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영성을 따라서』라는 제목으로 한 주간, 117편부터 122편까지 시인들의 노래를 찾아 교우들과 여행을 마쳤습니다. 함께 동행한 지체들께 감사드립니다. 뒤돌아보면 젊은 날, 내 목회의 전부는 강해 설교로 어우러진 푸르름의 모험이었습니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저녁 말씀 사경회, 특별새벽기도회 등등 특별히 제한적 시기에 교우들과 함께했던 말씀 여행은 예외없이 강해 사역으로 감당해 왔던 것이 지난 목양의 나날, 펼쳤던 줄거리였습니다. 이것이 영적 고집으로 자리매김하여 제 설교 사역의 전부는 강해 사역으로 고정되었습니다. 강해 설교 준비는 제목 설교나, 주제 설교 혹은 절기 설교에 비해 대단히 많은 공부와 열심과 영적인 노력을 요구하는 작업을 수반합니다. 해서 강해 설교를 준비하는 것은 철저한 준비와 노력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럼에도 나는 왜 이렇게 영적인 고통을 수반하고 뼈를 깎는 산고가 필요한 강해 설교를 고집하는가를 자문한다면 이유는 단 한 가지입니다. 그래야 공부하기 때문입니다. 이번 저녁 말씀 사경회도 매일반이었습니다. 집회 시간에 피력했던 것처럼, 시편을 노래한 시인들의 영성을 따라가는 일은 고된 일이었습니다. 그들의 영성을 따라잡아야 했고, 시인들의 희로애락을 맛보아야 했으며, 지리적, 시대적, 환경적 배경이 다른 이의 삶의 정황을 해석해야 했기에 그랬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전통적으로 학습해 왔고, 답습해 왔던 특별 집회는 설교의 양도 많아야 하고,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는 교우들의 고정관념을 탈피해 더 짧은 시간에 함축된 메시지를 전달하고, 그러나 식상하지 않은 메시지를 교우들에게 공급해야 한다는 긴장감과 절박함이 오롯하여 한 주간, 기진맥진했던 게 사실입니다. 누군가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 했지만, 2024년 2차 말씀 축제를 마치고 나니 여러 생각이 오가는 게 사실입니다. 자막 세팅을 맡은 부 교역자에게 설교 시에 인용한 성경 구절에 대한 오류를 두 번에 걸쳐 지적당했습니다. 정신이 번쩍 드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전 같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가령 예를 든다면 이런 경우입니다. “목사님, 시편 120:26〜27절이 아니라, 102:26〜27절입니다.” 정말로, 이런 실수는 웬만해서 안 했는데 이제 집중력도 많이 떨어지는 느낌이 들어 속상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이제는 행사를 진행하거나 사역을 벌리려면 겁이 나는 게 사실입니다. 선방하는 방법은 일을 하지 않거나, 집중력을 잃지 않도록 영적 긴장감을 극대화하는 일인데, 이제는 둘 다 선택하기가 쉽지 않은 시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부정적인 면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섯째 날 사역을 마친 후, 교우 한 명이 응원과 격려를 해 주었습니다. “목사님, 그토록 함께 나누고 싶었던 시편 여행을 해 주셔서 너무 감사했습니다. 계속 집중해서 응원하겠습니다. 파이팅 하시기를 바랍니다.” 한 주간, 교우들이 잘 순종해 주어 2024년 저녁 말씀 축제를 은혜중에 마쳤습니다. 시인이 뿌렸고, 지니고 달려던 영성의 그림자를 우리도 밟고 시대적으로 우울한 오늘, 세인 지체들이 그 여행을 잘 경주했으면 싶습니다. 12월이 시작되었습니다. 1년 중에 긴장하지 않는 월(月)이 있을 수 없지만, 그래도 정서적으로 가장 분주하고, 가장 긴장하며, 또 이런저런 목양의 추억 때문에 울고 웃어야 하는 결산의 시기가 도래했기에 옷깃을 다시 여며 봅니다. 저녁 말씀 축제 기간, 예배위원의 수종으로, 특별 찬양으로, 기도, 안내와 드림 섬김으로, 더불어 카풀 사역으로 사역이 원활하게 진행되도록 힘쓴 교우 모두에게 격려와 응원의 박수를 보내드립니다. 서재 창문 밖으로 보이는 제천 도성은 불과 며칠 전만 해도 분명히 가을을 알려주었는데, 지금은 온통 백색과 은색으로 옷을 갈아입었습니다. 이미 겨울이 성큼 발을 내디뎠습니다. 이번 겨울, 모든 이가 춥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이 목사의 소박하지만 간절한 소망입니다. 오늘은 주일입니다. 내게 주어진 주일은 다음 주일을 맞이할 수 없었던 이에게는 무척이나 사무치게 그립고 그리웠을 주일입니다. 주일이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