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교롭게 9월 들어 동기 목사들의 자녀들이 혼례를 치르는 일이 계속해서 진행되어 축하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자녀들의 결혼식을 오프라인으로 참여하기를 동기들에게는 직접, 코로나 19로 인해 온라인으로 할 수 밖에 없는 동기들에게 온라인으로 참석해서 마음껏 축복해 주었습니다. 어제만 해도 자녀들을 훌륭하게 양육하여 출가시키는 그 마음이 어떨까를 생각하는 것은 남의 나라의 일이었습니다, 나에게는 아주 먼 나라의 이야기였기에 말입니다. 하지만 거의 매주 날아오는 자녀들의 결혼을 알리는 혼례 소식은 제게도 이제는 자녀의 결혼이라는 대사가 생소한 일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하기에 충분했습니다. 아들을 장가보내는 동기의 마음, 딸을 시집보내는 동기의 심정을 멀리서나마 눈동냥으로 훔쳐 보았습니다, 둘 다, 이제 해치우게 되어서 후련하다고 말은 하지만 앞으로 출가한 자녀들이 행복하고 아름다운 가정을 이루어주기를 고대하는 그 간절함을 정서적으로 느낄 수 있었던 것은 이제 얼마 후면 나 또한 이런 일을 직접 경험할 장본인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동기 자녀들의 결혼식을 직간접적으로 보면서 주례는 누구에게 맡겼나를 눈 여겨 보았습니다. 신랑 측 교회의 담임목사, 신학교 선배, 그리고 동기 목사 중에 가장 친한 친구를 자녀들이 출발하는 첫 예배에 축복자로 세운 것을 보다가 그래, 첫 권면은 참 귀하겠구나!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생각이 여기까지 이르자, 생뚱맞은 상상도 해보았습니다. 그리 멀지 않은 미래에 아들이 결혼을 하게 되면 주례는 내가 하면 어떨까! 물론 아들도 기절하고, 며느리가 될 아이도 기절할 생각이겠지만 상상하는 것은 자유라, 기분 좋은 상상을 한 번 해 보았습니다, 만에 그렇게 되면 이렇게 말해 주리라! “아들, 며느리에게 부탁한다. 예수 잘 믿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끝” 주례사가 너무 짧고 은혜롭지 않습니까? (ㅎㅎ) 31년 전, 내 결혼식에 주례를 맡아 주셨던 섬기던 교회 담임목사님은 주례를 장장 35분을 하셨습니다. 주일 낮 예배 설교에 즈음한 주례사를 하는 바람에 저와 아내는 정말로 쓰러지는 줄 알았습니다. 그렇게 힘든 주례사를 들었지만 지난 31년 동안 주례사의 본문이었던 시편 128:1-6절은 제 삶의 좌우명이 되었고 영적 지렛대가 되었음에 지금도 감사하고 있습니다. 나는 이렇게 계획을 세웠는데 아들은 결혼에 대하여 1도 생각이 없어 보입니다. 지금 하고 있는 학위과정을 마치는 것 말고는 전혀 결혼 생각이 없는 걸, 저만 김칫국을 마시는 쓸데없는 상상을 하는 것 같아 조금은 서운합니다. 아내가 여름옷을 거둬들이고 가을, 겨울옷을 꺼내 정리하는 데 이전에는 한나절이면 충분했던 것이 이번에는 두 번 쉬면서 하루 종일 걸린 것을 보면서, 장가 안 간 자식 뒷바라지를 하는 아내가 안쓰럽기도 하고, 그걸 너무 당연하게 여기는 아들을 보며 은근히 부아가 치밀어 오르는 나를 봅니다. 그래서 얼마 전에는 애매하게 아들을 잡으면서 이렇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이놈아, 아빠는 네 나이에 널 낳았다!” 이렇게 소리를 지르는 저를 보고 아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아버지, 그래서 어쩌라고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