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이 기름 부으신 지성 “성령이 기름 부으신 지성이라 함은 단순히 신학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만유의 주님이심을 인정하고 세상의 모든 학문 즉 과학, 심리학, 역사, 철학, 문화, 예술 등등의 모든 학문을 크고 예리하게 성경적 시각으로 생각하고 고민하여 분석해 보려는 노력과 자기 단련을 의미한다.”(pp,39-40) 새로운 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한홍 목사가 쓴 “거인들의 발자국”에 나오는 글입니다. 이 글을 아주 오래 전에 만났을 때 참 적절한 해석이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습니다. 해서 제 마음 속에 항상 담보해서 새겼던 지성적인 갈파 중에 하나입니다. 아주 가끔, 기독교 텔레비전 방송으로 리모컨을 움직일 때가 있습니다. 그건 목사의 습관이 아니라 예의라고 믿는 모종의 오기 같은 것 때문입니다. 목사가 기독교 텔레비전을 시청해 주지 않으면 누가 본단 말인가! 라는 아주 진한 상투성의 발로라는 뭐 그런 것 말입니다. 문제는 기독교 방송국을 방문할 때마다 시각적으로 혹은 청각적으로 다가오는 전혀 신학적이지 않은 담론을 제시한 일부 설교자들의 어처구니없음으로 인해 다음에는 다시는 방문하지 않으리라 마음먹지만 그 놈의 정 때문에 그러지 않는 나를 볼 때 무척이나 한심해 보입니다. 누구라고 이름을 호명하면 다 알만한 신학교 선배께서 몇 년 전에 대한민국 대형 교회의 기라상과 같은 목회자를 향한 쓴 소리를 담은 설교 비평 서적을 출간한 적이 있었습니다. 선배는 조직신학자적인 기질을 발휘하여 도저히 손대면 안 될 것 같은 거인들을 호불호 가리지 않고 날카롭게 공격했습니다. 글을 읽다가 선배의 서슬이 시퍼런 대가들의 설교 비평이 눈에 들어와 저 역시 아주 민감하게 밑줄을 그으며 정독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물론, 그 선배의 비평을 100% 수용하지 않습니다. 선배와 내가 대척점에 있는 가장 두드러진 팩트 중에 하나는 설교의 환경적인 이해 차이입니다. 선배는 설교를 캐리그마 그 자체로 보아야 하기에 대중적인 선포로 둔갑시켜서는 안 된다는 강력한 지론을 갖고 있는 반면, 목회자인 저는 설교는 철저히 대중의 삶의 정황을 감안한 캐리그마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설교 신학을 갖고 있기에 그 접점을 찾기가 쉽지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아마도 목회자와 신학자라는 차이가 만든 미묘한 해석의 문제인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배가 이야기하고자하는 것을 상당수 많이 수용한 것은 이 핵심에 동의했기 때문입니다. 설교를 천박하게 만드는 연구와 공부가 없는 수없는 설교는 마땅히 비판받아야 마땅하다는 정서적 공감에 사인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피나는 연구와 공부, 그리고 기도가 밑받침 된 설교를 이렇게 정의합니다. “성령이 기름 부으심이 있는 지성적 설교” 다음 주부터 우리 세인교회에 바로 이 은혜의 잔치가 3주에 걸쳐 진행됩니다. 초청된 세 분의강사는 바로 우리 교우들에게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있는 설교를 통해 지성적 성찰을 공급해 줄 수 있는 최고의 선생님들입니다. 그러기에 저 역시 기도했고 또 기도하고 있습니다. 상업적인 부흥사들이 난무하고, 아직도 인위적으로 성령을 만들고 있는 실로 가공할 만한 집회들이 우후죽순 기생하여 건강한 그리스도인들을 유혹하는 시기가 바로 지금이기에 세인교회의 집회를 하나님께서 주목하고 계십니다. 그날, 느헤미야 8:8-9절 전반절이 여지없이 펼쳐지는 세인의 수문 앞 광장이 되기를 긴장하며 맞으십시다. 한 번도 실수하지 않으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 성령의 기름 부으신 지성적 감동을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책을 낭독(reading)하고 그 뜻을 해석하여(interpreting) 백성에게 그 낭독하는 것을 다 깨닫게 하니(understanding)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지라(weeping)” |