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주일 설교, 눈앞이 캄캄합니다.
주일 남성 소그룹 성경공부 세 번째 사역이 지난 주일에 끝났습니다. 함께 공부한 테마는 달라스 윌라드가 쓴 ‘하나님의 모략’ 제 2과 ‘죄 관리의 복음’이었습니다. 남성 교우들이 두 주 동안 읽고 오는 분량에 따라 함께 나누고, 비평적으로 성찰하며, 동시에 이 장에서 주는 영적인 교훈을 함께 찾아내는 귀한 사역을 진행합니다. 저는 마지막에 교통정리를 해주는 역할 정도만 합니다. 아마도 성경공부에 참석한 남성지체들이 더 많은 공부를 하도록 하는 또 하나의 방법이기도 합니다. 지난 주 달라스 윌라드가 언급한 ‘죄 관리’(저는 ‘경영’이라는 단어를 더 선호하지만)에 대하여 나름 평신도적인 관점에서 치열한 공방이 오갔습니다. 남성 교우들 중에 진보적인 성향을 갖고 있는 교우는 좌익의 복음에 조금 더 부침했고, 보수적인 성향이 짙은 지체는 우익의 복음에 대하여 더 많은 지지를 표했습니다. 뭐, 당연한 일이라고 저 역시 예상했기에 쿨 하게 동의했습니다. 단지 남성 교우들끼리 서로의 입장을 존중하며 본인의 공부 결과는 주장해 나아가는 모습 속에 작금 우리가 속해 있는 정치권에 비해 훨씬 더 성숙한다는 아이러니에 매우 감사했습니다. 달라스 윌라드는 이 장에서 전적인 사회적인 복음만을 주장하는 좌익의 복음과 오직 구원의 도를 만사형통의 지침이라고 일방통행 하는 우익의 복음에 대하여 아주 냉철하게 유감을 표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자기만의 복음을 주장하며 양보하지 않는 그룹에 대하여 가장 경계해야 할 죄를 소개하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죄 관리(경영)’의 무감각에 대하여 합리화시키는 무서운 함정에 함몰되어 있음을 역설한 것입니다. 저는 달라스 윌라드의 이 적절한 통찰을 깊이 아로새겼습니다. 좌익도, 우익도 자기 것만을 주장할 때 동시에 밀려오는 죄의 무감각이라는 최고의 절정을 맛보게 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각인하는 좋은 시간을 가졌습니다. 죄에 대한 최고의 절정은 이렇습니다. “전자는 기독교를 사회 윤리로 전락시키는 죄(악)에 대한 평범성(한나 아렌트의 말대로)으로 확장되고, 후자는 성도가 살아내야 할 그리스도인의 삶과 분리된 껍데기 구원에 열광하게 한다.” 이것을 전제로 세 번째 사역의 치열함을 나누던 지체들에게 담임목사로서 교통정리를 해야 하는 시간, 저는 두 성향의 남성 교우들에게 제가 갖고 달려온 목회 신학의 엑기스를 나누며 정리해 주었습니다. “좌익의 복음은 아직 오지 않은 하나님의 나라에, 우익의 복음은 이미 이루어진 하나님 나라에 천착하며 서로의 긴장감을 유지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달라스 윌라드는 이 태도를 ‘삶과 신앙의 통합(integration)’이라고 강력하게 개진했습니다. 내 사랑하는 조국교회를 바라봅니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시간은 내 사랑하는 조국교회에 속해 있는 한 슈퍼 메가 처치의 이슈가 아이러니하게도 다시는 회복이 불가능할 것 같은 카운터펀치를 보기 좋게 날린 후입니다. ‘기적이 상식’이기를 바라는 몇 몇 기형적인 괴물 같은 교회들을 제외하고 ‘상식이 기적’이 되기를 기대하는 대다수의 건강한 교회(특히 우리 제천 같은 지방 소도시의 교회)들은 이 일로 인해 거의 넋 다운에 빠질 것이 자명합니다.
죄를 죄가 아니라고 달래주는 시대, 않는 것, 불법이 불법이라고 말하지 않는 시대, 그건 ‘선택적 기호’이지 ‘죄’가 아니라고 컨설팅해주는 시대, 출교를 당할까 봐 무너질 것 같지 않은 현대적 산헤드린 공회의 손을 들어주던 예수님의 시대를 방불하는 시대, 이게 왜 죄지?, 죄가 아니야 ‘정치적인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 라고 도리어 공격하는 시대에 목사로 살고 있습니다. 일련의 일들을 보며 이런 아픔이 고스란히 남는다. ‘죄를 컨설팅해 주는 교회’를 섬겨야 하는 목사는 정말이지 죽을 맛입니다. 목사는 설교로 말하는 사람인데, 오늘 주일, 강단에서 무슨 설교를 할지 눈앞이 캄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