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숨과 날숨의 교차가 필요한 때입니다. 몇 개월 전 월요일에 아내와 청풍 호반에 다녀왔습니다. 코로나 19로 인해 사람들의 모습이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한적해서 역설적이기는 하지만, 오히려 사람으로 인해 엄습하는 두려움이 사라져 고즈넉한 청풍 호수를 즐기고 돌아오는 행운을 만났습니다. 탁 트인 호수를 바라보면서 심호흡을 크게 내뱉고 마음껏 청량한 공기를 맛볼 수 있었습니다. 그날따라 날씨까지 쾌청해서 불편하기 짝이 없는 마스크까지 벗어버리고 타의적으로 짓눌려 있는 내 육체와 영혼을 힐링 하는 너무 좋은 시간을 호젓이 가져보았습니다. 지난 주간에 조지 플로이드의 장례식이 엄수되었습니다. 단지 흑인이라는 것 때문에 백인들에게 종차별(種差別)을 당하며 희생당한 그의 주검을 하나님께 돌리는 시간, 목사라는 직으로 살아가고 있는 나는 참기 어려운 격정이 끓어올랐습니다. 마치 제 2차 걸프전 발발 시 미국이 항공모함에서 바그다드를 향하여 토마호크 미사일을 날릴 때 아비규환으로 살점이 떨어져 나가면서 죽어가야 했던 바그다드의 어린이들을 생각하면서 열이 40°에 이르고 맥박이 100이상으로 뛰었다고 아픔을 절절히 토로했던 고 권정생 선생의 그 고통이 제게도 임하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장례식을 언론을 통해 보면서 마치 나 역시 숨을 내쉬기가 어려운 공감의 동통(同通)을 경험했습니다. 폭력적 공권력과 백인우월주의라는 물리적, 인종적인 기형의 괴물 앞에서 8분 46초간 숨을 쉬지 못하고 사라져 버린 플로이드의 죽음은 아마도 이 땅에 살고 있는 또 다른 시공간에 존재하던 플로이드인 약자들의 죽음이기에 현직 목양의 현장에서 목사로 살아가고 있는 그의 장레식은 저에게는 엄청난 고통으로 스며들었습니다. 노벨 평화상 수상자인 엘리 위젤은 그의 걸각 ‘나이트’에서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믿음이 없으면 어떤 행동도 불가능합니다. 행동은 드러나지 않는 가장 큰 위험인 무관심에 대한 유일한 치유책입니다.” (도서출판 예담 간, p,206) 천만 다행인 것은 야만의 정치권력을 갖고 있는 미국적 골리앗에 대항하는 이성적, 그리고 신학적(담임목사의 변) 올곧음을 갖고 있는 소수들이 행동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 소수의 다윗들이 야만적이고, 폭력을 무기 삼는 괴물들과 싸우기 위해 무관심하지 않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힘든 세상이지만 아직은 살만한 세상을 만들려는 사람들이 여기저기에 있다는 생각이 들어 위안 되었습니다. 숨을 내쉬지 못해 싸늘하게 죽어갔던 플로이드였지만 그는 본인의 죽음을 대가로 우리가 살고 있는 숨 막히는 세상인 이 땅을 깨우쳐주는 호흡을 내쉬고 갔습니다. 적어도 하나님의 걸작인 인간으로 태어났다면 그 누구도 그 어떤 종류의 국가 폭력에 희생을 당할 만한 가치가 없는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호령하며 떠난 셈입니다. 한나 아렌트가 지적했던 ‘악의 평범성’이라는 최고의 악은 이제 악이 아닌 ‘선택적 기호’라는 이름으로 둔갑하여 우리 곁에 서 있습니다. 정말로 소름끼치게 두려운 것은 그 악이 나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일이라고 치부하며 무관심해하는 극도의 이기성이 똬리를 틀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 공간이 나와 너의 영혼을 조르고 있는 이 땅이 바로 지금 여기라는 점이 몹시 두렵습니다. 그러나 너와 내가 분연히 싸워야 하는 것이 있음을 알기에 다시 일어서보렵니다. 부활의 주군께서 두려워 떨고 있는 제자들 공동체에 오셔서 오롯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중략)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요한복음 20:19-22 중에서) 주님이 내뱉으신 이 호흡하기가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한 오늘입니다. 주님이 호흡하신 이 들숨과 날숨을 날마다 공급받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저와 여러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왜? 그래야 진정한 평강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에 임할 테니까요. 우리의 이웃이었던 조지 페리 플로이드의 영혼에 삼가 주님의 위로하심이 있기를 화살기도 해 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