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5월에 생면부지의 땅, 제천에 발을 디뎠으니까 이제 21년째 이 땅에서 살아간다.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기에 앞으로 몇 년을 더 이 땅에서 살게 될지 모르겠지만, 하나님이 힘주시면 어언 27〜28년에 가까운 세월을 제천이라는 땅에서 발을 딛고 살아야 한다. 제천은 내게 참 굵은 삶의 흔적을 남겼다. 가장 낮은 자리까지 곤두박질하는 경험도 했고, 주군을 아딧줄 삼아 다시 올곧게 서는 경험도 하게 했다. 소위 시쳇말로 회자하는 산전수전공중전도 모두 겪어 보았고, 목사로서 인내하는 삶이 어디까지인가도 맛보게 했던 곳이 이곳 제천이다. 아는 지인이 오래전 교회를 개척하는 나를 두고 내기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이강덕 목사는 서울 지향적이기에 교회를 개척했지만, 5년 안에 서울로 이동할 것에 내 재산을 건다.” 그치는 그렇게 올인(ALL-IN)했는데 아직도 재산을 내놓지 않고 있다. 그러고 보면 제천은 내겐 참 애증의 대상임에 틀림이 없다. 이곳에서 목사로 21년을 치열하게 살았고, 앞으로도 치열하게 살 것이 분명하다. 극히 개인적인 소회지만, 제천이라는 소도시에서 목회를 하면서 정말 힘이 들었던 것, 그리고 여전히 지금도 힘든 사역은 부 교역자를 청빙(請聘)하는 일이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제천이라는 지역이 젊은 목회자들에게는 매력(?)이 없기 때문이다. 대도시 중심적인 21세기 환경에서 제천이라는 도시로 내려가면 왠지 좌천되었다는 심리가 젊은 목회자들에게 있는 듯하다. 그것도 아니면, 문화적으로 낙후된 지역이기에 자녀들의 교육이나 자기 계발이나 성장에 뒤지게 된다는 패배 의식도 한몫하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이런 이들에게 ‘아골 골짝 빈들에도’를 들춰내면 전설의 고향 타령한다고 타박하는 시대이니 유구무언이다. 2024년, 적어도 목회자가 가져야 할 사명감을 부 교역자들에게 운운하는 것은 발언해서는 안 되는 꼰대들의 금기어가 된 것이 쓰디쓴 현실이다. 전언에 의하면 서울에서도 부 교역자 구하기가 하늘에서 별 따기라고 해서 전도사가 아니라 ‘금(金)도사’라는 별칭까지 생겼다는데, 제천이야 재론의 여지가 있겠나 싶다. 장인이 목회하는 교회 담임목사로 청빙 받은 부목사와 불편한 동거를 한 지 3개월을 지나고 있다. 할 짓이 아닌 것을 알지만, 부목사의 이임 조건을 제천세인교회 부 교역자 리더십이 연계되는 것으로 교단에서 행정 조건화했기에 나 또한 그날을 기다리고 있다. 조만간 좋은 소식이 임할 것이라는 마음으로 자위한다. 젊은 날 같으면, 일당백의 자세로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을 만들지도 않았을 것이고 극복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목회를 혼자 할 수 있는 나이가 아니다. 섬기는 교회도 혼자 일할 수 있는 규모가 아니다. 설상가상으로 6학년 4반 학생은 체력이 받쳐주질 않는다. 고민하는 나를 보고 교우 한 명이 안타까워하며 농 반 진 반으로 지쳐 있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목사님, 아들 목사에게 세습할 수 있도록 미리 부르세요. 저는 전적으로 지지합니다.” 웃고 만다. 세습이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운 일이기도 하지만, 젊은 아들 목사도 서울지향형인 것은 도긴개긴이다. 조선 시대처럼 젊은 목회자들에게 제천은 귀향지다. 슬프고 아프지만 현실이다. 내가 갖고 있는 제천세인교회의 자존감은 욱(?)하지만, 현실 앞에서 또 엎드릴 수밖에. 제천이라는 곳에서의 목회, 끝까지 순교적 영성을 요구한다. 아, 제천, 슬프고도 애잔한 바로 이곳에서 나는 21년째 교회를 안고 가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