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 만에 다시 열람한 재정 장부를 보고
목회를 하면서 가장 골치 아픈 사역을 하나 들라면 사람을 세우는 일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동안의 사역을 비추어 볼 때 잘 해야 본전이기 때문입니다. 흔히 세간에서 하는 말이 있습니다. 인사(人事)가 만사(萬事)라고. 하지만 목회 현장에서는 꼭 그런 것만 같지도 않습니다. 상황에 따라 수없이 많은 변수가 도사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목사안수를 받으면서 하나님께 약속했던 3가지는 사람을 기쁘게 하는 목회를 하지 않겠다는 것, 또 하나가 굶어죽는 일이 있어도 물질에 무릎 꿇지 않겠다는 것, 그리고 교회 정치에 얼씬도 하지 않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저는 단독목회를 하던 농촌의 자그마한 교회에서부터 지금까지 교회 재정 장부를 손에 댄 적이 없었습니다. 조금 더 거칠게 표현하자면 고의적으로 교회 재정에는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교우들이 어떻게 물질생활을 하고 있는지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이런 고집은 지난 목회 30년 간 이어져 왔습니다. 그러나 단 한 가지 예외는 있습니다. 임직자를 선정할 때입니다. 임직의 사전 작업으로 대상자들이 물질적인 면에 있어서 얼마나 하나님께 정직한 삶을 살았는가를 진단하는 자료로 사용할 때, 유일하게 재정부에 의뢰하여 그것도 대상자들에 국한하여 지난 헌금 생활에 데이터로 활용하기 위해 열람합니다. 정말로 하고 싶지 않은 일이지만 지난 2주 동안 이 일을 또 한 번 감당했습니다. 내년에 임직이 예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해서 재정부에 의뢰하여 임직 대상자들의 헌금 생활 데이터를 건네받고 열람했습니다. 지체들도 알다시피 세인 강단은 1년에 헌금에 관한 설교를 들을 기회가 거의 없는 강단입니다. 담임목사는 의도적인 헌금을 갹출하는 설교를 하는 얄팍한 목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일 설교의 강해 텍스트가 피할 수 없는 본문일 때만 본문에 국한한 물질 설교를 감당합니다. 그러기에 재 강조하지만 세인교회의 강단에서 아주 임의적으로 계획되고 전략화 된 질 나쁜 헌금 설교는 어떤 일이 있어도 말씀에 빙자하여 전해지지 않습니다. 가시적 교회는 성도 공동체의 지체들이 함께 하는 물질로 그 조직이 세워져 갑니다. 그것은 교회의 생리에 있어서 아주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해서 교우들은 교회를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역의 도구로 만들기 위해 함께 물질적인 헌신을 감당하는 것이 마땅하고 당연합니다. 다만 공동체의 지체 중, 바울이 말한 대로 연약한 자들에게 이런 헌신을 요구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기에 공동체를 위해 앞서서 나아가겠다고 결심한 임직자들은 저들을 위해서라도 물질적인 헌신을 감당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러나 이 일련의 행위는 전적으로 신앙의 행위에 따른 반응이어야 하기에 자칫 잘못하면 변질로 이끌 수 있는 리더인 교회의 담임목사는 언제나 교회 재정부와는 적당한 거리를 두며 사역을 해야 합니다. 그것을 알기에 그 동안 저는 재정부와는 분명한 거리를 두려고 노력했고 앞으로도 그렇게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 교회가 상업적인 천박한 집단으로 변질 될 수 있는 위험성에서 안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앞서 설명한 대로 임직자 선정을 앞둔 시점에서 4년 만에 다시 사역을 위해 일부 임직 대상자들에 한하여 저들의 물질생활에 대한 열람을 했습니다. 그리고 결과, 누가복음 10장에 기록된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가 떠올랐습니다.
있어서는 안 되는 사람인 강도, 있으나 마나 한 사람인 레위인과 제사장, 그리고 반드시 있어야 하는 사마리아 인의 비유가. 적어도 하나님을 위하여 그리고 그 주님의 교회를 위하여 앞서서 일하겠다고 나선 임직 대상자들은 이미 반드시 필요한 사람으로 서겠다는 일념으로 불편함을 선택한 세 번째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번 재정장부 열람을 통해 세인교회를 섬기는 목사는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구나하는 유감스러움이 너무 강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헷갈리기 시작했습니다. 사람에 대한 신뢰에 있어서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데도 임직 사역을 해야 하나 깊이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적어도 같은 실수는 두 번 해서는 안 되기에. 그러고 보니 맞는 말입니다. 인사가 만사라는 말은 거꾸로 해석해도. ㅠ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