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년 전, 직전 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했다.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이 부 교역자 팀워크를 만드는 일이라, 교단 홈페이지에 청빙 공고를 냈고, 지원서를 낸 여러 명을 인터뷰한 끝에 싱글 전담 전도사를 청빙 하게 되었다. 그때는 그랬다. 그때가 그립다. 신대원을 졸업한 뒤, 전담 사역의 첫발을 떼는 신출내기 교역자였기에 어설픈 구석이 많은 친구였지만, 그를 청빙 한 이유는 계산하지 않는 순수함이 보였기 때문이다. 약삭빠르고 머리를 굴리고 계산하는 이들이 우글우글한 데, 총각 전도사는 순박함이 내면에 깃들여 있음이 보였기에 청빙 했다.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많이 다듬어지고, 훈련이 필요한 부 교역자였지만, 신실하게 충성하는 모습에 적지 않은 신뢰가 느껴졌던 부 교역자였기에 마음에 담았다. 이후, 제천 사역을 마치고 또 다른 사역지에서 부 교역자 경험을 쌓아야 했기에 이임했지만, 그는 마음속으로 항상 응원한 부 교역자였다. 목사 안수를 받고 난 후에 거친 교회에서 분투하고 있음을 알았던 후배가 지역 교회 사역을 접고 미얀마를 품었다. 이후 교단 선교사 훈련원에서 소정의 교육을 마치고 미얀마로 떠났다. 교단은 다르지만, 교회에서 후배를 협력 선교사로 선정하고 정기적인 후원과 중보로 돕는 어간, 그에게서 아픈 소식이 들려왔다. 직장암 3기 소식을 듣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열악한 환경에서 이런저런 지난한 부 교역자 삶을 살았던 후배의 이력을 아는 선배 목사로서 후배를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밀려왔다. 아직, 하윤이(딸)가 어린데, 이제 오십이 채 안 된 나이에 직장암 선고라니! 생각하니 선배로서 도와야 한다는 중압감과 부담감이 나를 옥죄기 시작했다. 교회에서 물질적으로 돕는 일을 우선시했지만, 나름의 한계가 있기에 서둘러 후배가 속한 교단의 가까운 친구들과 후배들에게 전화했다. 특히 해외선교위원회에 연관이 있는 지인 선후배들에게 소식을 알리고 지난한 투병 과정을 시작해야 하는 후배가 힘들지 않도록 법 테두리 안에서 민감한 경제적 지원을 부탁했다. 세인 교회는 후배의 치유를 위해 중보 사역을 시작한 지 이미 오래다. 모이는 기도 시간에 거룩한 부담감으로 엎드리고 있다. 단기간에 끝날 싸움이 아닌 것을 알기에 영적 지구력을 갖고 후배를 위해 같이 걸어가려고 한다. 다행히 다른 장기에 전이 소견이 보이지 않는다는 후배의 전화를 받고 감사한 마음에 울컥했다. 섬기는 교회에 암 투병 중인 지체들 때문에 반(半)의사가 된 아내가 암 투병 중에 먹어야 하는 음식, 먹으면 안 되는 음식에 대한 레시피를 만들고 있다. “목사님, 분명히 지난한 과정이기는 하지만 반드시 이길 거라는 믿음으로 저도 중보하고 있어요. 같이 중보로 걸을 게요.” 직전교회에서 사역할 때, 특히 순수한 후배를 아꼈던 아내가 스피커폰으로 격려하는 전언의 안부를 듣고 내내 따뜻했다. 그래, 이게 목사의 연대다. 이게 목사의 사랑이다. 외롭고 또 외롭지만 이 길을 걷는 이유다. 목사가 목사를 돌보고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게 말이 되는가! 이런 연대로 인해 목사는 부도옹(不倒翁)의 믿음으로 일어선다. 나는 주군께서 김동욱 목사를 다시 세우실 것을 믿는다. 하나님은 여전히 그와 함께하심을 믿기에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