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결심했지만, 결국 환경으로 그 결심을 포기해야 했던 이들이 오늘은 그립습니다. 후과(後果)는 그들의 몫이기에, 나는 자유롭다고 나를 올곧게 세워보지만, 늘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나를 타격하는 것은 목사가 운명적으로 체휼해야 하는 ‘스프랑크니조마이’임에 틀림없습니다. 사무총회록에 교우 이름을 지우는 것은 목사에게 최고의 아픔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참 공평하신 분입니다. 그 빈자리에 새롭게 이름을 올리도록 한 지체를 보내주셨으니 말입니다. 2025년, 하나님이 위탁해 준 양들을 정성스레 섬기려 합니다. 온 천하보다 귀한 것이 영혼이라고 귀띔해 주신 분이 주님이시기에 또 지체를 섬기며 달려 보렵니다. 종도, 지체들 앞에도 ‘너덜겅’의 길이 있겠지만, ‘너설’에 다치지 않도록 엎드리고 섬기며 달려가 보렵니다. 이 마음이 있어서 그런지 오늘은 순교를 6개월 앞둔 시기에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가 프린츠 알브레히트 슈트라세 지하 감옥에서 쓴 글이 나에게 더 큰 감동을 주는 주일입니다. “놀랍게도 선한 권능에 감싸여 보호를 받으니 우리는 다가올 일을 자신 있게 기다리노라. 하나님은 저녁에도 아침에도 우리와 함께하시고 새날에도 확실히 함께하신다.” (디트리히 본회퍼, 『옥중서신, 저항과 복종』, 복 있는 사람, 393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