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슷한 직종인데 기도해 줘요.
주일학교에 출석하는 어린이 중에 어머니가 무속인인 아이가 있습니다. 너무 귀한 아이입니다. 더불어 그 어머니에게도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만나서 이야기를 해보지는 않았지만 결코 흔치 않은 일을 아이들에게 제공해 주는 그 어머니가 참 멋있어 보이기까지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본인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김기석은 본인의 근래 작(作)에서 이렇게 말했는데 전적으로 동의하여 밑줄 그어 놓았습니다. “사람은 저마다 자기 삶의 저자다. 각자가 분유(分有)된 시간과 공간 속에서 삶의 이야기를 써 간다.” (욕망의 페르조나, 예책,p,245.) 세간에서 세인들의 눈초리로 보면 무속의 일을 하는 사람을 정상적이라고 평가하지 않았던 것은 기실 어제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신 내림을 받았다는 것 자체가 곱지 않은 시선의 조건이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나 같은 목사는 정말로 길을 잘못 들어선 존재라고 무심코 정죄하기까지 합니다. 물론, 저 역시 주일학교 아이의 어머니가 무속인(巫俗人)으로 있다는 것에 대하여 매우 안타까운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김 목사의 말대로 그녀 역시 그녀 인생의 이야기에 대한 저자임이 틀림없을 텐데 하는 마음이 들다보니 그냥 그렇게 그녀를 존중해 주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녀에게 다메섹에서 바울을 만나주셨던 주군의 영적 섬광이 임하기를 간절히 소망해봅니다. 그 아이를 담당하는 주일학교 교사로부터 전언이 왔습니다. “목사님, 아무개 어머니가 교회에 쌀을 전달하고 싶어 하시는 데 어떻게 하지요?” 헐! 이게 뭐지…. 맨 처음의 소회였습니다. 무속인이 교회에 쌀을 보내겠다니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하지! 순간 조금은 당황했지만 이내 마음을 추스르고 이렇게 정리하기로 했습니다. “주일학교 어린아이의 어머니가 보내준 쌀에 종교적인 의미를 보태 넣지 말자.”고. 해서 이 쌀을 교회 주방 봉사의 책임을 맡고 있는 권사님에게 전달해서 관내 사회복지 시설이나 또 다른 유관기관에 기부하는 것으로. 아마도 이렇게 하는 것이 가장 이 쌀을 적절하게 사용하는 것이 아닐까 싶어 그렇게 지시했습니다. 역사적 예수의 대가라고 불리는 마커스 보그의 책을 읽다가 그가 제시한 범재신론에 대한 정의에 순간 멈추었던 적이 있습니다. “‘초월성’은 하나님의 ‘크심’ 즉 하나님은 물질과 에너지의 시공간적 세계보다 크신 분임을 말한다. ‘내재성’은 어디에나 거주한다는 어원을 유출되었는데 즉 하나님은 어디에나 현존함을 말한다.” (마커스 보그, “놀라움과 경외의 나날들”, 한국기독교연구소, p,61) 이 두 가지 하나님의 속성을 증언하고 인지하는 것이 기독교라고 말한 대목을 나 또한 지지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난 교회가 너무 배타적이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더불어 한쪽으로 치우치는 편협함의 천박함에서도 자유로웠으면 좋겠습니다. 무속인으로 있는 아이의 어머니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만 보지 않고 초월하신 하나님께서, 그리고 어디에나 거주하시는 하나님께서 전인격적으로 임하여 주시기를 기대해봅니다. 이 일을 겪은 아내가 저에게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강덕 목사님, 비슷한 직종에 있으니까 아이 엄마를 위해 기도해 줘요!” 아내의 이야기를 듣다가 존 웨슬리가 했던 말이 문득 떠올라 나도 모르게 피식했습니다. 웨슬리는 껍데기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지요. “비슷한 그리스도인(Almost Christian)” 목사라고 불리면 산지가 30년 이상이 되었는데 혹시 누군가 나에게 난 비슷한 그리스도인 목사라고 호칭하면 어떻게 하지, 생각하니 등골이 오싹해졌습니다.
분명한 것은 그 아이 엄마를 위해 기도했다는 점입니다. 그러고 보니 무속인을 위해 기도한 것은 난생 처음이었습니다. 이제는 아주 가끔 비슷한 직종에 있는 그녀를 위해 기도할까 합니다. 비슷한 직종이니까요.(?) ㅎㅎ.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