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양단

제목둘째 날 오전 10월 29일(화): 하이델베르크에서2024-12-03 08:17
작성자 Level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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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부터 시차와 싸워야 하는 날이 시작이라 아침에 일어났는데 몸이 천근만근이다. 태어나 처음 발을 디딘 독일의 첫날 아침이 잔뜩 찌푸려 있었던 이유는 유럽 기상 자체가 저기압 지대이기에 일 년 사시사철 중에 맑은 하늘 보기가 쉽지 않다는 이유 때문인 데도 나는 날씨가 이래서 몸이 더 무거운 건 아닐까, 괜한 염려를 했음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하루를 묵은 호텔 조식은 그런 데로 선방했다 싶었다. 바울의 전도 여정에 올랐을 때 튀르키에의 악몽이 아직도 선하기에 내심 종교개혁지, 순례 기간에도 식사가 마음에 걸린 게 사실이다. 아내가 캐리어를 굳이 세 개로 만든 이유는 가방 하나에 음식을 싸야 했기에 욕심을 냈는데, 독일에서 만난 첫날 음식은 튀르키에 음식에 비하면 할아버지라고 할 정도로 괜찮았다. 그럼에도 이제 집 떠난 지 이틀이 채 안 되었는데 김치가 먹고 싶은 것은 나 스스로가 국내용이라 그런 것이니 무슨 변명이 필요하나 싶다. 독일 종교 개혁지 투어의 첫 번째 행선지는 하이델베르크였다. 숙소에서 약 1시간 버스로 이동하여 하이델베르크에 도착했다. 유트브나, 황태자의 첫사랑의 무대 배경이었기에 아주 가끔 고전 영화 짤로 슬쩍 보았던 바로 그 하이델베르크에 발을 디뎠다고 생각하니 감개무량했다. 가이드는 하이델베르크를 이렇게 간략하게 소개했다.

 

하이델베르크가 유명한 것은 대학 때문입니다. 지금 여러분이 발을 딛고 있는 이 지역 전체가 대학교라고 여기시면 됩니다. 우리나라 대학처럼 담장이 있는 특정 공간의 대학이 아니라 하이델베르크대학이라는 개념은 도시 전체라고 보셔야 합니다.”

 

도시라는 개념을 전제로 볼 때는 그리 넓지 않은 공간이라고 보이지만, 대학 캠퍼스라는 구도로 볼 때는 대단히 광범위한 크기라고 정의해도 될 만한 하이델베르크 소도시를 걸으면서 유럽 도시들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는 광장을 보며 감탄했고 (물론 앞으로 나누게 될 오스트리아에 비하면 별것 아니었지만) 다닥다닥 붙어 있는 수백 년 이상 된 건물들의 보존, 더불어 오랜 역사에 대한 흔적이라는 가이드의 설명에 유구무언할 수밖에 없는 감동에 젖기도 했다.

십수 년 전 이스라엘 성지순례 기간, 순례 장소로 홀로코스트 기념박물관인 야드 바쉠을방문했다. 순례팀이 반드시 일정에 삽입해야 한다는 의견을 받아들여 주최 여행사에서 야드 바쉠을 탐방하게 해 준 것에 대해 지금도 감사한다. 아우슈비츠의 통곡을 잊지 말자는 유대인들의 정신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야드 바쉠 탐방의 압권은 2층 전시실에 붙어 있는 동판이었다.

 

“Forgetfulness leads to exile, while remembrance is the secret of redemption.”

 

나는 이 동판 문장을 이렇게 의역하며 새긴다.

 

과거의 기억을 잊어버리는 것은 포로 생활했던 그 재앙으로 이끌지만, 잊지 않고 기억해 낸다는 것은 우리를 구원으로 이끌어주는 힘이다.”

 

엄청난 성찰이었기에 부럽기가 그지없었다. 하이델베르크는 제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을 때, 독일을 공격했던 연합군 폭격에 피해를 당했던 아픔의 도시였다. 건물 곳곳에 총탄의 흔적을 고스란히 남겨둔 이유, 유감스럽게 올라가지는 못했지만, 고성의 한 부분의 담벼락이 완전히 부서져 내린 것을 그대로 보존한 이유 등등이 다시는 전쟁을 일으키는 당사자가 되지 말자는 정치 지도자들의 국가적 의지의 표명이라는 가이드의 설명을 듣고 나니, 지근 거리에서 전혀 반성하지 않는 일본이라는 나라와 비교가 되어 씁쓸했다.

이미 너무 잘 알고 있는 그대로 루터는 15171031, 비텐베르크 성당 정문에 면죄부의 부당성, 동시에 교황무오설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비평적 성찰을 담은 95개 조항을 내 걸었다.

혁명적 선언문을 루터가 내 건 이유는 가톨릭교회를 파괴하거나 전복하자는 의도가 전혀 아니었는데, 파장은 놀라웠다. 루터의 반박문은 채 2주 만에 독일 전역으로 퍼졌고, 급기야 한 달 만에 서유럽 전체 지역에 널리 펴져 나가는 일파만파의 파장을 일으켰다. 재론하지만, 가톨릭교회를 전복하려는 시도로 95개 조항의 반박문을 내 걸었던 아니었고 교회가 잘못 가고 있는 방향성을 바로 잡자는 선한 의도로 토론을 제기한 것인데, 신학적 내공이 전혀 없었던 가톨릭은 루터의 토론에 대항할 만한 지성이 없었기에 토론에 임할 나름의 시간이 필요했고, 결국 시간을 번 가톨릭 당국은 그 이듬해인 1518년에 하이델베르크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에서 공개 토론을 열었다. 이 토론회를 소위 하이델베르크 논쟁이라고 학자들은 개진한다. 이 토론 논쟁에서 그 유명한 루터의 40개 논제 즉 십자가 신학이 탄생하게 되었는데 그 장소가 바로 하이델베르크였다. 이 논쟁이 벌어진 지 506년이라는 세월이 지난 후 발을 디딘 하이델베르크에서 나는 그날에 루터가 외쳤을 울림에 대한 공명이 귓가를 때리는 듯했다. 가이드가 최선을 다해 설명하는 십자가 신학를 듣다가 왠지 모르게 부족한 2%가 느껴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학을 접하지 않은 이가 설명하는 십자가 신학에 대한 조망은 나름 선방하고 있다는 긍정의 평가를 내리고자 한다.

한국교회를 한동안 잠식했던 긍정의 신학이 있었다. 노만 빈센트 필, 로보트 슐러, 조엘 오스틴 등의 계보로 이어지는 긍정 신학을 그대로 지지한다면 가장 불행한 분은 우리 주군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루터가 제시한 십자가의 신학’(theologia crucis)을 알게 하신 원초적인 주체자이시다. (primary source) 그분은 중세 가톨릭이 지지한 영광의 신학’(theologia gloriae)과는 전혀 관계가 없으신 분이다. 전 인생을 갈릴리에서 사역하시면서 예언자 이사야의 말씀은 인용하신 그대로 누가복음 4:18-19절의 말씀대로 사셨던 분이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영광의 신학대로 접목하자면 주 예수 그리스도는 잘못 인생을 사신 케이스가 된다. 하지만 나의 주군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의 캐리그마를 이루시고, 전 인류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기꺼이 십자가를 수용하신 분이시고, 그러기 위해 마땅히 십자가 지고 비아돌로로사의 길을 걸으셨던 주님이다. 루터가 약 500 여년 전에 깜깜했던 십자가 신학을 주창하며 사자후를 던졌을 바로 하이델베르크에 내가 서 있다는 것만으로도 전율하는 감동이었다. 하이델베르크 광장 모서리에 원형 동판이 있다. 그 동판에 이렇게 기록이 남아 있다.

 

“ZUM GEDENKEN AN SEINEN AUFENTHALT IM KLOSTER DER AUGUSTINER UND AN SEINE HEIDELBERGER DISPUTATION AM 26. APRIL 1518. IM LUTHERJAHR 1983.”

(1518426일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 체류와 하이델베르크 논쟁을 기념하기 위해 1983년 루터의 해를 지정하면서)

 

이 동판이 없다면 하이델베르크에서 있었던 종교사학적인 위대한 일은 세간에 잊혀진 일일 텐데 그나마 이 동판이 있어 나름의 위안으로 삼았다.

하이델베르크 광장에 서 있어 웅장하게 눈에 들어온 성령교회(Heiliggeistkirche)는 또 하나의 위로였다. 루터가 논쟁을 가했던 1518년에는 전형적인 가톨릭 성당으로 사용되었던 이곳이 종교개혁이 일어나고 30년 전쟁이라는 종교 전쟁의 막을 내린 뒤, 지금은 루터란 처치(Lutheran church)로 사용되고 있다는 가이드의 설명은 개신교 목사로 현장에서 부대끼고 있는 현직 목사인 내게는 왠지 모를 절절함으로 다가왔다.

포토존을 소개하겠다는 가이드의 말대로 칼 대제를 기념하는 다리로 이동하여 네카어 강과 라인강의 합수머리인 지역에서 동화에 나올 법한 무대를 배경으로 여기저기에서 인생 컷을 했다. 내 삶의 역사 속에 다시 이곳에 올 수 있을까 생각하며 아내와 부지런히 한 컷하며 생의 기념을 남기려고 노력했다. 날씨가 궂어 하이델베르크의 명물이라고 할 수 있는 고성을 배경으로 사진을 남길 수 없었던 것은 매우 유감이었지만, 하이델베르크에서 만난 첫 번째의 루터 흔적은 오랫동안, 기억의 저장고에 남아 있을 것 같다.

오후에는 보름스가 기다리고 있다. 종교개혁지 순방 중에 가장 기대되는 바로 그곳. 그곳에는 또 어떤 설렘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