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작가를 보면 나는 ‘희다.’라는 이미지가 떠오른다. 그녀의 얼굴이 창백해서일까? 아니면 그녀의 저서 속에서 말한 대부분 등장인물의 삶이 창백해서일까? 여하튼 나는 한강 작가를 떠올리면 작가의 표현 그대로 ‘흼’(the energy of whiteness)이라는 이미지가 연상된다. 아니나 다를까 나는 2016년에 그녀의 소설 ‘흰’을 만났다. 어법이 맞는지 모르겠지만 작가가 리스트-업 한 단어들을 첫 페이지에서 만나면서 나는 ‘푸르도록 흰’ 그녀가 펼쳐나갈 작업의 세계가 그려졌다. “강보, 배내옷, 소금, 눈, 얼음, 달, 쌀, 파도, 백목련, 흰 새, 하얗게 웃다, 백지, 흰 개, 백발, 수의” (9〜10쪽) 하지만 작가는 며칠이 지난 뒤에 본인이 열거하여 목록을 만들어놓았던 흰 단어들을 보면서 이런 소회를 느꼈다고 적었다. “활로 철현을 켜면 슬프거나 기이하거나 새된 소리가 나는 것처럼, 이 단어들로 심장을 문지르면 어떤 문장들이건 흘러나올 것이다. 그 문장들 사이에 흰 거즈를 덮고 숨어도 괜찮은 걸까.”(10쪽) “이 단어들로 심장을 문지르면 어떤 문장들이건 흘러나올 것이다.” 8년 전에 한강이 밝힌 이 문장 때문에, 나는 마치 그녀와 연애하는 듯한 설렘으로 ‘흰’을 열었던 기억이 너무 선명하다. 그렇게 한강과 교제한 후에, 왠지 모를 ‘마음 따라감’에 이끌려 멘부커상 수상작 『채식주의자』를 만났고, 더불어 『희랍어 시간』을 늦깎이로 만나 교우들과 독서 여행으로 감동을 나누었다. 이후 조금 오랜 후에 『작별하지 않는다』를 섭렵하면서, 왜 한강은 이토록 지난(至難)한 고통과 끈질기게 연을 맺으려고 하는 것일까에 천착하다가 너무 자연스럽게 그녀가 왜 ‘푸른 흼’의 존재인지를 알게 되었다. 이번에 노벨문학상을 타게 한 가장 결정적인 소설 『소년이 온다』를 처음 만났을 때 너무 아리고 아린 충격을 받았고, 그녀의 글이 준 스티그마(στίγμα)의 아우라가 너무 커서 한동안 굶주린 늑대들이 광주에서 벌인 살육의 카니발에 대해 무감각했던 죄책감에 사로잡혀 헤어 나올 수 없는 자괴감의 소용돌이에 빠졌던 기억도 오롯하다. 죄책에 대한 탕감 심리였을까? 내 첫 번째 출간 도서인 『시골 목사의 행복한 글 여행』의 타이틀 북 리뷰로 『소년이 온다』를 실었던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탁월한 선택이었기에 자랑스럽다. 작가는 이렇게 고백했다. “이제 당신에게 내가 흰 것을 줄게 더럽혀지더라도 흰 것을, 오직 흰 것을 건넬게. 더 이상 스스로에게 묻지 않을게. 이 삶을 당신에게 건네어도 괜찮을지” (『흰』, 40쪽) “그 흰, 모든 흰 것들 속에서 당신이 마지막으로 내쉰 숨을 들이마실 것이다.” (위의 책, 129쪽) 그리스도인으로 살면서, 아니 목사로 살면서 이런 순백의 흼을 고백할 수 있다면, 동시에 이 흼을 추구하며 살 수만 있다면 실패하지 않은 인생일 텐데, 나는 너무 많은 때가 묻어 있다. 나이 듦이 슬픈 이유이기도 하다. 대한민국이 한강으로 도배된 하루 속에 있었다. 지난 몇 년, 전혀 행복하지 않았던 나날이었는데 푸르고 푸르게 흰 사람 한강 때문에 너무 행복한 하루를 보냈다. 아픔을 보상받은 기분이다. 그런 날이었다. 그녀가 남긴 인터뷰 거절의 이유가 나를 끝까지 감동시킨다. “지금 세계 2곳(팔레스타인과 우크라이나)에서 전쟁을 하고 있는데, 축하 잔치를 해서는 안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