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이 있는 서재
나이가 들면서 좋아지는 것이 몇 가지가 있습니다. 꽃이 그렇습니다. 물론 젊어서도 꽃은 제게는 언제나 행복을 주는 도구였습니다. 그럼에도 지금의 나이에 더 없이 소중해 보이는 변화는 들에 핀 이름 모를 꽃들까지 눈에 들어온다는 확대성입니다. 또 하나는 흙입니다. 물론 이렇게 말하면 언제나 되돌아오는 반응은 흙으로 돌아갈 날이 멀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수학공식과도 같은 메아리입니다. 부인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냥 흙냄새가 좋아진 것이지 죽을 날이 가까워져서 그렇다는 동의는 방어기제가 발동하여 별로 내키지 않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더 좋아지는 것 세 번째는 음악입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노래를 부르고 듣는 것을 꽤나 좋아한 편에 속합니다. 물론 장르 불문입니다. 어떤 음악이든 듣고 부르는 것을 즐겨한 편입니다. 물론 고인이 되신 부모님들이 악(樂)을 좋아하셨던 유전적인 인자가 저에게도 있는 게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런 교과서적인 이야기로 오늘의 이야기마당을 메우려는 것은 아닙니다.
목회를 하면서 음악은 저에게 뗄 레야 뗄 수 없는 소중한 도구가 되었음을 진하게 느끼곤 합니다. 예배의 예전은 물론, 영성 훈련의 도구로 적지 않게 효자노릇을 한 것이 음악입니다. 목회자로 서야 하겠다고 결심하고 배우고 다루게 된 악기(기타)와의 놀이는 제가 음악을 더 가까이 하게 된 동기로 작용했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앞에서 잠시 언급한 나이가 들면서 느껴지는 감동의 여백들이 약간의 변화가 있다고 했던 것처럼 음악도 예외는 아닌 것을 말씀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부르기보다 이제는 듣기가 훨씬 편해졌다는 뭐 그런 소회입니다.(ㅎㅎ) 호흡이 딸려 노래 부르기가 부담스러운 것도 있고, 아주 가끔은 아내에게 박자를 놓친다고 야단맞는 것도 두려워져서 노래 부르기는 이래저래 기피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와는 반비례로 노래듣기로 저의 허전함과 헛헛함을 메워가고 있어 그런대로 그 재미가 쏠쏠합니다.
몇 달 전, 서재를 정리하면서 가지고 있는 음향 시스템 정비를 시도했습니다. 가지고 있는 음향 장비들은 아내가 혼수로 가지고 온 가보 급이 된 전자 장비들이 거의 대부분이라 이제는 제 수명을 다했다고 더 이상 나에게 무언가를 기대하지 말라고 아우성치며 볼멘소리를 한지가 오래되었는데 모른 척하는 것도 한도가 있는지라 수리를 한답시고 손을 댔는데 수리는 고사하고 폐기처분해야 하는 곤란함을 당하게 되어 어쩔 수 없이 바꾸지 않으면 안 되는 장비들을 거금(?)을 들여 교체했습니다. 차제에 기계치인 저는 도무지 할 수 없는 서재에 세팅할 수 있는 음향 시설의 극대화를 위해 출장 서비스까지 받았습니다. 그렇게 완성된 서재 음향 장비에서 나오는 음악은 저에게 최고의 세레나데를 매일 선물해 줍니다.
턴테이블에서는 찌직거리며 흘러나오는 촌스러운 아날로그 선율은 저를 마비시킬 정도로 황홀하게 합니다. CD 박스에서 흘러나오는 디지털 음악의 선율도 또 그 맛대로의 감동의 음악을 선사합니다. 튜너에 고정되어 있는 FM for You 에서는 소프트웨어로 갖고 있지 않은 음악과노래를 들려줍니다. 지금 출고되는 기기에는 생산되지 않는 카세트 박스에서는 아주 오래 전, ‘목회와 신학’을 정기구독 할 때 부록을 보내준 이모저모의 목회 세미나 시리즈를 재생해 주는 효자노릇도 합니다. 말 그대로 음향장비들은 저에게는 버릴 것이 없는 시골 목사의 소장품 중에 보물들입니다.
어제 저녁에는 쇼팽의 야상곡을 들으면서 황현산의 유고집이 되어 버린 ‘사소한 부탁’을 완독했습니다. 쇼팽을 귀로 듣는 시간, 황현산이 소개한 발터 벤야민의 글은 시각으로 다가왔습니다.(황현산, “사소한 부탁”, 난다 간,p,283.)
“자연은 하나의 신전, 거기 살아 있는 기둥들은/간혹 혼돈스러운 말을 흘려보내니/인간은 정다운 눈길로 그를 지켜보는/상징의 숲을 건너 거길 지나간다.”
순간, 이런 전율함이 저를 용솟음치게 했습니다.
어찌, 이 감동을 제게, 어찌, 이 행복을 제게….
이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서재에는 마리아 칼라스가 영적인 오기 같은 것으로 부른 ‘LA DIVINA’로 가득합니다. 이 행복이 은퇴하는 그날까지 지속되기를 소박하게 꿈꿔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