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힘
지난 주간에 중앙대학교 독일 유럽학과 교수인 김누리 교수가 쓴 ‘우리의 불행은 당연하지 않습니다.’를 독서했습니다. 그 중에 한 글을 소개하겠습니다. “독일 총리였던 빌리브란트가 무릎을 꿇었던 유명한 사진을 본 적이 있나요? 그가 폴란드 바르샤바의 유태인 게토를 방문한 자리에서 갑자기 무릎을 꿇어 세상을 놀라게 했지요. 후일 브란트의 회고에 따르면 원래 무릎을 꿇어야겠다는 생각을 갖고 간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어떤 힘, 무언가 이름 지을 수 없는 어떤 압력이 자신을 내리눌렀다고 회고합니다. 당시에 이 사건은 독일에서 긍정적으로 평가만 된 것이 아닙니다. 보수주의자들의 반발도 컸지요.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 사건을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브란트가 무릎을 꿇음으로써 독일이 일어섰다.’” (김누리, “우리의 불행은 당연하지 않습니다.”, 해냄,p,73)
브란트의 회고 중에 나오는 이 글을 읽다가 ‘어떤 힘’에 대하여 깊은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브란트에게 있어서 어떤 힘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는 독일이라는 기독교국가의 총리이니 목사인 내가 너무나도 당연하게 ‘어떤 힘’을 ‘하나님의 이끄심’이라고 해석하는 것에서 그리 멀지 않을 것이라고 의지적 동의를 압박해 보았습니다. 아마도 기독교적인 사고나 관념 혹은 신앙을 갖고 있지 않은 자라면 그것을 ‘양심’이라고 혹은 ‘도덕적인 계율’ 정도로 보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한 발 더 나아가 지성적 무신론자들이라면 그들의 좋아하는 ‘이성의 체계’ 혹은 ‘과학적 합리성’ 등등이라고 어떤 힘을 해석할 것입니다. 여기 즈음에서 한 가지 화두를 던지고 싶어졌습니다. 아무래도 좋으니 그 ‘어떤 힘’이 내가 살고 있는 이 땅에서 사라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상념 말입니다. 이렇게 한 발 물러서서라도 그 ‘어떤 힘’이 사라지지 않기를 바라는 제 마음이 동하는 이유는 그 어떤 힘이 무엇이든 상식적일 것이라는 믿음 때문입니다. 정말 두려워지는 것이 있습니다. 그 ‘어떤 힘’이 어느 날 ‘어떤 힘’ 되지 못하게 될 날이 올 것이라는 두려움입니다. 죄가 ‘기호’가 되고 ‘정치적 선택’이 되는 날로 정해질 때 그 ‘어떤 힘’은 사라지게 될 것 같아 무척이나 두렵습니다. 그래도 지금은 그 ‘어떤 힘’ 때문에 버티는데 그 버팀목 자체가 없어질 것에 대한 두려움이 근래 나를 엄습하고 있습니다. 목사로 사는 게 힘들고 어렵습니다. 한 교회의 지도자인 목사로 사는 게 만만하지가 않습니다. 한 공동체의 리더인 목사로 사는 게 녹록하지 않습니다. 누구에게나 ‘넌 목사니까’로 살아야 하는 게 쉽지 않습니다. 가끔 잊을 만하면 들려오는 같은 목사를 향한 거침없는 비난의 목소리는 이제는 경기(驚起)를 할 정도입니다. 심지어 위로를 받고 싶은 가족들에게 조차 당신은 목사잖아요! 의 레테르가 위로가 아닌 압박으로 다가와 누구에게도 가까이 하지 못할 것 같은 목사만이 처절한 외로움이 있습니다. 해서 그 ‘어떤 힘’이 나에게는 더 절실한 데 주변 상황은 그리 호의적이지 않습니다. 지난 주에 슐리어리스트인 이신 박사의 시를 친구에게 선물로 받았습니다. 읽다가 그가 남긴 시어에 아롱져 맺혔습니다. 당신은 그렇게도 소리 높여/‘이것이 그것이다’라고 말하였지마는/나에게는/오히려 ‘이것’은/‘이것’일 따름이고/‘그것’은 그것‘일 따름이다.(이신, “돌의 소리” 동연 간,p,92.) 이것이 그것이라고 외치며 살아온 지난 목회 여정이 이것이 이것이라고 회귀되는 참담함이 내 사역의 여정 중에는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도 목사는 그 ‘어떤 힘’으로 살아왔기에 말입니다. 훗날 그 ‘어떤 힘’을 의지한 삶이 옳았어! 라고 회고한 목사로 남고 싶기에 말입니다. 한 주, 무척이나 힘든 시간을 보냈습니다. 키리에 엘레이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