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스쿼트
한 달 여 전에, 친구 목사들과 사적인 모임을 가졌습니다. 모일 때마다 대화의 상당수가 건강에 대한 이야기를 바뀌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하루가 멀다 하고 이제는 육체적인 나약함이 눈에 띄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신진대사가 원활하지 않아 여기저기에서 앓는 소리가 난다는 공통의 이야기는 이제 전혀 낯설지 않은 모두의 관심거리가 되었습니다. 저 역시 예외일 수 없습니다.
교회를 개척하고 나서, 하는 일이 훨씬 더 많아졌습니다. 사역은 사역대로 일거리가 많아지고, 공부는 공부대로 하루에 세워놓은 할당량이 있기에 그것을 이루기 위해 나름 나를 쳐서 복종한다는 의미에서 더 철저하게 스스로에게 냉혹하게 대합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절제된 삶을 사는 데에는 조금의 진보를 나타냈지만 문제는 정신에 비해 육체가 걸 맞는 보폭을 맞추지 못한다는 데에서 그 심각성이 보이기 시작했다는 점입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목회를 중단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절박함을 전제로 다시 시작한 것이 이제 6년 차에 접어드는 탁구입니다. 유산소 운동으로, 그리고 부족한 운동량을 보충하는 데에는 더할 나위 없이 효자노릇을 해준 탁구채 잡기는 그래서 일과를 마치고나면 꾀부리지 않고 일주일에 세 번 정도는 반드시 행하는 습관으로 자리매김 되었습니다. 그렇게 6년을 운동하다보니 이모저모 건강에 대한 신호들이 파랑색으로 바뀌었는데 문제는 근력이었습니다. 탁구라는 유산소 운동은 상체 전신운동 효과와 더불어 조금 세밀하게 말한다면 상체 근력 운동에 대한 탁월한 유익을 주었지만, 역설적으로 하체 근력에는 별 다른 도움을 주지 못했다는 점이 아쉬웠습니다. 나날이 약해져 가는 하체 근력을 튼튼히 하기 위해 시작한 것이 스쿼트입니다. 맨 처음 이 운동을 접했을 때는 재미가 없고, 힘도 들고, 꾀도 나서 열심히 하지 않았던 경험이 있기에 다시 그 모습으로 돌아가지 않기 위해 마음을 다잡이 하고 요즈음은 살기 위해 하루에 약 150회 정도 스쿼트를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시작한 스쿼트는 그 시작이 얼마 되지 않아 아직은 미비하지만 변화를 보이고 있어 처음 시작할 때보다는 덜 힘든 느낌과 더불어 하체 근력에 약간의 조짐이 보이고 있습니다. 아마도 탁구 운동과 스쿼트를 지속적으로 병행하다보면 목회하는 목사로서 조금은 더 건강한 모습으로 사역을 감당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 오늘도 그 운동의 끈을 놓지 않고 있습니다.
오늘 목양터 이야기 마당에 글을 쓰게 된 동기가 이렇습니다. 살기 위해 열심히 몸을 괴롭힙니다. 그리고 움직입니다. 육체가 편안하면 그때 위기가 오는 것을 알고 가능하면 열심히 몸을 움직이려고 합니다. 헌데 목사이기에 이럴 때마다 직업의식이 발동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저의 운명인 듯합니다.
영혼의 건강을 위해서 나는 얼마나 움직이고 있는가? 나는 지금 영혼의 근력을 강화하기 위해 영혼의 스쿼트를 그렇게 집요하게 하고 있는가? 나는 얼마나 영혼의 유산소 운동을 하고 있는가? 그러다가 주군께 부끄럽다는 생각을 드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사탄의 집요한 공격에 속절없이 무너졌다고 다시 뼈를 깎는 자기 성찰과 돌이킴의 행보를 통해 재기한 고든 맥도널도는 그래서 자신의 목회를 ‘목회 여정(旅程)’이라고 표현하지 않고 ‘목회 역정(歷程)’(‘리더는 무엇으로 사는가?, IVP, p,293.)이라고 묘사했던 글을 가슴으로 읽으며 동의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목회는 역정입니다. 역정은 스킬이나, 잔재주나, 방법론으로 걸을 수 있는 길이 아님을 인정하기에 천성을 향하여 걸어가던 기독자처럼 영혼의 스쿼트를 이 땅에서의 호흡이 끝나는 날까지 감당해 보려고 합니다.
최고의 영성 수사였던 토마스 머튼이 묶은 ‘사막의 지혜’를 보면 파르토스 아빠스의 가르침이 나옵니다.
“수도승이 무엇보다 미워해야 할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편안한 생활이요, 또 하나는 허영이다.”(토마스 머튼, “사막의 지혜”, 바오로딸,p,47.)
편안함과 맞서기 위해 오늘도 주군께 엎드려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