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했던 성결교회를 떠나며 (목회서신 1) 저의 신앙적인 추억이 담긴 고향교회는 인천이라는 대도시였음에도 불구하고 교회 앞마당에 큰 플라타너스 나무가 있었습니다. 그 나무는 고향교회의 역사와 함께 그렇게 아름드리를 자랑하면서 우뚝 솟아 있었습니다. 여름성경학교가 한참 열릴 때는 요즈음처럼 에어컨 시설이 잘 완비되어 있는 시대가 아니었기에 반사 선생님들이 공과공부를 위해서 야외수업을 할 때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주면서 영락없는 인기 최고의 야외소품 역할을 톡톡히 해냈습니다. 그러던 추억의 나무가 고향교회가 현대식 건물로 건축될 때 잘려나갔다는 이야기를 듣고 마음 아파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고향교회는 그렇게 저에게는 추억의 공간이요, 애잔했던 과거의 향수를 살리는 곳이었습니다. 바로 그곳은 송림성결교회였습니다. 그곳에서 신앙의 훈련을 받고, 은혜의 결과로 신학을 하기 위해 모교회의 교단적인 배경인 서울신학대학교를 진학하게 되었습니다. 기독교대한성결교회라는 교단적인 배경이 무엇인지 자세히 알지 못하던 시절 무조건 출신교회가 성결교회였기에 당연히 서울신학대학교에 입학을 해야 하는지 알았고 또 그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선지동산에서 열심히 공부를 했습니다. 1987년에 졸업을 한 뒤 지금까지 성결교회의 전도사로, 목사로 사역한지가 22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성결교회의 성직자로 사역하며 자랑스럽게 자존감을 갖고 열정적으로 하나님 보시기에는 한없이 초라하고 부족한 종이지만 사람들에게는 부끄러움이 없는 영적인 자존감을 갖고 지난 세월을 지내온 것 같습니다. 부산신학교에서 강의를 할 때 성결교회 신학생들이 실력이 없는 상태로 현장에 나가 평신도 사역자들에게 비토를 당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하며 신학생들이 코피가 터지도록 공부를 시켰던 것을 기억합니다. 종은 그만큼 성결교회의 성직자로서의 자존감을 강조하며 성결교회를 사랑했던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 목사가 되면 목회를 전념하면 되는지 알았습니다. 그러나 목회를 하면 할수록 목사에게 강요되는 것 중의 하나가 정치적인 색채였습니다. 정치적인 색채를 분명하게 하지 않으면 떠밀리는 경우가 허다함을 보게 되었습니다. 정치적인 색채를 분명히 하지 않으면 이른바 왕따 목사가 되는 것을 늦게 알게 되었습니다. 조직교회에서 조직목회를 하는 목사는 그래서 대전제가 정치적이 되어야 하는 것이 서글픈 현실입니다. 개인적으로 이번에 분립개척을 하면서 처절하게 경험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조직목회에서 살아남는 것은 목회를 향한 열심도 아니요, 교회 부흥의 잣대도 아니요, 정직한 목회자로서의 자리매김도 아니며, 건강한 사역자가 되는 것에는 더더욱 관심조차 없다는 것을 알았고 도리어 정치적인 구조와의 타협임을 배웠다는 것입니다. 가톨릭의 사제들과 달리 목사로 안수를 받고 현장에 파송되어 그 현장이 사역의 현장임과 동시에 생존의 현장이 되는 특수한 위치에 있는 개신교회 목회자들의 운신의 폭은 상대적으로 적으며, 위축될 수 밖에 없는 아픔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어쩔 수 없는 현실을 감안하며 목회의 본질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영적인 엘리압과의 싸움에서 지치고 또 지치는 경우가 허다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1992년 목사안수를 받으며, 목사의 로브(robe)를 입으면서 결심한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사람에게 인정받는 목사가 아니라 하나님께 인정받는 목사가 되어야 한다는 거룩한 자존심이었습니다. 이것은 아무리 양보를 해도 양보를 할 수 없는 종의 최후의 마지노선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세인의 지체 여러분! 종은 정치적인 면에서 평가할 때 0 점인 목사입니다. 정치적인 면에서는 철저히 실패한 목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번에 교회를 분립한 이후에도 종은 그토록 사랑했던 성결교회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세속적인 관점에서 볼 때 우리 세인교회의 지체들은 무능한 목사를 담임목사로 맞이한 불쌍한(?) 사람들인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신앙생활을 한 성결교회의 적(籍)을 이제 동시에 종과 함께 버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지난 3월 1일 주일 교단을 독립교회 연합회로 가입하는 무기명 투표에서 전원일치로 찬성을 해 준 교우들을 보면서 감사와 경의를 표하게 되었습니다. 40년을 섬긴 성결교회를 떠나야 하는 장로님, 권사님, 집사님들이 왜 회한이 없을까를 생각하니 마음이 찢어지게 아픈 담임목사만의 아픔 또한 처절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종은 마음을 추스르기로 했습니다. 이제는 정말로 정치적인 논리로 교회의 본질과는 상관이 없이 자리를 사수하려는 구태에서 벗어나 정말로 세상이 인정하는 교회를 이 땅 제천에 만들기 위해서, 수없이 함께 나눈 한국은행 같은 교회를 우리 제천에 만들기 위하여 분연히 일어나 헌신해 준 우리 세인교회의 교우들에게 박수갈채를 보내드립니다. 이제 독립교회 선교 연합회에 가입을 위한 신청을 하게 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사역을 진행함으로서 받아야 하는 여러 가지의 교단적인 불이익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세인교회를 이 땅 제천에서 '교회는 많은 데 갈 교회가 없다'고 탄식하는 저들을 향해 마음껏 하나님을 찬양하고 가고 싶은 교회로 만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저의 영적인 멘토(mentor)이자 우리가 가입할 독립교회 연합회에 가입해서 이미 한국교회의 나아가야 방향성을 제시해주고 계신 100주년 기념교회의 이재철 목사님께서 그의 후배들이 공부하는 장로교 신학대학원에서 인도한 신앙수련회에서 행하셨던 설교를 글에서 읽으며 주체할 수 없는 감격으로 인해 펑펑 울었던 적이 있습니다. 내용이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이재철목사께서 한국교회의 원로 한 분과 함께 장거리 여행을 했습니다. 그 분이 직접 손수 운전을 하면서 5시간 가까이 여행을 했습니다. 여행을 하면서 그 분이 나에게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이 목사! 나는 차를 타면서 장거리 여행을 할 때 피곤하지 않게 운전하는 방법을 알아. 그것은 차가 움직이는 대로 내 몸도 움직이면 절대로 운전이 피곤하지 않아. 그런데 이것은 운전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인생도 마찬가지지. 세상이 움직이는 대로 나도 움직이면 되는 거야. 그러면 삶이 편안해 지는 거야. 다 이 목사 자네를 위해서 하는 말이야 알아듣겠는가?" 이재철목사께서 그 순간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물론입니다. 저를 사랑하셔서 하는 말인지 다 압니다. 그러나 저는 지금 이대로의 목사가 되렵니다." 그리고 이재철목사께서 그 날 설교를 마치면서 후배들에게 이렇게 울면서 설교를 맺었습니다. "선지동산에서 목회자가 되기 위해서 수학하는 후배 여러분! 여러분은 프로 목회자가 되십시오. 나도 프로 목사로 살고 싶습니다." 저는 오늘 우리 세인의 지체들에게 드리는 첫 번째의 목회서신을 썼습니다. 사랑했던 성결교회를 떠나면서 우리 교우들에게 전하고 싶습니다. 세인의 지체 여러분! 우리 모두 프로 크리스천이 되십시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 담임목사는 여러분과 함께 하며 여러분을 사랑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